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1. 호족세력의 대두 배경
  • 1) 호족의 개념

1) 호족의 개념

 신라말·고려초에 대두한 지방세력을 豪族이라 부르고 있다. 호족이라는 용어는 대부분의 한국사 개설서에서 그리고 이 시기를 연구한 대부분의 논문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당시의 지방세력을 호족이라 부르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되었다. 그렇지만 호족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연구는 호족의 개념을 명료하게 정의하지 않고 논지를 전개한 결과, 호족의 성격이나 신라말·고려초 사회변동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이런 사정으로 최근에 호족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어떤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는지를 연구사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 시도되어 왔다.069)李純根,<羅末麗初 ‘豪族’용어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聖心女大論文集≫19, 1987).
文暻鉉,<豪族論>(≪高麗太祖의 後三國統一硏究≫, 螢雪出版社, 1987).
金甲童,<豪族聯合政權說의 檢討>(≪羅末麗初의 豪族과 社會變動 硏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90).
申虎澈,<後三國時代 豪族聯合政治>(李基白 外,≪韓國史上의 政治形態≫, 一潮閣, 1993).
그런 가운데 호족의 개념은 좀더 분명히 정의되었고, 이것은 호족에 대한 체계적 연구에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

 호족이라는 용어는 1930년대 이래 한국사 연구자들에 의하여 사용되어 왔는데, 그 개념은 1950년대까지는 대체로 “신라말·고려초에 지방에서 대두한 새로운 사회세력”의 의미로 인식되었다.070)申虎澈, 위의 글, 127∼128쪽에 인용된 白南雲·孫晋泰·李丙燾·李弘稙·申奭鎬·韓㳓劤·曺佐鎬의 글에서 호족이 그러한 의미로 인식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1960년대초에 호족에 대한 전문적인 논문이 발표되면서071)旗田巍,<高麗王朝成立期の府と豪族>(≪法制史硏究≫10, 1960 ;≪朝鮮中世社會史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金鍾國,<高麗王朝成立過程の硏究―特に豪族問題を中心として―>(≪立正史學≫25, 1961).
호족의 개념에 대한 정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며,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사 개설서의 篇名으로「豪族의 時代」가 설정되면서072)李基白,≪韓國史新論≫(一潮閣, 1967).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지방세력을 호족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호족의 개념이 더 구체적으로 정의되어 왔다. 이제 호족의 개념을 정의한 대표적인 견해를 비교적 긴 인용문을 제시하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은 “지방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은 그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강하게 내세우는 존재였다. 호족들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몰락해 내려간 중앙귀족 출신도 있었지만 지방에 토착해 있던 村主 출신도 있었다. 이들은 자기의 세력기반인 鄕里지방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중앙정부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강한 의욕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행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또 경제적으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반독립적인 자세에서 중앙정부와 연결하고 있었다”073)李基白,<高麗貴族社會의 成立>(≪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高麗貴族社會의 形成≫, 一潮閣, 1990, 3쪽).라고 호족의 개념을 정의한 견해가 있다. 여기서 호족은 중앙정부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강한 의욕을 지니고 있었으며, 행정적·군사적·경제적으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독자적인 세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전국 각처에서는 有力者가 그 지방을 세력기반으로 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나갔던 것이다.…그 지방의 유력자, 즉 호족은 城主 혹은 將軍이라 불리고 있었으며, 그의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민중들을 직접 지배하며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074)河炫綱,<高麗王朝의 成立과 豪族聯合政權>(≪한국사≫4, 1974), 45쪽.라고 호족의 개념을 정의한 것이 있다. 여기서 호족은 지방의 유력자로서 그의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민중들을 직접 지배하며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존재로 정의되고 있다.

 그 다음에는 “호족은 나말여초에 존재한 지방세력으로서 성주 혹은 장군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그들은 지방에 근거를 둔 토착세력으로서 자신의 세력이 미치는 지방의 민중들을 직접 지배하며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사에 있어서 古代·中世의 전환기가 되는 나말여초라는 內亂期를 이끈 세력으로서 신라를 해체하고 고려를 성립시킨 주역들이다”075)申瀅植,<豪族의 歷史的 性格>(≪新羅史≫, 梨花女大 出版部, 1985), 225∼226쪽.라고 호족을 정의해 놓기도 하였다. 여기서 호족은 신라말·고려초에 존재한 지방세력으로서 지방의 민중을 직접 지배하며 독립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라를 해체하고 고려를 성립시킨 주역들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이러한 호족에 대한 정의를 종합하면 호족은 신라말·고려초에 지방에서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행정적·경제적·군사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독자적인 지방세력으로서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세력으로 규정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아울러 호족은 대체로 성주·장군으로 불리는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호족의 개념이 1970년대 이래 현재까지 한국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최근에는 호족의 성격과 개념에 대한 정의가 한층 더 명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즉 호족의 일반적인 성격을 이끌어 내는 데 있어서는 “신라의 골품체제나 王京 중심의 사회체제에 반발하고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地方性 혹은 在地性이, 군사적·경제적·사회적으로 거의 독자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독자성 혹은 독립성이, 일정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領域性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호족을 “① 신라 말기에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였고, ② 그 세력기반은 중앙(王京)이 아닌 지방사회에 있었으며, ③ 일정한 영역에 대해 어느 정도 독자적인 지배권―군사적·경제적·정치적인 지배권 ―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④ 신라의 골품체제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을 가진, ⑤ 특히 신라 骨品貴族이나 고려 門閥貴族과는 대비되는 신라말·고려초의 정치적 지배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076)申虎澈, 앞의 글, 133쪽. 이러한 호족에 대한 개념 규정은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타당하고 합리적인 견해로 믿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호족의 개념과 관련하여 호족의 土着性 혹은 地方性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 동안 호족의 성격으로 토착성이 강조되어 왔다. 토착성은 태어나 성장한 지역, 즉 출신지에 여러 대에 걸쳐 在地的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토착성을 지닌 지방세력만을 호족으로 보는 것은 재고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출신지를 떠나 移居地에 세력기반을 마련하여 유지하고 있는 것도 지방성과 재지성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지방세력이 출신지를 떠나 특정한 지역에 이거하여 자리를 잡고 세력기반을 마련하였다면, 그 세력을 호족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거지에 자신의 代 혹은 아버지의 대에 재지적 기반을 마련한 사례는 지방으로 낙향한 중앙귀족의 경우에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에 지방성과 재지성의 의미를 더 폭넓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지방성·재지성의 의미는 토착성의 의미에 더하여 출신지를 떠나 이거지에 세력기반을 마련하여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甄萱이 武州에서, 弓裔가 溟州에서 자립하던 초기, 아직 국가체제의 틀을 갖추지 못했던 때에는 그들도 호족이었다고 생각한다.077)이와 관련하여 필자와는 다른 기준에 의해서 申虎澈이 견훤·궁예·왕건을 호족세력으로 이해한 것이 참고된다. 그는 “견훤·궁예·왕건은 모두 호족출신이거나 호족세력을 배경으로 그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구축한 지방세력 가운데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고 그러한 점에서 이들 셋 모두 호족세력의 대표적 존재였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하였다(申虎澈,<豪族勢力의 成長과 後三國의 鼎立>,≪新羅末 高麗初의 政治·社會變動≫, 신서원, 1994, 151∼152쪽). 尹瑄이 궁예로부터의 禍를 염려하여 그 무리를 거느리고 鶻巖城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그를 호족으로 불러도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國原에서 30여 성주와 연결을 맺고 있었던 梁吉도 물론 호족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사료에 나타난 지방세력에 대한 표현으로는 將軍·城主·城帥·帥·賊帥·賊·雄豪·豪傑·豪族 등이 사용되었다.078)李純根,<羅末麗初 地方勢力의 構成形態에 관한 一硏究>(≪韓國史硏究≫67, 1989), 29∼38쪽. 이렇게 표현된 지방세력이, 그 동안에 이루어진 호족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에서 호족의 사례로 제시되어 왔다는 것은 쉽게 인정되는 사실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여기서 賊으로 표현된 지방세력 중에서 赤袴賊 등과 같은 草賊이나 群盜는 호족에서 제외시켜 온 것도 그 동안의 연구 경향이었다.079)金哲埈은 호족의 한 유형으로 草賊·群盜의 무리를 徒黨化한 것을 제시하고, 이 유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箕萱·梁吉·弓裔를 들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초적·군도의 무리를 호족으로 규정하고 있는 느낌을 주지만, 자세히 그 의미를 더듬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초적·군도의 무리는 호족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러한 무리를 도당화하여 거느린 기훤·양길·궁예는 호족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金哲埈,<文人階層과 地方豪族>,≪한국사≫3, 1976, 602∼603쪽). 왜냐하면 호족의 성격으로 지방성과 재지성이 강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군·성주·성수·수·적수·적·웅호·호걸·호족 등으로 표현된 세력 중에서 지방에 재지적 기반이 없는 초적이나 군도 등을 제외한 지방세력을 호족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상에서 호족의 개념이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를 검토하여 보았다. 여기서 소개한 여러 견해들을 토대로 하여 호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호족은 신라말에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여 지방사회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독자적인 지방세력으로서 신라말·고려초의 사회변동을 주도한 지배세력이었다. 아울러 호족은 장군·성주·성수·수·적수·적·웅호·호걸·호족 등으로 표현된 세력 중에서 지방에 재지적 기반이 없는 초적이나 군도 등을 제외한 지방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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