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4. 골품제도의 퇴화
  • 1) 골품제의 사회적 기반의 축소

1) 골품제의 사회적 기반의 축소

 주지하듯 골품제는 개인의 혈통의 尊卑에 따라서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크기, 의복의 빛깔이나 심지어는 牛馬車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서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지는 제도였다. 신라가 연맹왕국의 틀을 깨고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형성할 무렵인 6세기초, 王京에 거주하는 6部人을 지배체제 속에 편제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때 이들 신분의 등급을 정하기 위한 평가의 기준이 된 것이 혈연적·族的인 기반이었다. 이렇게 왕경 지배자공동체의 배타적인 신분제로 출발한 골품제도는 法興王 7년(520)에 律令을 반포할 때 법제화된 이래 삼국통일을 거쳐 신라의 멸망에 이를 때까지 변함없이 정치와 사회를 규제하는 大本으로서 기능했다.

 처음 골품제도는 聖骨과 眞骨이라는 2개의 骨과 六頭品으로부터 一頭品에 이르는 6개의 두품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개의 신분 계층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국통일 직전에 성골이 소멸하여 결국 진골과 6개의 두품만이 남게 되었다. 골품제도는 비록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하여 특권을 부여한 신분제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지방세력자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골품제의 정치적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관등을 조정하는 일이었는데, 지방사회 말단의 세력자들인 村主계층에게는 6세기초부터 6부인에게 준 京位에 준하여 外位를 부여했다. 그런데 삼국통일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조정은 村主層에 대한 軍功 포상의 일환으로 경위를 주기 시작했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된 직후 조정은 그 지배층을 포섭할 목적으로 이들에게 경위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삼국통일 직후 외위는 소멸되고 그 대신 경위로 일원화되었다.

 이처럼 통일기에 들어와 지방 촌주계층에 대한 관등상의 차별대우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촌주계층은 경위를 부여받았으면서도 정치참여는 여전히 배제되었으므로 골품제에 정식 포섭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삼국통일 후 지방촌락으로부터 왕경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043)木村誠,<統一新羅の骨品制―新羅華嚴經寫經跋文の硏究―>(≪人文學報≫185, 東京都立大, 1986), 77∼92쪽. 景德王 14년(755) 2월에 筆寫작업이 끝난 白紙墨書寫經≪大方廣佛華嚴經≫권 50의 끝에 실려 있는 跋文에 의하면 이 작업에 종사한 大京(경주) 출신 7명 가운데 오로지 經題筆師인 同智大舍의 골품(6두품)만이 明記되어 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관등 이외에 신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통일기 골품제의 변화로서 주목되는 것은 첫째로는 3두품에서 1두품에 이르는 下位 3계층이 골품신분으로서의 자립성을 상실한 결과 平人 혹은 百姓신분으로 떨어진 점과 둘째로는 지방 촌주층이 眞村主와 次村主로 분화되어 각각 5두품과 4두품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된 점이다. 이같은 사실은 신라의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한 풍속 규정의 내용을 담은 興德王 9년(834)의 교서에 보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보이는 평인과 백성이 과연 같은 계층인지 어떤지는 의문이다. 두 계층이 모두 4두품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지만, 다만 흥덕왕의 교서 내용을 상세히 검토해 보면 평인이 色服 부분에만 규제받고 있는데 비해서 백성은 車騎·器用·屋舍의 세 부문에 걸쳐 규제를 받고 있고, 또 평인이 4두품에 접속하는 계층인 듯 기술된 데 비해서 백성은 평인의 아래에 위치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처럼 생각할 때 평인은 관등을 갖고 있으면서도 골품제에 정식 포섭되지 않는 계층, 백성은 농민을 포함한 일반 주민으로 볼 수 있다.044)木村誠, 위의 글, 95∼97쪽.

 이같은 골품제의 계층구성은 신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유지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최치원이 지은<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에 “나라에 5品이 있으니 聖而요 眞骨이요 得難이라. (이 중 득난은) 貴姓의 얻기 어려움을 말한다. 文賦에 혹 구하기는 쉬우나 얻기는 어렵다고 했는데 따라서 6두품을 말하는 것이다. 수가 많은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은 마치 1命에서 9命에 이르는 것과 같다. 다만 그 4품·5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된다”라고 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최치원은 聖而(성골)를 포함하여 나라에 5품이 있다고 한 것이지만 이미 오래 전에 성골이 소멸된 만큼 당시에는 진골 이하 6두품·5두품·4두품의 네 신분계층만이 존재한 셈이다. 이는 골품제의 사회적 기반이 그 만큼 축소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