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2. 귀족사회의 분열과 왕위쟁탈전
  • 4)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계승쟁탈전

4)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계승쟁탈전

 김헌창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귀족사회의 분열 현상을 극복, 이를 再縫合하려는 흥덕왕의 범진골 귀족세력 화합책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다만 흥덕왕 10년(835) 2월 왕위계승의 제1후보자였던 상대등 충공의 돌연한 죽음은 근친왕족 간의 세력균형에 적신호가 되었다. 왕은 후임 상대등에 사촌동생인 균정을 임명했다. 당시 소생이 없는 왕의 처지에서 보면 상대등 임명은 곧 후계자 지명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왕은 후임 상대 등으로 될 수 있으면 인겸태자 계통에서, 즉 자신의 조카들 가운데서 지명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흥덕왕 10년 당시 그의 조카로는 충공의 아들인 대아찬 김명밖에는 없었다. 다만 김명은 당시 19세로026)金明(민애왕)은 桐華寺 毘盧庵 3층석탑에서 발견된 舍利壺의 銘文에 의하면 839년 정월 23일 23세로 죽은 사실이 보여 835년 현재 19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친의 자리를 승계하기에는 연령과 정치적 관록이 크게 부족했다. 따라서 왕으로서는 비록 예영 계통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 시중 경력과 軍功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또한 조카사위이기도 한 균정 외에 달리 상대등 후보자를 찾을 수 없었다. 왕은 이처럼 상대등직을 균정에게 양보함과 동시에 김명을 시중에 임명하여 예영 계통에 대한 일종 견제를 꾀했다.

 그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흥덕왕은 재위 11년(836) 12월에 60세로 죽었다. 왕은 먼저 죽은 왕비와 합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을 뿐 후계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이러한 경우 상대등직에 있는 균정이 즉위하는 것이 순리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균정 자신도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주변에는 강력한 지지세력도 확보해 놓고 있었다. 즉 시중을 역임한 아들 우징을 비롯하여 妹婿인 禮徵 그리고 무주도독을 역임한 김주원계의 金陽 등이 그를 옹립했다.

 그러나 시중직에 있던 김명이 균정의 즉위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그는 아찬 利弘, 裴萱伯 등을 자파로 끌어들여 균정의 조카이며 동시에 자신의 妹夫이기도 한 悌隆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 제륭의 경력은 알 수가 없는데, 다만 그의 아버지인 헌정은 애장왕 10년(809) 왕을 시해할 때 시중의 직에 있었고 헌덕왕초에는 國相·兵部令兼修城府令의 요직에 있었다. 헌정은 헌덕왕 11년 정월에 신병으로 보행조차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뒤 멀지않아 죽은 듯하다. 따라서 제륭은 흥덕왕 11년 당시에는 이미 독립된 家를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균정과 제륭을 옹립하려는 두 파의 대립은 闕內에서의 무력대결로까지 발전했다. 균정은 지지자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아 積板宮에 들어가 族兵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그러자 제륭을 추대하는 김명·이홍 등이 군대를 끌고 와서 궁을 포위했다. 김명 일파의 병력이 숫적으로 우세했다. 결국 이 流血劇에서 균정이 살해되는 비운을 맞았다. 김양은 배훤백이 쏜 화살에 다리를 맞아 쩔뚝거리며 포위망을 뚫고 피신했다. 이에 왕위계승쟁탈전은 제륭 일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제륭은 즉위하여 僖康王이 되었다. 그는 즉위와 동시에 시중 김명을 상대등에, 아찬 이홍을 시중에 각각 임명했다. 하지만 정치적 실권은 김명이 장악했다. 결국 동왕 3년(838) 정월 김명과 이홍은 쿠데타를 일으켜 희강왕을 몰아냈다. 찬탈자들이 군대를 일으켜 왕의 측근에 있던 자들을 죽이자, 왕은 무사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스스로 궁중에서 목매어 자살했다. 이에 22세의 김명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그가 곧 閔哀王이었다.

 민애왕 정권은 꼭 1년간 존속했다. 그 동안 왕의 적대세력은 淸海鎭(莞島)에 속속 집결했다. 흥덕왕 3년(828) 4월 장보고의 건의를 받아들여 청해진의 설치를 허가할 당시 우징은 집사부 시중직에 있었으므로, 청해진과는 특수한 인연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희강왕 2년(837) 5월에 우징이 가족과 殘兵을 거느리고 청해진에 가서 大使 張保皐(일명 弓福)에게 의지하자 6월에 예징·良順 등이 도망하여 우징과 합류했고, 민애왕 원년(838) 2월에는 김양이 군사를 모집하여 역시 청해진으로 들어가 거사 모의에 참여했다. 한편 고려시대의 승려 天因이 쓴<天冠山記>027)徐居正,≪東文選≫권 68.에 의하면, 이 때 화엄종 승려인 洪震은 평소 알고 지내던 우징이 완도에 피신하자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長興 天冠寺에서 華嚴神衆의 威力을 빌어 우징을 도왔다고 한다. 민애왕의 찬탈 소식은 장보고의 궐기를 촉구하는데 절호의 명분을 제공했다. 우징은 민애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일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는 임금을 죽인 역적이라고 장보고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마침내 장보고는 우징을 도와 민애왕 정권을 타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군사 5천 명을 오랜 친구인 鄭年에게 주어 우징 일파의 擧兵에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우징 일파의 叛軍은 김양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궐기했다. 그는 민애왕 원년 12월 平東장군이 되어 정년을 비롯한 閻長·張弁·駱金·張建榮·李順行 등 여섯 장수와 함께 출동했다. 이 때 金亮詢(良順)이 武州 군대를 이끌고 來會했다. 반란군이 무주 鐵冶縣(羅州郡 南平面)에 다다르자 조정은 州의 大監 金敏周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했다. 낙금과 이순행은 기병 3천으로 돌격을 감행하여 정부군을 거의 섬멸했다. 반군은 경주를 향해 신속하게 이동했다. 해가 바뀌어 민애왕 2년 윤정월 19일에 반군은 達伐(대구)에 이르렀다. 왕은 이찬 大昕, 대아찬 允璘·嶷勛 등을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막게 했다. 그러나 정부군은 반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정부군은 一戰에 참패하여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 때 왕은 경주 서쪽 교외에 있다가 주위의 신하들이 모조리 달아나자 홀로 月遊宅으로 피신했다. 이 달 23일 민애왕은 반란군 병사에 의해 피살되었다. 우징은 반란군에 추대되어 왕으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神武王이었다.

 신무왕은 일찍이 헌덕왕 14년(822) 김헌창의 반란 때 왕군의 군사령관으로 진압에 공을 세웠고, 그 뒤 두 차례나 시중을 역임하는 등 정치·군사상의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부친 균정이 왕위계승쟁탈전에 敗死한 뒤에는 新興 청해진의 군사력에 착안, 이를 이용하여 왕위계승쟁탈전에 재도전하는 등 그의 정치적 식견은 결코 凡常하지 않았다. 또한 격전 끝에 민애왕을 타도한 승리자로서 그가 敗者側에 대하여 취한 아량과 관대한 조치는 그의 王者로서의 자질을 잘 보여준다. 그는 피살된 故王을 禮로써 장사지냈으며 또한 달벌전투에서 민애왕의 10만 군을 지휘한 바 있는 敗將 이찬 대흔, 대아찬 嶷勛 등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은퇴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028)大昕은 김양의 從兄인 金昕(字는 泰)과 이름이 같고 또한 839년 정월 당시의 김흔의 직책 내지 임무와도 일치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대흔이 849년 9월 반란을 꾀하다가 伏誅된 반면 김흔은 小白山에서 승려들과 놀다가 847년 8월 27일 山齋에서 병으로 죽은 점이다. 또한 대아찬 嶷勛은 智證大師 道憲(824∼882)이 17세 되던 해(840)에 그를 僧籍에 넣어 준 韓粲(대아찬) 金嶷勳과 관등과 인명이 같아 동일인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그 역시 김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산중에서의 은퇴생활이 허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李基東, 앞의 책, 167∼168쪽). 이처럼 신무왕은 그 뛰어난 정치적 재간으로 큰 기대를 모았으나 재위 반년 만인 이 해 7월 23일 죽고 말아 경륜을 펴 볼 수가 없었다. 이에 태자이던 慶膺이 즉위하니 곧 文聖王이었다.

 문성왕대초에는 父王 옹립의 최대 공신인 장보고와의 사이에 納妃 문제, 노예무역 문제를 둘러싸고 차츰 마찰이 생기기 시작하여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다만 조정이 機先을 제압하여 동왕 3년(841) 혹은 8년에 염장으로 하여금 장보고를 암살하게 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위기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로써 왕실은 일단 안정을 찾게 되었으나, 동왕 9년 5월에는 신무왕 옹립에 큰 공을 세운 전 시중 김양순이 파진찬 興宗 등과 더불어 반란을 꾀하다가 伏誅된 일이 있고, 다시 동왕 11년 9월에는 이찬 金式이 대흔 등과 더불어 역시 반란을 꾀하다가 복주되는 등 왕위계승쟁탈전의 후유증은 완전히 청산된 것이 아니었다. 문성왕 17년(855) 4월 근친왕족들이 주동이 되어 경주 남산 昌林寺에 無垢淨塔을 건립한 것도 당시 잇따른 내란과 재난 속에서 국가의 安泰를 빌기 위한 염원에서였다.

 문성왕은 재위 19년 9월 숙부인 상대등 誼靖(義正·義琮·祐靖 등으로 표기됨)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 이에 의정이 즉위하니 곧 憲安王이었다. 그는 신무왕의 異母弟로 어머니는 충공의 딸이었다. 그는 흥덕왕 11년(836) 정월에 唐에 謝恩使 겸 宿衛로 파견된 바 있으며, 문성왕이 즉위한 직후에 시중을 역임하고, 동왕 11년(849) 정월에는 상대등에 취임하여 즉위 당시까지 재임했다.029)헌안왕의 경력에 대한 고증은 李基東, 위의 책, 169∼171쪽 참조.

 문성왕·헌안왕 양대에는 장래에 대하여 밝은 전망을 내릴 수 있는 사실도 있었다. 그것은 지난날 왕위계승쟁탈전에서 서로 무기를 들고 싸웠던 헌정·균정 양계가 타협점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문성왕의 여동생과 희강왕의 아들 啓明이 혼인했다. 계명은 문성왕 10년에 김양의 뒤를 이어 집사성시중이 되었고, 그 아들 膺廉은 헌안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바로 景文王이었다.

 이처럼 경문왕의 즉위로 왕통은 균정계에서 헌정계로 넘어갔는데, 이는 균정계 진골귀족의 입장에서 볼 때 큰 불만이었던 듯싶다. 경문왕대에 세 차례나 일어난 왕족들의 반란 음모는 어쩌면 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동왕 6년(866) 정월에 왕자 晸을 태자로 책봉한 뒤 이 해 10월 이찬 允興이 동생들인 叔興·季興과 더불어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일족이 주살되었고, 8년 정월에는 이찬 金銳·金鉉 등이 역시 역모를 꾀하다가 주살되었다. 그런데 김예는 문성왕의 從弟로서 동왕 17년 昌林寺에 無垢淨塔을 건립할 당시 熊州 祁梁縣(牙山郡 新昌面) 현령이었다. 또한 경문왕 14년 5월 이찬 近宗이 역모를 꾀해 궁궐을 범하자 왕은 禁軍을 동원하여 이를 격파했는데, 그 역시 근친왕족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李基東>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