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5. 수취체제의 모순과 농민층의 피폐
  • 2) 농민층의 피폐와 자영농민의 몰락

2) 농민층의 피폐와 자영농민의 몰락

 진골귀족들의 農莊 경영이 전개되는 가운데 자립적인 小農層이 광범하게 몰락해 간 것은 필연적인 추세였다. 사실 지방의 일반 촌락민들은 장기간에 걸친 국가보위전쟁과 삼국통일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이미 다수가 희생되었거나 혹은 부채에 견디지 못하여 사회적으로 몰락했다.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9년(669) 2월 21일, 국왕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下敎하는 가운데 “집안이 어려워 남의 米穀을 빌려 먹은 자로 농사가 잘 안된 곳에 사는 자는 元金과 이자를 갚지 않아도 되고, 만일 농사가 잘 된 곳에 사는 자는 금년 추수 때에 단지 그 本穀만을 갚고 이자는 물지 말 것이니, 30일 기한으로 하여 담당 관청은 이를 奉行하라”고 지시한 것은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하지만 이같은 德政令을 매번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신문왕 9년(689)에 그간 진골귀족들에게 지급해 온 녹읍을 폐지한 것도 이들 자영농민 보호에 그 일차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고 짐작된다. 실로 자영농민들이야말로 중대 전제왕권의 기초였던 것이다. 성덕왕 21년(722) 8월에 국가가 처음으로 백성에게 丁田을 지급한 것은 자영농민 육성의 적극적인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거듭된 재해로 말미암아 농민층은 몰락 위기에 처했었다. 이같은 긴급사태의 도래를 계기로 하여 조정은 均田制의 입법정신에 입각한 토지 지급을 시도한 것으로 생각된다.062)일본 奈良 正倉院에 있는 신라촌락문서에 의하면 통일기 신라의 토지는 結·負·束으로 정확히 파악되고 있었다. 또한 전답의 비옥도를 구분하는 田品 역시 歲易의 정도에 따라 上·中·下 3등으로 파악된 듯하다(李仁哲,<新羅 統一期의 村落支配와 計烟>,≪韓國史硏究≫54, 1986, 7쪽). 성덕왕 21년의 丁田 지급이란 이상과 같은 기반 위에서 백성들에게 토지의 結負數에 따라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口分田까지도 일부 지급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金基興, 앞의 책, 166쪽). 이와는 달리 丁田 지급이란 본래부터 농민의 사실상 사유지였던 田·畓(이른바 烟受有田·畓)에서 田品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매년 실제 경작 여부와 관계없이 전체 연수유전·답을 대상으로 하여 田租를 거두게 된 조치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李喜寬, 앞의 책, 1994, 127∼154쪽). 한편 연수유전·답에 대한 연구사의 정리는 李仁哲,≪新羅의 村과 村民支配에 관한 硏究―正倉院 所藏 新羅帳籍을 中心으로―≫(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3), 175∼177쪽 참조. 하지만 농민을 촌락공동체적 結集에서 분리시키지 못하는 한 정전 지급을 통한 촌락민에 대한 個別 지배의 노력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한편 삼국통일 후 1백 년 이상에 걸친 국제 평화와 국내 안정의 결과 농업생산력은 꾸준히 향상되고 상공업은 발전을 거듭했다. 비록 수공업 부문에서는 여전히 관영수공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 생산기술의 발달로 국내의 物貨유통은 촉진되고 중국·일본과의 대외교역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집권체제가 허술해진 하대에 들어오면 사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층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국가의 온갖 규제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한편 수공업 기술자인 匠人들 가운데 일부는 工價를 받고 물품 제작에 임하는 등 그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어 장인사회 자체가 분화의 조짐을 보였다.063)朴南守,<중·하대 장인의 분화와 사회경제적 지위변동>(≪新羅手工業史≫, 신서원, 1996) 참조. 바야흐로 신라사회가 사회적 분화의 문턱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계층의 분해작용이 소리없이 진행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골품제의 변질과정에서 확인한 것처럼 그것은 비단 일반 농민층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골품제의 하부를 구성하고 있던 3두품 이하 1두품까지의 신분층이 골품제에서 탈락되어 平人·백성층과 一體化된 것은 그 뚜렷한 증좌이다. 하지만 보다 주목할 만한 변화를 겪은 것은 다름아닌 일반 농민층이었다. 일부 자영농민 이외에 토지를 갖지 못한 상당수의 농민들은 날품팔이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소위 傭作노동자로 떨어진 것이다.≪삼국유사≫권 5, 孝善篇에는 이같은 용작 사례가 많이 보인다. 이를테면 뒤에 義湘大師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된 眞定이라든지 혹은 佛國寺와 石佛寺 창건의 주역이 된 金大城의 轉生설화에 등장하는 그 어머니 慶祖가 바로 그들이다.

 중대 말기인 景德王 16년(757)에 녹읍이 부활되고 멀지 않아 국가의 역량이 크게 축소된 하대가 전개됨에 따라 농민층의 계층분화는 한층 더 현저해졌다. 대규모의 田莊을 소유하게 된 귀족층과 그간 지방 촌락사회에서 촌주로 행세하며 세력을 확장해 간 부농층은 끊이지 않는 力役 징발과 식량기근에 허덕이는 자영 小農의 토지를 겸병했다. 사실 소농 중에는 아예 유력자에게 토지를 양도하고 그 비호 아래 들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하여 귀족과 부농층은 無田 농민들에게 농지를 빌려주고 地代를 징수하는 경영방식을 취하여 수입의 안정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에 농민들 중에는 자유민의 신분이면서도 그 지배 아래 들어가 생계를 유지하는 길을 택하는 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신라사회에는 地主·佃戶制에로의 傾斜라는 새로운 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064)金容燮,<農業史>(≪韓國文化史新論≫, 中央大 中央文化硏究院, 1975), 377∼378쪽.

 현재 일본 奈良 正倉院에 남아 있는 신라 통일기 西原京 지방의 촌락문서의 작성연대인 을미년을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경덕왕 14년(755)과 헌덕왕 7년(815)에 比定하는 兩說이 유력한데,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065)다만 최근에 촌락문서의 작성연대를 효소왕 4년(695)으로 보는 신설이 제기되었다. 이에 의하면 촌락문서가 부착된 ‘華嚴經論第七帙’의 재질은 촌락문서와 같은 楮紙의 白紙이며, 나아가 여기에는 舊譯≪華嚴經≫의 주석서인 100권으로 된 北魏의 靈辨(477∼522)이 撰한≪화엄경론≫이 들어 있었고, 이는 8세기 전반경 신라 출신의 화엄학승인 審詳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져서 造東大寺司의 寫經所를 거쳐 正倉院에 入庫되었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尹善泰,<正倉院 所藏 新羅村落文書의 作成年代―日本의≪華嚴經論≫流通狀況을 중심으로―>,≪震檀學報≫80, 1995, 1∼31쪽). 그런데 이 문서를 통해서 우리들이 받은 인상은 농민들의 생활조건이 매우 열악했었다는 점이다. 촌락의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웃돌고 있는 것이라든지, 60세 이상 살아남은 사람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또한 농촌의 호구 이동현상이 뚜렷한 것도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피폐상을 반영하는 것에 다름아니라고 생각된다.

 하긴 연구자 중에는 이를 촌락민의 문서로 간주하고 당시 ① 농촌의 인구는 적은데 비해 경지면적은 매우 넓으며, ② 農家가 보유하고 있는 牛·馬 등 가축수가 상당히 많으며, ③ 촌락마다 원예작물 특히 果樹 재배가 성행하고 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농업이 후세에 비해 粗放농업이었다고 하더라도 생산기구의 개량, 노동생산성의 향상 및 확대 가능성은 얼마든지 보장되어 있는 만큼 농민은 이러한 조건 하에서 생산의 증대를 위해 노력했을 것으로 보았다.066)李佑成,<三國遺事所載 處容說話의 一分析>(≪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乙酉文化社, 1969 ;≪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191∼192쪽). 그렇지만 이 문서를 기본적으로 녹읍제도에 의한 內省 혹은 왕실 직속의 촌락지배를 보여주는 일종 集計帳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067)武田幸男,<新羅の村落支配―正倉院所藏文書の追記をめぐって―>(≪朝鮮學報≫81, 1976), 233∼235쪽.
浜田耕策,<‘新羅村落文書’硏究の成果と課題>(唐代史硏究會編,≪律令制―中國·朝鮮の法と國家―≫, 汲古書院, 1986), 590∼596쪽.
金基興,<新羅 ‘村落文書’에 대한 新考察>(≪韓國史硏究≫64, 1989), 29∼34쪽.
유력한 만큼 이 문서에 보이는 촌락의 실태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주장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요컨대 하대에 들어와 촌락민의 계층분화가 한층 더 촉진되어 가는 가운데 촌락의 공동체적 결합관계가 차츰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유력한 村主層을 주축으로 해서 촌락 재편성이 진행되어 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068)木村誠,<新羅の祿邑制と村落構造>(≪歷史學硏究≫別冊特輯, 1976), 59∼60쪽. 이 과정에서 촌락공동체를 이탈한 농민들이 속출한 결과 대량의 流民이 발생하는 등 사회혼란은 차츰 加重되어 갔다.

<李基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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