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3. 정치개혁의 실패
  • 2)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합체화에 의한 권력집중 시도

2)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합체화에 의한 권력집중 시도

 흥덕왕 9년(834)의 교서에서 볼 수 있듯이 왕은 節儉을 숭상하고 勤政과 개혁에 남다른 열의를 갖고 있었으나, 재위 11년 12월에 그가 죽자마자 곧바로 근친왕족들 사이에서 왕위계승쟁탈전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2년여의 짧은 기간 중에 두 명의 왕과 한 명의 왕위계승권자가 희생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흥덕왕의 범진골귀족 화합책은 다만 왕실과 진골귀족 사이의 현존하는 긴장을 억제하는 현상유지적 측면이 강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긴장 자체를 해소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이는 결국 개혁정치의 기초가 허약했음을 폭로하는 것에 다름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신라국가를 위해 불행했던 것은 왕위계승쟁탈전으로 말미암아 흥덕왕이 줄곧 추구한 정치개혁의 노력이 끝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된 점이다.

 신라는 그 뒤 문성왕 때 안정을 되찾아 소강상태에 들어갔는데, 이 때를 경계로 하여 관제개혁을 통한 집권체제 강화작업이 다시금 시도되었다. 그것은 특히 화랑 출신으로 유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교양을 갖춘 경문왕이 즉위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경문왕은 15세 때 화랑자격으로 臨海殿에서 열린 궁중연회에 참석하여 아들이 없는 헌안왕의 下問에 현명하게 답변함으로써 왕의 마음을 끌게 되고, 이것이 기연이 되어 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화랑으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닐 때 목격한 것이라고 헌안왕에게 답한 세 가지 美行이란 필경 유학에 대한 지식을 갖고 둘러댄 것이다.036)李基東,<新羅 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歷史學報≫85, 1980 ; 李基東, 앞의 책, 172쪽). 한편 김응렴이 말한 세 가지 美行을 讓·儉·恭의 세 가지 德目으로 간주하고 이는 전적으로 孔孟思想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논단한 글도 있다(高明士,≪唐代東亞敎育圈的形成≫, 臺灣國立編譯館, 1984, 308∼309쪽 참조). 이와 관련하여 신라 말기에 진골귀족들 사이에서 유교경전의 지식을 갖고 作名하는 일까지 유행했음을 想起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崔致遠이 지은<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文>에는 원성왕의 昆孫으로 헌강왕 때 建功鄕令직에 있었던 金立言의 존재가 보이는데, 그이 이름은≪左傳≫襄公 24년조에 나오는 죽어도 不朽한 세 가지 사항, 즉 立德·立功·立言의 입언에서 취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왕실가족들이 불교식 이름을 쓰던 중고시대와는 판이한 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경문왕은 즉위 후 동왕 3년(863) 2월 국학에 巡幸하여 박사 이하의 교수관으로 하여금 經義를 講論케 한 다음 각자에게 물품을 하사한 일이 있었는데, 이로써 왕의 유학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뒤에 그의 아들인 헌강왕도 동왕 5년(879) 2월 국학에 순행한 일이 있다. 어쩌면 이는 父王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고로≪삼국사기≫신라본기에 보이는 국왕의 국학 순행 기사를 보면 혜공왕 때의 2회와 경문왕·헌강왕 父子의 그것이 전부이다.

 그런데≪삼국사기≫신라본기와 職官志는 흥덕왕 때 이후의 관제개혁에 대해서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9세기 후반경의 金石文 자료에는 이 사실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즉 경덕왕 18년(759)에 漢式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776) 정월에 복구된 바 있던 관청 및 관직 명칭이 대체로 850년대에 이르면 경덕왕 때 고친 이름으로 다시금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관청 이름에 있어서는 穢宮典이 珍閣省으로, 領客府가 司賓府로, 內省이 殿中省으로, 司正府가 肅正臺로 나타나고 있으며, 관직명의 경우 가장 독자적인 명칭을 고집하고 있던 兵部의 차관직인 大監이 侍郞으로, 大舍가 郞中으로, 弩舍知가 司兵으로 나타난다. 또한 倉部의 경우에도 차관직인 卿이 시랑으로, 대사가 낭중으로, 租舍知가 員外郞으로 나타난다. 한편 8세기말에 설치된 浿江鎭典의 경우 장관직명인 頭上大監이 9세기말경의 여러 금석문에 예외없이 중국식 명칭인 都護로 되어 있다.

 이 9세기 후반의 관청 및 관직 명칭에 대한 漢式개명이 내포하는 정치적 의의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때의 제1차 한식개명과 같은 차원에서 파악될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경덕왕 때의 官號개혁이 태종무열왕 이래의 전제주의적 경향의 집중적인 표현이었다면, 그보다 대략 1백년 뒤인 9세기 중엽에 점진적으로 단행된 제2차 관호개혁은 제1차 개혁 때와 똑같은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희강왕 원년(836)부터 민애왕 2년(839)에 걸쳐 격렬한 왕위계승쟁탈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국왕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으므로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경덕왕이 시도한 것과 마찬가지로 관호의 한식개명에 집착한 듯하다.

 당시 추진된 관호개혁에서 주목되는 것은 다름아닌 洗宅과 같은 근시기관의 기능강화 현상이다.037)李基東,<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中世的 側近政治의 志向―>(≪歷史學報≫77, 1978 ; 앞의 책, 233∼241쪽). 1975년 경주 안압지 발굴 때 나온 50여 점의 경덕왕 때 木簡 가운데 보이는 유일한 관청이 세택이었는데, 이는 경덕왕 18년(759) 百官의 칭호를 한식으로 고칠 때 中事省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그 뒤 혜공왕 12년(776)에 종전의 세택으로 복구되었다.<昌林寺無垢淨塔願記>에 의하면 문성왕 17년(855) 당시까지는 세택이란 명칭이 사용되었는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를 보면 경문왕 12년(872) 11월 25일 이전에 이미 세택이 중사성으로 다시금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래 신라의 멸망에 이를 때까지 중사성의 명칭은 변함없이 사용되었다.

 중사성은 국왕 직속의 그것과 東宮 직속의 그것이 각각 따로 존재했는데, 여기에는 中使들인 舍人 혹은 中舍人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 사인을 신라 사람들은 內養이라고도 불렀는데 국왕이나 태자에 대한 侍從이 그 본래의 임무였던 듯하다. 하지만 9세기 후반경에는 사인이 文翰기관인 崇文臺의 郞과 같은 學士職을 띠고 있어 단순한 시종 임무보다는 오히려 詔誥를 작성한다거나 혹은 태자에게 유학을 강의하는 비서관 내지 文翰官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아닐까고 짐작된다.

 그런데 이 시기 중사성과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던 또 하나의 관청이 주목된다. 즉 宣敎省이 바로 그것이다.038)李基東, 위의 책, 241쪽. 이 관청은 중사성과는 달리≪삼국사기≫직관지에는 실려 있지 않고 다만 9세기 후반의 금석문에만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9세기에 들어와 신설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시기는 늦어도 헌안왕 4년(860) 이전이 분명하다. 이 선교성이 등장하는 금석문의 내용을 보면, 이 관청은 국왕의 명령을 받아 迦智山寺를 직접 관장한다거나 혹은 智證大師 道憲과 같은 선종 계통의 승려를 본래의 山寺로 호송한다거나 하는 등의 특수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 점 선교성은 중사성과 마찬가지로 국왕 직속의 관청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어쩌면 선교성은 그 명칭으로 미루어 볼 때 발해의 宣詔省에 상당하는 것이 아닐까고 생각되는데, 만약 그렇다면 국왕의 교서를 작성 선포하는 관청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중사성의 기능강화라든가 선교성의 신설은 근본적으로 집사부의 변질에 연유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집사부는 진덕여왕 5년(651) 국왕 직속의 관청으로 설치되어 그 뒤 중대 전제왕권의 전성기에 왕권의 안전판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집사부를 거점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의 성장을 초래하여 이윽고 중대 말기에 이르면 왕권에 제약을 가하는 요소로까지 발전했다.039)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震檀學報≫25·26·27, 196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167∼170쪽). 그리하여 상대등과 집사부 장관인 시중은 같은 성격의 상하 관직으로 변모해 버리고 말았다.040)李基白,<新羅 下代의 執事省>(위의 책), 182∼185쪽. 경문왕 2년(862) 정월에 시중이 된 魏珍은 동왕 14년 정월 현직에서 곧바로 상대등직에 승진되기까지 했다.

 이처럼 집사성이 창설 당시의 취지대로 왕명을 직접 받드는 행정기관의 성격에서 변질되자 국왕 직속의 새로운 관청이 필요해졌다. 왕권 회복기에 해당하는 9세기 중엽에 있어서 그 필요성은 더욱 절실한 형편이었다. 그 결과 종래 국왕의 단순한 시종기관에 불과했던 세택을 다시금 중사성으로 개명하고 이에 국왕 비서실의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일종 內朝를 형성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맡도록 했다고 짐작된다. 소위 내조의 領袖는 국왕 자신으로, 국왕은 중사성을 통해 측근의 세력집단을 형성하고 이제는 外廷이 된 집사성의 실권을 차츰 여기에 흡수해 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중사성과 같은 근시기구가 대두하고 있을 무렵 문한기구들이 승격 내지 확장된 사실은 주목되는 현상이다.041)李基東, 앞의 책, 247∼256쪽. 신라 문한기관의 기원을 살펴보면 본디 당에 대한 事大外交의 문서를 담당한 詳文司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소속된 詳文師는 성덕왕 13년(714) 2월 通文博士로 개칭되었는데042)그 외교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濱田耕策,<新羅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通文博士と倭典をめぐって―>(≪旗田巍古稀記念 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9, 221∼222쪽) 참조., 이는 그 뒤 경덕왕 때 百官의 명칭을 漢式으로 고칠 때 翰林郞으로 바뀌었다. 이 때 상문사가 翰林臺로 개칭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혜공왕 7년(771) 12월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 명문을 보면, 당시 한림대는 唐制를 모방한 실로 정연한 관청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여기에는 한림랑과 待詔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본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데는 한문과 유학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었는데, 이는 진골귀족 출신보다는 오히려 6두품 귀족들의 기호에 맞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强首나 薛聰 이래 6두품 출신들은 유학에 근거하여 그 학문적인 식견을 갖고 정치적 진출을 꾀했다.

 그런데 9세기 후반의 금석문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한림대는 880년경을 전후한 시기에 瑞書院으로 개명되고 동시에 한림랑 대신에 學士 및 直學士제도가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역시 같은 시기에 崇文臺가 崇文館으로, 그 소속 관원인 郞이 직학사로 바뀌었다. 특히 崔致遠·朴仁範 등 대표적인 중국 유학생들이 서서원 학사직에 등용되고 있는 점에서 이 서서원이 당시 문한기구의 중심적 존재였음은 의심할 바 없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이 문한기구가 근시기구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사실상 合体化된 단일기관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문왕 때 명필로 활약한 姚克一이 숭문대랑에 春宮中事省의 中舍人직을 兼帶한 것이라든지 金薳이 숭문관 직학사직에 병부랑중을 겸한 사실, 그리고 최치원이 侍讀 겸 翰林學士에 兵部侍郞과 知瑞書監事를 겸직한 것 등은 그 뚜렷한 예증이라 할 수 있다.

 9세기 중엽 이후 근시기구를 확장하면서 내조의 강화에 집착해 있던 국왕들은 진골귀족세력의 포위망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런데 이는 바로 6두품 출신의 정치적 입장과 합치되는 점이었다. 그들은 진골귀족 萬能의 골품체제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결탁해야 할 대상은 국왕 밖에는 달리 없었다. 한편 국왕의 입장에서 볼 때 6두품 출신 유학자들이 주장하는 유교정치이념은 왕권강화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바로 여기서 6두품 출신 유학자를 주축으로 한 문한기관이 확장되어 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경문왕과 그 아들 憲康王은 유학 내지 문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는 필경 유학지식을 갖춘 사람들과의 긴밀한 접촉에 연유하는 것이었다. 최치원이 지은 崇福寺 비문에 의하면 경문왕 5년(865) 4월에 당의 懿宗이 보낸 사신 胡歸厚를 응대하는 자리에서 왕이 도성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어 사신을 크게 당황하게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의 후계자인 헌강왕은 尙州 深妙寺 비문을 짓는다거나 혹은 月池宮에서 智證大師 道憲과 어려운 禪問答을 하는 등 일류 교양인이요 문인이었다. 헌강왕이 9년(883) 2월 三郞寺에 거둥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각각 詩 1首씩을 짓게 한 것도 그의 문인 기질을 잘 보여준다. 이는 태자 시절 학사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국왕을 영수로 한 내조의 강화는 진골귀족의 연대성을 파괴할 뿐이었고, 또한 문인 취향의 나약해진 국왕의 개성으로서는 차츰 농도가 짙어가는 위기 국면에 적극 대처할 수 없었다.

<李基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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