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2. 호족세력의 대두
  • 3)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3)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신라 통일기에 이르러 해상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삼국통일로 말미암아 각지의 物貨유통이 원활하게 되어 산업이 발달하고, 당과의 해상교통이 원활하게 되어 중국의 발달된 문화와 경제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따른 문화의 향상과 생활상태의 변화는 물품에 대한 수요를 크게 증대시켰다. 그 결과 무역관계에 있어서도 朝貢에 의한 公貿易만으로는 물품 수요의 증가에 부응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민간의 사사로운 교역, 즉 私貿易이 왕성해졌다. 이 사무역은 주로 해안지역의 지방세력에 의하여 해상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해상무역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신라 하대에 이르러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신라의 해상무역은 주로 당·일본과의 사이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의 해상무역은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 이후에 본격적으로 활발하여졌다. 장보고는 신라·당·일본 3국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였다. 장보고는 당과 교역하기 위하여 수시로 大唐賣物使라는 교역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그 무역선은 交關船이라 일컬어졌다. 당시 장보고의 중국에서의 교역활동의 거점은 산동반도의 끝에 위치한 登州 赤山浦였다. 그는 이 곳을 거점으로 하여 그 남쪽의 楚州·漣水·揚州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라의 무역상들을 하나의 交易網 속에 편제하여 그의 영향하에 두었다.099)李基東, 앞의 글(1985), 107쪽. 장보고는 당의 물품을 구입하여 일본에 판매하는 중개무역을 본격화하였다. 그가 일본에 보낸 무역사절단은 回易使라 불려졌다. 당시 일본의 중국 물품에 대한 욕구는 매우 컸는데, 이는 장보고의 중개무역에 의하여 충족되었다. 장보고와 일본과의 교역은 빈번히 이루어졌고 그 규모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때(828∼841)는 신라의 해상무역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이와 같은 해상무역의 발전과 함께 해안 지역에서 해상무역활동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부류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해상세력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물론 장보고였다. 장보고는 앞 절에서 군진세력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는 군진세력으로서의 성격보다는 해상세력으로서의 성격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장보고가 해상무역활동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貿易統制였다. 그는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해적을 퇴치한다는 명분 아래 서남해안 지역의 群小 해상세력들을 단속·억제하여 그의 휘하에 통합·조직함으로써 해상무역의 막대한 이익을 독점할 수 있었다.100)李永澤, 앞의 글, 83·92쪽.
李基東, 위의 글, 116∼118쪽.
이에 따라 서남해안 지역의 군소 해상세력들은 청해진의 설치와 함께 장보고의 통제 아래 들어감으로써 종전에 그들이 점유하던 해상무역의 이익을 대부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가 암살된 이후 그 통제에서 벗어난 서남해안 지역의 해상세력들은 각기 독자적으로 해상무역에 종사하여 그 이익을 얻어 부를 축적하여 갔다. 이들은 후삼국이 정립된 이후에는 독자적인 지방세력을 형성하여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 중에서 그 대표적인 존재는 松嶽地方의 왕건 가문이다. 왕건의 선대 중에 康忠은 禮成江 河口의 永安村 富人의 딸 具置義와 혼인하였다. 당시 예성강 하구가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영안촌 부인은 해상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한 해상세력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강충이 영안촌 부인의 딸과 혼인하였다는 것은 그가 예성강 하구의 해상세력과 연결을 맺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왕건의 조부 作帝建은 商船을 타고 서해를 항해하던 중에 西海 龍王을 만나 그의 딸 龍女와 혼인하고 七寶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여기서 작제건이 상선, 즉 무역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하였다는 것은 그가 해상무역에 종사한 해상세력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또한 그가 부를 상징하는 7보를 얻어 왔다는 것은 해상무역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그리고 서해 용왕은 막대한 財富를 가진 서해의 해상세력으로 이해되고 있다.101)朴漢卨,<王建世系의 貿易活動에 대하여―그들의 出身究明을 중심으로―>(≪史叢≫10, 1965), 275쪽. 이상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 작제건은 서해의 해상세력과 연결을 맺고 해상무역에 종사하여 크게 성공한 해상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제건이 용녀와 혼인하고 돌아오자 白州(현 연안)의 正朝 劉相晞 등이 開·貞·鹽·白 4州와 江華·喬桐·河陰 3縣의 사람을 동원하여 그를 위하여 永安城을 쌓고 宮室을 지은 것은 그의 세력이 개성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일부, 강화도, 한강하류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龍建은 송악으로부터 예성강 하구에 있는 영안성까지를 왕래하였다. 이는 용건이 작제건을 계승하여 여전히 예성강 하구에서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해상세력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용건은 송악군의 沙粲이었는데, ‘郡을 들어 弓裔에게 歸附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송악군을 지배하던 호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왕건 가문은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호족으로 대두하였다. 왕건 가문은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102)鄭淸柱,<王建의 成長과 勢力 形成>(≪全南史學≫7, 1993 ; 앞의 책, 96∼102쪽).

 예성강 하구 지역은 당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왕건 가문 이외에도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 있었다. 먼저 백주의 정조 유상희를 들 수 있다. 그가 칭하고 있는 정조는 당시 새로 흥기하는 지방의 호족이 사용하던 호칭이었다.103)正朝는 角干·聖骨將軍과 마찬가지로 당시 지방의 호족들이 신분을 粉飾하기 위하여 사용한 호칭으로서 고려초에 鄕職 7品으로 되었다(李佑成,<麗代百姓考>,≪歷史學報≫14, 1961 ;≪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176∼177쪽). 그는 예성강 하구 지역에 위치한 4州 3縣의 사람을 동원하여 작제건을 위하여 영안성과 궁실을 지을 정도의 세력을 쌓고 있던 인물이다. 그는 해상무역에 종사한 해상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貞州(현 豊德)의 유천궁을 들 수 있다. 그는 왕건의 첫째 왕후인 神惠王后 柳氏의 아버지이다. 당시 정주는 水軍基地였는데 왕건이 羅州를 정벌할 때 이 곳에서 전함을 수리한 후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였다. 유천궁은 大富로서 長者로 불려졌다. 그의 富는 왕건의 군사 전체를 매우 풍족하게 먹일 정도였다. 그는 왕건의 戰艦을 수리하는 데에도 후원하였을 것이다. 그가 왕건의 군대를 후원할 정도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것은 정주 浦口를 중심으로 서해안에서 해상무역에 종사한 해상세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유천궁의 정주 유씨는 해상세력에서 호족으로 성장하였다.104)鄭淸柱, 앞의 책, 112∼114쪽.

 예성강 하구 지역 이외에도 나주·靈巖·壓海·槥城·康州·蔚山 등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근거지에는 해상세력이 부를 축적하여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나주는 신라말·고려초에 서남해안지역의 對唐交通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나주의 多憐君은 왕건의 둘째 왕후인 莊和王后 吳氏의 아버지이다. 다련군의 아버지는 富伅인데, 부돈은 富者라는 의미를 지닌다. 羅州吳氏의 조상은 중국에서 상인으로 興하여 해외무역상을 따라 신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다련군의 나주 오씨는 해상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한 해상세력으로 생각된다. 다련군이 나주의 지방세력가로 추측되는 沙干 連位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딸을 왕건과 혼인시킨 것으로 보아, 그는 나주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생각된다. 나주 오씨는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이었다.105)姜喜雄,<高麗 惠宗朝 王位繼承亂의 新解釋>(≪韓國學報≫7, 1977), 69쪽.
鄭淸柱,<新羅末·高麗初의 羅州豪族>(≪全北史學≫14, 1991 ; 위의 책, 157∼158쪽).

 영암은 나주와 함께 신라말·고려초에 서남해안지역의 대중국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또한 영암은 신라말에 풍수지리설을 발전시킨 道詵과 그의 제자 慶甫의 출신지이다. 靈巖崔氏는 崔知夢을 배출한 가문이다. 최지몽은 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天文·卜筮에 정통하였는데, 그는 영암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최지몽의 가문은 영암지역의 유력한 호족으로 생각된다. 영암 최씨는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호족으로 성장하였다고 생각된다.106)鄭淸柱, 위의 책, 158∼159쪽.

 압해(현 신안군)는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해상교통의 요지이다. 이 곳에는 能昌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는 水戰에 능하여 수달이라고 불려졌다. 그는 부근에 있는 여러 섬의 군소 해상세력과 결속하여 왕건의 수군에 대항하였는데 왕건도 그의 세력을 경시하지 못하였다. 그는 賊帥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압해지역의 해상세력을 지배하는 호족이었다.107)鄭淸柱, 위의 책, 154쪽.

 혜성은 아산만의 남쪽 연안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沔川郡으로 불려진 곳이다. 혜성에는 신라시대에 水軍倉·穀倉이 설치되어 있었고, 唐의 使臣·商人이 머무르는 숙소가 있었으며, 신라의 조공을 실어 보내는 大津이라는 항구가 있었다. 이같이 혜성은 신라시대에 대당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번창한 곳이었다. 따라서 혜성에 해상세력이 존재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혜성 출신의 인물로는 朴述熙와 卜智謙을 들 수 있다. 박술희는 莊和王后 吳氏 소생의 武(惠宗)를 후견한 인물로서 왕건·나주 오씨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가 두 가문과 동일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한편 박술희가 거느렸다는 100여 명의 병사는 그의 아버지 大丞 得宜가 혜성에서 거느렸을 사병을 기반으로 하였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득의는 혜성에서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박술희 가문은 해상무역에 종사한 해상세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8)鄭淸柱,<王建의 成長과 勢力 形成>(≪全南史學≫7, 1993 ; 위의 책, 118∼120쪽). 복지겸의 선조는 당으로부터 와서 혜성군에 거주하면서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모아 보호하였다. 이것은 卜氏 가문이 당에 왕래하면서 해상무역에 종사하였으며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모아 보호할 정도의 해군력과 부를 소유한 해상세력이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109)鄭淸柱, 위의 책, 126쪽. 박술희 가문과 복지겸 가문은 혜성지역의 해상세력이었다. 이들 가문은 해상세력이 경제력과 군사력을 쌓아 호족으로 성장한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강주(현 진주)에서도 해상세력이 대두하였다. 王逢規는 경명왕 8년(924)에 泉州節度使로서 後唐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 후 경애왕 4년(927) 3월에 왕봉규는 權知康州事로서 후당으로부터 懷化大將軍을 제수받았다. 이어 다음달에는 知康州事로서 후당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왕봉규는 泉州(현 의령)에서 독립적 세력을 형성하여 마침내 강주지역을 지배하기에 이른 호족이었다.110)金庠基,<羅末 地方群雄의 對中通交―특히 王逢規를 中心으로―>(≪黃義敦先生古稀紀念 史學論叢≫, 1960 ;≪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74, 436쪽). 그가 후당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정치적 의미를 크게 지니고 있지만, 조공을 통한 공무역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왕봉규의 對中外交는 당시의 정세로 보아 海路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해상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렇다면 그는 해상무역에 종사한 해상세력이었을 것이다.

 또한 울산(興禮府)은 경주의 外港으로 국내외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중심지였고, 당·일본과 교통하는 국제항이었다.111)李龍範,<處容說話의 一考察>(≪震檀學報≫32, 1969), 20∼25쪽. 당시 이 곳에서는 朴允雄이 神鶴城將軍으로서 독자적인 군사력을 행사하면서 호족으로 대두하였다.112)李佑成,<三國遺事所載 處容說話의 一分析>(≪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1969 ;
앞의 책, 182∼184쪽).
그는 울산항의 무역 이윤을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13)具山祐,<羅末麗初의 蔚山地域과 朴允雄>(≪韓國文化硏究≫5, 釜山大, 1992), 31∼33쪽. 이런 점에서 박윤웅은 해상세력 출신의 호족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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