•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2. 귀족사회의 분열과 왕위쟁탈전
  • 3) 범진골 귀족세력 화합책의 시도

3) 범진골 귀족세력 화합책의 시도

 헌덕왕이 재위 18년(826) 10월에 죽자 副君의 자리에 있던 그의 동생 金秀宗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興德王이었다. 즉위 당시 50세였던 왕은 다정다감한 성품이었지만,024)흥덕왕릉비의 斷石에 ‘壽六十是日也’라 한 것이 보이는데, 이는 정녕 왕릉의 주인공인 흥덕왕 자신의 享年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閔泳珪,<新羅興德王陵碑斷石記>(≪歷史學報≫17·18, 1962), 626쪽 참조. 한편으로는 비범한 지략과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왕의 정치적 경험 또한 매우 풍부했다. 왕은 애장왕 5년(804) 정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집사부시중이 되어 3년간 재임했다. 동왕 6년 8월에 공포된 공식 20여 조 제정에 그가 직접 관계했을 것이 틀림없다. 왕은 그 뒤 헌덕왕 11년(819) 2월 상대등에 취임했다가 동왕 14년 정월 副君이 되어 月池宮에 들어갔다. 이 부군제도는 전례없는 것으로 어쩌면 태자에 준하는 위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흥덕왕이 즉위할 무렵 국내외 정세는 무척 다사다난했다. 대외적으로는 唐제국이 安史의 대란(755∼763)을 겪은 뒤 藩鎭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해 지방통치가 크게 느슨해졌고, 이 틈을 타서 중국의 해적선이 서해상에 창궐했다. 이들은 신라의 對唐 항로를 위협했을 뿐 아니라 신라의 무역선을 약탈했다. 더욱이 중국 해적선들은 신라의 근해에 출몰하여 서부 변경지역 주민을 납치하여 노예로 매매하기까지 했다. 또한 文王 때에 국력을 크게 확장한 渤海는 9세기에 들어와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신라의 北邊을 위협했다. 특히 발해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연출한 宣王이 즉위하면서 신라는 발해의 남침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편 일본과는 오래 전부터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끊긴 상태였다. 그런데 발해는 동해상을 통해서 일본과 긴밀한 교섭·통상관계를 줄곧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시야를 대외관계에서 국내 문제로 돌려 보면 심각한 위기상황이 소리없이 양성되고 있었다. 중앙의 진골귀족세력은 바야흐로 그 최대의 전성을 누리고 있었으나, 김헌창의 난에서 보았듯이 귀족 상호간의 사회 연대성은 여지없이 파괴되어 그 자체 심한 분열의 낌새를 드러냈다. 한편 지방 호족세력이 성장하여 차츰 割據的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집권체제는 약화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중앙귀족과 지방 세력가들의 농장 경영이 발달함에 따라 自營小農民은 광범하게 몰락했다. 그리하여 진골귀족세력의 연대성을 회복하고 律令체제를 강화하는 일이 흥덕왕의 정치적 과제가 되었다.025)李基東,<新羅 興德王代의 政治와 社會>(≪國史館論叢≫21, 國史編纂委員會, 1991), 97∼131쪽.

 흥덕왕 정권은 어떤 의미에서는 국왕과 동생인 상대등 金忠恭의 兩頭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흥덕왕은 즉위할 당시 이미 50세의 고령이었고 건강 또한 그리 좋지 않았다. 더욱이 즉위한 지 2개월만에 왕비를 잃고 상심한 나머지 再娶까지 단념한 왕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자식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고독한 나날을 보내야 했던 왕이 믿고 政事를 의논할 상대는 동생인 충공밖에는 달리 없었다. 충공은 헌덕왕 14년(822) 정월 상대등에 오른 뒤 政事堂에서 직접 정무를 총괄해 왔고, 흥덕왕이 즉위한 뒤에도 이례적으로 유임되었다. 그는 흥덕왕과는 대조적으로 아들 金明 외에 여러 명의 딸이 근친왕족들과 혼인하여 가족적으로도 매우 번성했다. 딸 중의 하나인 貞嬌는 헌덕왕의 太子妃가 되었고, 다른 딸은 憲貞의 아들 悌隆과 혼인했으며 또 다른 딸은 均貞의 후처가 되어 誼靖(憲安王)을 낳았다.

 하대에 들어오면서 근친왕족들이 국가의 樞要의 직을 독점한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이는 왕실가족의 분열을 막는 동시에 일반 진골귀족세력을 견제하는데 효과적이었다. 흥덕왕은 근친왕족 우대의 관례에 따라 숙부인 禮英의 자손들을 요직에 등용했다. 왕의 사촌형제 가운데 헌정은 이미 오래 전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은 듯한데, 다만 균정만은 아직 건재했다. 균정은 헌덕왕의 처남으로 일찍부터 조정에서 중시되었다. 그는 헌덕왕 4년(812) 봄에 侍中이 되었다가 동왕 6년 8월 김헌창과 교체할 때까지 재임했다. 그 뒤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3군으로 편성된 진압부대의 主將으로 활약했다. 또한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전처가 죽은 뒤 충공의 딸과 재혼하기까지 했다. 이같은 특수한 인연으로 그는 결국 흥덕왕 10년(835) 2월 병으로 죽은 충공의 뒤를 이어 상대등이 될 수 있었다. 한편 균정의 전처 소생인 우징도 김헌창의 반란 때 부친과 함께 나란히 진압군 사령관의 일원으로 출동할 만큼 이미 성장해 있었다. 그는 흥덕왕 3년 정월 대아찬의 관등으로 집사부시중이 되었다가(재임 중인 829년 執事省으로 개명됨) 동왕 6년 정월 지진이 발생한 뒤 일단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동왕 9년 정월에 다시 시중에 취임했다. 이는 신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다만 그는 1년 뒤 부친이 상대등이 되자 물러났다. 그의 후임 시중이 바로 19세의 金明이었다. 그러니까 흥덕왕은 사촌동생인 균정을 상대등에 기용함과 동시에 시중에는 조카인 김명을 임명하여 仁謙太子系와 禮英系의 세력균형을 꾀한 듯하다.

 근친왕족뿐 아니라 유서깊은 태종무열왕계의 후손, 그 중에서도 특히 하대의 개창에 적극 협력한 김주원 일가에 대한 정치적 배려가 또한 요망되었다. 비록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敗死하고 말았으나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김종기 집안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계에 등장시켜 화합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김종기의 두 아들 장여와 貞茹는 이미 시중 등 요직을 역임하고 은퇴한 뒤였다. 그리하여 그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발탁되었다. 정여의 아들 金陽(808∼857)은 흥덕왕 3년 固城郡太守로 출발하여 흥덕왕 재위 10년 기간 중에 中原小京大尹·武州도독에까지 올랐으며, 璋如의 아들 金昕(803∼849)은 헌덕왕 14년 당에 사신 겸 宿衛學生으로 다녀온 뒤 南原태수를 거쳐 康州 도독에까지 승진했다.

 흥덕왕은 또한 金庾信 집안의 후예들에 대해서도 어떤 정치적 배려를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김유신을 興武大王으로 追封한 시기에 대해서는 異說도 있으나 역시 흥덕왕 때로 봄이 옳을 듯하다. 당시는 김헌창의 난을 겪은 지 얼마 안되는 때였고, 한편 서해상의 항해의 안전을 위해서 변경 해안지대에 軍鎭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집중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던 때였다. 더욱이 흥덕왕 때에도 예외없이 가뭄과 기근이 잇따라 발생하여 국내 치안이 위협받고 있었다. 이같은 형편이었으므로 朝野에 군사적 기풍을 진작시킬 필요가 있었고, 나아가 爲國盡忠의 모범으로써 선전하는 데 김유신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당시 될 수 있는 한 근친왕족 이외에 일정한 범위 안에서 전통적인 가문 출신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려고 애쓰고 있던 정치적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김유신에 대한 대왕 추봉조치는 그 집안 사람들에 대한 일종 우대책의 일환으로 볼 여지가 많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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