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3. 정치개혁의 실패
  • 1) 율령의 개정을 통한 집권체제의 정비 시도

1) 율령의 개정을 통한 집권체제의 정비 시도

 신라는 법흥왕 7년(520)에 중국 律令을 도입 수용하기 시작한 이래 기존의 族制的인 사회조직과 마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국가체제를 확립해 갔다. 말하자면 그것은 처음부터 제한적이고도 타협적인 율령제 수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율령을 수용할 당시인 中古시대의 왕권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데에 그 근본원인이 있었다. 한편 골품제도는 이 율령의 보장을 받음으로 해서 신라사회 전체 속으로 차츰 조직화·체제화하는 방향으로 전개 확산되어 갔다. 실로 골품체제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 裏面에는 이처럼 율령제도의 뒷받침이 있었던 것이다.030)李基東,<新羅의 骨品制度와 日本의 氏姓制度>(≪歷史學報≫94·95, 1982), 138∼139쪽.

 그런데 삼국통일 후 율령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왕권강화를 꾀하려던 야심적인 군주들에게 있어서 진골귀족의 절대적인 우월성을 법적으로 보장한 골품제도는 개혁정치의 질곡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덕왕이 필사적으로 추구한 漢化政策이란 필경 이 골품제도를 어떤 형태로건 간에 극복하여 율령제를 그 본래의 정신대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간 율령제도의 뒷받침을 받아 이미 강고한 토대를 구축한 골품체제의 장벽에 부딪쳐 끝내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031)李基東,<新羅 中代의 官僚制와 骨品制>(≪震檀學報≫50, 1980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28∼141쪽).

 시대가 바뀌어 중대가 끝나고 하대가 개막되었다. 하대는 비록 태종무열왕계로부터 소외당한 범진골귀족 연합세력에 의해서 개창되었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유교사상에 토대를 둔 율령체제 강화라는 중대의 정치적 지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원성왕이 동왕 4년(788) 讀書三品科를 제정하여 國學 출신자의 진출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라든지, 소성왕이 동왕 원년 국학에 祿邑을 지급한 것 등은 그 현저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애장왕 6년(805) 8월에 조정은 公式 20여 조를 개정 반포했다.≪三國史記≫권 38, 職官志 上에는 그 내용의 일부가 실려있는데, 이에 의하면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位和府를 비롯한 四天王寺成典 이하 모든 성전의 장·차관 직명이 衿荷臣·上堂과 같은 신라 고유의 이름으로부터 중국식의 令·卿으로 개칭되었다. 이와 동시에 例作府·船府·賞賜署 등 여러 관청의 大舍 이하 史 등 하급 관직에 대한 일부 감원조치가 단행되었다. 이 공식 개정이 단행될 당시의 집사부시중이 김수종으로, 뒤에 흥덕왕이 되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흥덕왕은 김헌창의 난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진골귀족사회의 분열 현상을 극복하고자 그 화합책을 모색했다. 왕은 이에서 그치지 않고 하대에 들어와 느슨해진 신분체제 및 집권체제를 정비·강화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정치를 꾀했다. 왕의 개혁의지는 무엇보다도 동왕 9년(834)에 반포된 敎書 내용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는데, 安康에 있는 왕릉비의 斷石 명문에도 ‘格式是皆’라는 구절이 보여 흥덕왕 때 格式의 편찬 내지 수정작업이 진행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흥덕왕 때의 官制개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동왕 4년 종래의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개칭한 점이다. 이는 그 명칭으로 미루어 볼 때 당의 三省制를 모방한 조치로 일단 이해된다. 다만 명칭을 고친 배경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어떤 연구자는 시중직 자체의 변질이 집사부의 성격을 변하게 한 결과 部를 폐지, 집사성으로 승격시킨 것으로 보았다. 즉 하대에 들어오면서 선덕왕을 비롯한 여러 왕이 시중을 역임했고, 9명의 상대등이 시중을 지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시중→상대등→국왕으로의 승진의 길이 열리게 되어 집사부의 정치권력이 강화된 결과 이를 집사성으로 고쳐 다른 상급관청을 지배하는 당의 尙書省과 비슷한 기능을 갖는 위치로 승격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견해이다.032)井上秀雄,<三國史記にあらわれた新羅の中央行政官制について>(≪朝鮮學報≫51, 1969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262∼263쪽). 그러나 이와는 달리 집사부는 당의 門下省의 기능과 비슷하며 그 장관인 시중은 문자 그대로 門下侍中과 비교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즉 이에 의하면 원성왕 5년(789) 9월 집사부의 하급관리가 현령 인사에 대하여 論駁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집사부의 기능은 문하성과 비교될 수 있다고 한다.033)木村誠,<統一新羅の官僚制>(≪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6, 學生社, 1981), 144∼145·156·162쪽. 李丙燾는 비록 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집사부가 중국의 門下省과 같은 행정기관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三國史記≫國譯篇, 乙酉文化社, 1977, 575쪽, 주 2 참조).

 집사부와 그 후신인 집사성이 당의 3성 가운데 과연 어느 관청과 비슷한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이다. 다만 경덕왕 18년(759) 신라의 대부분의 관청 이름을 唐風으로 고칠 때도 의연히 종래의 명칭을 고수한 바 있는 집사부가 흥덕왕 때 이르러 중국식으로 개칭된 것은 매우 흥미있는 점이다. 이는 이 때에 이르러 신라조정이 중국식의 國制(statecraft)를 단순히 모방하려 한 때문이라기 보다는 뭔가 당시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한 데서 취해진 조치일 것으로 생각된다. 다 아는 것처럼 경덕왕 때 관청 이름과 관직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친 것은 同王代의 한화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곧 경덕왕의 개혁정치의 핵심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흥덕왕 때의 집사성으로의 개명도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흥덕왕의 개혁정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동왕 9년(834)에 반포된 교서의 내용이다. 교서의 첫머리에 “사람은 上下가 있고, 지위는 尊卑가 있으며 명칭과 法式은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르다. 그런데 지금 풍속이 점점 각박해지고 백성들은 다투어 사치·호화를 일삼고 다만 外來品의 珍奇한 것만을숭상하고 도리어 토산품의 야비한 것을 싫어하니, 예절이 참람해지는 데 빠지고 풍속이 파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舊章에 따라 嚴命을 베푸는 바이니, 그래도 만일 고의로 범하는 자가 있으면 國法을 시행할 것이다”로 되어 있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삼국사기≫권 33, 잡지 2, 色服·車騎·器用·屋舍조에 상세히 보인다. 당시는 소위 金入宅의 전성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골품제의 사회적 규범이 해이해지고 특히 귀족층의 사치풍조가 만연했을 때이므로 이 교서는 지배층의 紀綱을 바로잡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교서는 풍속관계 규정 이상의 보다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고 생각된다. 즉 교서에 보이는 진골 이하 六頭品·五頭品·四頭品·平人·百姓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신분등급별 풍속관계 규정 속에는 이에 구속되지 않는 특정한 집단의 존재가 느껴지는데, 이는 바로 국왕을 정점으로 한 왕실가족인 듯하다. 그러므로 흥덕왕이 이같은 교서를 내린 정치적 의도는 풍속의 정치적 규제, 골품제의 사회적 기초를 구성하고 있는 同族집단에 대한 정치적 재평가, 지방에 거주하는 여러 집단에 대한 정치적 재편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중국 황제의 지위에 대응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국왕의 創出에 있었다고 해석할 여지가 많다.034)武田幸男,<新羅骨品制の再檢討>(≪東洋文化硏究所紀要≫67, 東京大, 1975), 116∼136·207∼210쪽.

 그렇다면 이같은 흥덕왕의 개혁정책이 과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당시 흥덕왕이 성취해야 할 최대의 정치적 과제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진골귀족의 連帶性을 회복하는 일과 집권체제의 정비를 통한 왕권의 강화였다. 그런데 앞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골귀족의 절대적優位를 보장해야 했으며, 후자의 목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율령체제를 공고하게 다질 필요가 있었다. 특히 율령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신라 고유의 색채를 짙게 띠고 있는 관료기구에 대한 개혁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그 신라적 특질의 張本이 다름아닌 골품체제였다. 요컨대 흥덕왕이 동시에 추구한 정치적 목표인 율령체제 강화와 골품체제 확립의 노력은 그 자체 양립할 수 없는 相剋的인 대립물이었다. 바로 이것이 흥덕왕이 직면한 정치적 딜레마였던 것이다.035)李基東,<新羅 興德王代의 政治와 社會>(≪國史館論叢≫21, 國史編纂委員會, 1991), 126쪽.

 생각해 보면 흥덕왕의 개혁은 自營小農民의 보호라고 하는 이 시대의 가장 긴요한 정치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거의 힘이 미치지 못했다. 또한 권력구조의 결함을 바로잡는 데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하대에 들어와 관례화되다시피 한 근친왕족 중심의 권력구조는 타파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진골귀족세력의 대화합을 모색하는 가운데 추진된 율령체제 강화의 노력은 그 자체 진골귀족의 정치적·경제적인 양보 없이는 달성될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흥덕왕이 비록 교서를 내려 진골귀족들에 대해 法度에 맞는 생활규범을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러한 규범을 강제할 수 없는 한 개혁조치는 필경 위선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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