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4. 골품제도의 퇴화
  • 3) 6두품세력의 성장

3) 6두품세력의 성장

 골품제도에서 진골 바로 다음가는 신분이 6두품이었다. 이 6두품에는 신라의 母胎가 되는 斯盧부족을 형성한 여섯 씨족장 가문의 후예와 신라의 팽창과정에서 그에 의해 병합된 押督國(慶山) 등 여러 성읍국가의 지배층 후예들, 그리고 고구려·백제 멸망 후 신라에 포섭된 상급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053)李基白,<新羅 六頭品 硏究>(≪省谷論叢≫2, 1971 ; 앞의 책, 39∼57쪽).
한편 6두품이 씨족장 가문의 후예가 아니라, 중고기 후반에 들어와 族的 제약과 部體制의 규제로부터 벗어나 개인적 차원에서 자유롭게 추구되는 인간관계가 특정한 진골귀족을 주축으로 하여 새로이 형성되고 있을 무렵 진골세력에 투철한 종속성과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그 후원을 입어 생성된 부류라는 견해도 있다(徐毅植,<重位制 施行의 推移와 支配身分層의 變化>,≪新羅上代 ‘干’層의 形成·分化와 重位制≫,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4) 참조.
그러므로 그들의 자기 신분에 대한 자부심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최치원이 자랑했듯이 6두품은 좀처럼 얻기 힘든 貴姓으로 그 자체 득난이라 부를 만한 신분이었고, 한편 5두품이나 4두품은 바로 그 아래 접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족히 말할 바가 못되는 신분으로 간주했다.

 비록 그렇기는 했지만 진골귀족 만능의 골품제사회에서 6두품 출신은 官界 진출에 크나큰 제약을 받았다. 즉 6두품은 17등 관등 가운데서 제6관등인 阿湌까지만 승진이 허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제5관등인 大阿湌 이상으로 제한되어 있는 중앙의 제1급 관청의 장관직에는 오를 수 없었다. 따라서 6두품은 각 부의 차관직인 시랑 혹은 경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한 군직에 있어서도 6停·9誓幢을 비롯한 주요 군부대의 부지휘관인 대감직에 한정되었다. 군태수나 현령직은 6두품에게도 개방되었으나, 상급기관인 州의 장관 역시 진골이 독점했으므로 6두품은 차관직인 州助(일명 州輔·別駕)에 그쳤다. 실제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은 중앙의 執事侍郞직과 지방의 浿江鎭典 都護직이었다. 비록 조정은 소위 重位制를 설치하여 6두품 출신의 아찬 관등 소지자가 重阿湌에서 4重阿湌에 이르기까지 승진할 수 있도록 배려하긴 했다. 하지만 이같은 특진제도를 갖고서도 아찬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054)邊太燮,<新羅 官等의 性格>(≪歷史敎育≫1, 1956), 65∼68쪽.

 이처럼 6두품 출신들은 관계 진출에 제약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 중에는 일찍부터 종교나 학문과 같은 지적인 능력에 의해서 출세의 길을 트려는 경향을 나타냈다. 삼국통일 직후 强首와 薛聰은 문장 혹은 유학 실력으로 출세했는데, 중대 전제왕권 아래서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은 왕권과 결탁해서 국왕의 정치적 助言者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하대에 들어와 국학에 독서삼품과가 설치되면서 6두품은 관계 진출의 제도적 보장을 받았다. 특히 일반 진골귀족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인 君主像을 목표로 정치개혁에 열중하고 있던 하대의 군주들에게 6두품 관료들은 큰 총애를 받았다. 왕이 되기 직전의 원성왕의 꿈을 해몽했다고 하는 아찬 餘三(일명 餘山)이라든가, 혹은 헌덕왕 때 상대등 충공에게 복잡한 인사문제나 김헌창의 난 진압 방안에 대해 조언한 집사시랑 아찬 祿眞과 같은 존재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055)李基白, 앞의 책, 56∼63쪽.

 9세기에 들어오면 중국유학열이 최고조에 달했다. 희강왕 2년(837) 3월 당시 당의 국학에서 수학 중이던 신라 유학생은 모두 216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文聖王 2년(840)에는 수학연한 10년이 지난 宿衛學生 105명이 중국 황제의 명에 의해서 집단으로 귀국당하기까지 했다. 이에 많은 6두품 출신들이 당에 유학하고 돌아왔다. 더욱이 長慶 원년(헌덕왕 13년 ; 821) 이래 당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하여 시행한 과거(賓貢科)시험에 급제한 유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056)申瀅植,<宿衛學生考>(≪歷史敎育≫11·12, 1969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430∼461쪽).
李基東,<新羅 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文人의 文驩>(≪全海宗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一潮閣, 1980 ; 앞의 책, 280∼304쪽).
濱田耕策,<新羅の國學と遣唐留學生>(≪呴沫集≫2, 1980), 65∼68쪽.
金世潤,<新羅下代의 渡唐留學生에 대하여>(≪韓國史硏究≫37, 1982), 149∼168쪽.
최치원은 경문왕 14년(874)에, 朴仁範은 헌강왕 3년(877)에, 崔承祐는 진성여왕 7년(893)에, 崔彦撝는 孝恭王 10년(906)에 각각 登第했다. 당에서 벼슬하고 돌아온 이들은 瑞書院과 같은 문한기관에서 學士로, 혹은 집사성을 비롯한 제1급 중앙관청의 시랑이 되어 유교정치이념을 고취했다.

 이처럼 6두품 귀족들은 하대에 줄곧 그 정치적·사회적 역량을 확대시켜 갔다. 진골귀족의 합의제를 기본으로 하는 골품제적인 정치운영 방식을 개혁하여 권력을 국왕 개인에게 집중시키려 하던 야심적인 군주들에게 그들은 매우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아무리 유용한 존재였다고 하더라도 결코 진골로의 신분 승격을 바랄 수는 없었다. 이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신분을 초월하여 오로지 학문 실력에 기준을 두고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말기에 6두품귀족 사이에 골품제 자체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李基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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