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4. 골품제도의 퇴화
  • 2) 진골귀족의 분열

2) 진골귀족의 분열

 골품제에 입각한 신라사회에서 최대의 특권을 누리고 있던 신분계층은 진골이었다. 실로 신라사회는 진골 만능의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중앙의 제 1급 관청의 장관직(令)을 비롯하여 州의 都督, 군부대의 지휘관인 장군직은 모두 진골출신이 독점했다. 이 점은 신라의 멸망 때까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다만 하대에 들어오면서 김헌창의 난이나 흥덕왕이 죽은 뒤에 벌어진 왕위계승쟁탈전에서 볼 수 있듯 진골귀족 상호간에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045)李基東,<新羅 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歷史學報≫85, 1980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77∼183쪽).

 첫째로 이 시기 진골귀족의 수효가 크게 증가한 점을 들 수 있다. 혜공왕 때의 대란이 王都 및 5道 州郡의 소위 96角干의 相戰이었다고 하는≪三國遺事≫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중대말에 官界에 진출하고 있던 진골귀족의 숫자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10대조 혹은 12대조가 내물왕이라고 자처하는 선덕왕·원성왕에 의해 하대가 개창되면서 진골귀족의 족적인 기반 확대와 더불어 그 양적인 증가·확산의 경향은 더욱 촉진되었다. 이는 왕의 자손이라면 누구라도 世代數에 제한을 받지 않고 진골귀족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골품제의 원리상 피할 수 없는 현상이기도 했다. 이처럼 진골귀족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면 근친왕족이라 할지라도 관계 진출에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를테면 文聖王 17년(855) 昌林寺 無垢淨塔을 건립하는데 관계한 왕의 從弟 金銳의 경우 비록 그 官歷 연수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관등이 舍知, 관직이 縣令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왕의 從叔들인 金繼宗·金勳榮 역시 州의 長史 혹은 현령 따위 하위 관직에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진골귀족이 포화상태에 다다른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진골귀족의 증가와 병행하여 자체 내부의 도태작용이 수반된 것도 사실이나, 이는 일부 논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정한 세대수를 단위로 한 일종 친족법적인 적용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046)李基東,<新羅 骨品制 硏究의 現況과 그 課題>(위의 책), 30∼34쪽. 진골귀족들은 서로간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함으로써만 몰락할 뿐이었다.

 둘째로 하대에 들어와 왕실가족 및 진골귀족 집단 내부에서 血族관념의 分枝化 경향이 더욱 촉진되어 매우 좁은 범위의 사람들만을 포함하는 家系(lineage)가 정치적·사회적 행동에 있어서 하나의 기초단위가 된 점을 들 수 있다. 이같은 혈족집단의 分家·新立의 경향은 이미 중고시대 이래 진행되어 온 것이며,047)李基東,<新羅 奈勿王系의 血緣意識>(≪歷史學報≫53·54, 1972 ; 위의 책, 63∼89쪽). 중대 太宗武烈王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중대 왕통을 타도하려는 범내물왕계 진골귀족의 연합투쟁에서 金仁問계로 짐작되는 김주원이 金良相(宣德王)과 보조를 같이 한 데서 시사받을 수 있다. 5묘제도가 확립된 하대에서는 무엇보다도 直系상속이 존중된 결과 직계와 傍系의 차이가 점차 顯示化함으로 해서 이같은 경향이 더욱 촉진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元聖王계 내부에서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원성왕의 두 아들 仁謙과 禮英, 양 계통의 대립이 있었고, 왕통이 인겸계에서 예영계로 넘어간 뒤에는 다시 예영의 두 아들 金憲貞·金均貞, 양 계통의 알력이 있었다.

 이처럼 당시 근친왕족들은 원성왕의 공동 자손이라는 의식에서 연합의 자세를 취하면서도 제각기 독립적인 家系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願刹 건립인데, 김균정은 흥덕왕 3년(828) 7월 경북 迎日郡 神光面 飛鶴山 소재 法光寺에 3층석탑을 건립할 당시 이 절의 檀越, 즉 施主者였다. 이같은 祈福的 성격의 造塔은 당시 귀족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는데, 김균정이 법광사의 단월이었다는 것은 곧 이 절이 그의 가계에 속한 원찰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048)黃壽永,<新羅 法光寺 石塔記>(≪白山學報≫8, 1970 ;≪韓國의 佛敎美術≫, 同和出版公社, 1974, 200∼202·210∼211쪽). 한편 대구 桐華寺 비로암에 헌덕왕의 아들로 알려진 心智(心地)大德에 의해 景文王 3년(863)에 閔哀王의 供養塔이 만들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049)黃壽永,<新羅 敏哀大王 石塔記―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의 調査一>(≪史學志≫3, 1969 ; 위의 책, 216∼229쪽, 특히 228쪽). 이 절은 민애왕의 부친인 忠恭의 집안, 혹은 포괄적으로 인겸태자 계통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사람들의 원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이같은 왕실 혈족집단 내부의 대립 현상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곧바로 일어난 왕위계승쟁탈전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실로 이 쟁탈전은 원성왕의 여러 손자를 시조로 하는 가계들의 연합과 대항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050)李基白,≪新羅政治社會史硏究≫(一潮閣, 1974), 181쪽.

 사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왕실가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하대의 개창 이래 70여 년 이상의 오랜 기간에 걸쳐 몇 사람의 시중을 배출한 바 있는 김주원 집안도 이 시기에 分枝化의 경향을 보였다. 憲德王 14년(822)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그 종족·당여가 239명이나 주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인 金宗基 집안은 그 뒤 계속 건재하여 그 손자들인 金陽·金昕 등은 830년대 후반의 왕위계승쟁탈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종형제 관계인 김양과 김흔의 정치적 입장이 각기 달라 김양이 민애왕을 타도한 金祐徵(神武王)쪽의 최대의 공신인데 반해서 김흔은 민애왕쪽의 군사령관으로 달벌방어전에 出陣한 점이다. 역시 김주원과 같은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金周川 집안도 김헌창의 난을 겪으면서 그 아들 範淸(朗慧화상의 부친)이 비록 진골신분에서 한 등급 강등되기는 했으나 被誅되는 것을 모면한 것을 보면 당시 혈족집단 내부의 분가·신립 경향이 일반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기 진골귀족의 변화 문제와 관련하여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지방 小京에 거주하던 귀족들의 존재이다. 일찍이 조정은 智證王 15년(514) 정월 阿尸村에 소경을 설치한 뒤 그 해 7월 왕경 6부와 남쪽 땅의 人戶를 이곳에 이주하게 한 적이 있다. 영토확장전쟁이 본격화된 眞興王 19년(558) 2월에는 귀족의 자제와 6부의 부호를 전년에 신설한 國原小京에 이주하도록 했는데, 이 徙民策은 진골귀족의 지방확대를 초래한 요인이 되었다.051)지방의 진골을 'Oejin'(外眞)이라 명명한 사람도 있으나(William E. Henthorn, A History of Korea, The Free Press, 1971, 78쪽), 이 용어가 신라시대에 실제로 사용되었는지 어떤지는 의문이다. 삼국통일 후 5소경제도가 확립되면서 지방으로 이사한 진골귀족의 수효는 크게 증가했을 것이다.

 비록≪三國史記≫권 40, 職官志 下, 外位조에는 王京 6부의 진골로서 5소경과 9주에 出居한 사람에게 문무왕 14년(674)에 외위 관등을 주었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그대로 믿기 어렵다. 혜공왕 4년(768)의 대란 때 왕도를 비롯하여 전국 5도 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웠다고 한 것만 보더라도 이들 지방 거주 진골귀족들의 존재가 잘 감지된다. 사실 삼국통일 후 중앙귀족의 지방진출에 수반하는 재지세력의 재편성이 진행된 결과 경덕왕 때 녹읍제도의 부활과 군현제의 재편이라는 지방 지배체제의 일대 개혁을 초래했다는 견해마저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052)木村誠,<新羅郡縣制の確立過程と村主制>(≪朝鮮史硏究會論文集≫13, 1976), 23쪽. 그런데 이 소경의 귀족들은 현지에서 재지세력과 사적인 결합관계를 맺으면서 경제력을 확대해 가는 데는 유리한 측면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다만 官界 진출에 있어서는 중앙귀족에 비해서 차츰 불리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따라 그들의 조정에 대한 불만도 확대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眞聖女王 3년(889)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터지기 직전인 定康王 2년(887) 정월에 漢州의 이찬 金蕘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이같은 관점에서 주목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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