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3. 장보고와 청해진

3. 장보고와 청해진

 신라의 해상세력은 9세기에 이르러 활기를 띠었다. 그 대표적 세력은 淸海鎭(완도)120)청해진은 현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將島(助音島)로 1984년 9월 1일자로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었다.을 거점으로 대외무역을 전개한 張保皐였다.121)이름은 保皐 이외에도 弓福·弓巴·寶高 등이 있었다. 궁복·궁파는 弓術 등 무술에 능한 상징적 의미로 보아 그가 渡唐하기 전 소년시절에 불렀던 이름, 保皐는 入唐하여 武寧軍에 입대한 뒤에, 寶高는 신라·당·일본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호칭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의 신분은 본디 완도의 측미한 海島人이었다. 그가 入唐한 시기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9세기초 흉년과 기근이 극심했던 憲德王 6년(814)부터 9년 사이로 판단되며,122)崔根泳,<9世紀 新羅의 對唐進出에 대한 一考>(≪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92), 377쪽. 그가 최초로 정착한 곳은 徐州였다.

 그는 서주의 武寧軍에 입대한 뒤 淄·靑·登州 등 15州를 관장했던 李師道 토벌에 참여하여 小將으로 승진, 명성을 떨친 뒤 軍에서 나와 赤山지방을 무대로 세력기반을 구축하였다. 당시 수도인 長安을 비롯하여 登州 牟平縣 乳山浦, 文登縣 赤山浦 일대와 大運河 淮水流域의 내륙지방 곳곳에는 백제·고구려계 후예와 신라의 유학생·사신·무역상인의 잦은 내왕으로 신라인의 생활기반이 개척되어 流移民이나 무역상의 활동에는 그리 낯설지는 않은 곳이었다. 예컨대 楚州·漣水·揚州·赤山 등지에 설치된 新羅坊·新羅館·新羅所·新羅院 등을 보아 알 수 있다.

 장보고는 在唐시절 적산지방에 이미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財力家로 군림하였다. 그 사실은 年收 500石米의 庄土를 기증하여 창건한 法華院123)법화원에는 僧 24명, 尼僧 3명, 노파 2명이 상주하였으며 新羅通事押衙 張詠·林大使·王訓 등이 관리하였다. 講會는 불교의식으로 신라의 풍속대로 진행되었다. 839년 11월 16일부터 840년 정월 15일까지 매일 40명 내외의 신도가 모였고, 마지막 20일간은 250명과 200명이 참여한 것을 보면 법화원의 寺勢를 짐작할 수 있다(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開成 4년 6·7월).이 시사해 준다. 그는 법화원을 기반으로 재당신라인들의 정신적 안녕과 단결을 도모하는 한편 양주·초주 등지에 거주하는 신라인들과 연관을 맺는 등 후일 對中國 무역활동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뒤 귀국하였다.

 장보고가 귀국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귀국 후 興德王에게 淸海에 鎭營을 설치하여 奴婢掠賣防止와 해적소탕에 뜻이 있다고 진언한 것(828)124)≪三國史記≫권 44, 列傳 4, 張保皐.을 고려하면 그는 분명 해상세력가로의 진출에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뜻을 받아들인 흥덕왕은 그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청해진을 설치토록 허락하고 신라역사상 관직에도 없는 大使라는 직함을 주었다.125)흥덕왕이 장보고의 진언을 흔쾌히 받아들여 그를 후원한 것은 김헌창의 반란이후 사회적 혼란을 틈타 서남해안과 영산강 연안 등지에서 자생적으로 등장하는 지방세력과 군소 해상세력의 대두를 우려하였거나 또는 서남해안에 출몰하는 해적들을 방어할 필요성 등 당시 중앙정부가 당면한 과제가 장보고의 뜻과 맞아떨어져 그 책임을 그에게 맡기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그는 명실공히 해상세력가로 등장하여 뜻을 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특히 청해진을 설치한 완도의 지리적 조건을 보면 황해를 횡단하여 중국과 연결되고, 동남쪽으로는 일본의 北九州 博多로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길목이며, 더욱이 경주의 관문인 울산항을 왕래하는 羅·唐 양국의 상인들과 일본과 唐과의 사이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통제·장악·보호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한편 내륙으로는 康津·海南·羅州 등 영산강 연안 등지의 토호나 군소 해상세력을 통어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장보고는 이 청해진을 거점으로 해상무역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내에는 적산포를 중심으로 초주·연수·양주 등지에 분산되어 있는 신라 무역상을 하나의 교역망으로 편제하여 그의 영향권하에 두고 중국 서남해 지방까지 세력을 뻗쳐 나·당간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당과의 무역은 그의 교역사절단인 遣唐賣物使와 무역선인 交關船의 동정에서 살필 수 있다. 예컨대 神武王 때(839년 6월 27일) 張大使의 교관선 2척이 적산포에 도착하여 다음날 매물사 崔兵馬使(崔暉)가 당의 冊封使 吳子陳 등 30여 일행을 법화원에서 만난 사실,126)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開成 4년 6월 27·28일. 그리고 840년 2월 15일 최병마사가 탄 배가 등주의 유산포와 양주지역간을 왕래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127)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開成 5년 2월 15일. 이 때 양주지방은 일본과의 무역으로 巨富가 된 신라의 상인도 있었으며, 페르시아·아라비아 방면의 상인들까지 모여드는 국제적 무역항이었다.128)李基東,<張保皐와 그의 海上王國>(≪張保皐의 新硏究≫, 莞島文化院, 1985), 108쪽.

 당시 장보고의 교역품은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당시 唐과 公貿易을 통한 수출품은 金·銀·銅공예품, 직물공예품, 魚牙紬, 朝霞紬, 細布, 海豹皮 등이었고, 신라로 수입된 것은 서적·茶·衣服·견직물·문방구 등과 중국 서남해 지방의 산물인 沈香 등 진귀품도 있었다. 이를 고려하면 장보고 선단의 교역품도 이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중앙의 귀족들이 즐겨찾는 남방물산의 진귀품인 瑟瑟·㲮·翡翠毛·玳琩·沈香 등과 馬鞍·貂皮·帆布 등의 사치품을 보다 많이 수입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9세기는 중앙의 귀족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든 시대였기 때문에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였을 것이다. 한편 신라상인이 白居易의 詩文을 占買하고 저명한 화가의 작품들을 고가로 사들였다고 하며,129)Edwin O. Reischauer, Ennin's Travels in T'ang China, The Ronald Press Co, New York, 1955, p.281. 당시 아랍 무슬림들도 신라의 劍·絹布·陶磁器 등을 수입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교역활동은 장보고 휘하 상인들의 역할이 아니었을가 싶다.

 장보고의 교역품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청해진에서 출토된 중국 越州窯 계통의 9세기 청자로 추정되는 해무리굽 靑磁 底部片 및 注口片이다.130)文化財硏究所,<將島淸海鎭 將島試掘發掘調査 指導委員會 會議資料>, 1992), 7쪽. 이로 미루어 장보고 휘하 상인들이 浙江地方의 명산인 청자까지 이미 수입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고려시대 청자의 대표적 요지인 康津郡 大口面이 將島로부터 가까운 거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곳에는 장보고 선단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겠다.

 한편 일본과의 교역을 보면 통일 이후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원활하지 못했다. 景德王 12년(753) 신라에 온 일본 사신이 오만무례하여 접견하지 않은 사건131)≪三國史記≫권 9, 경덕왕 12년 8월.을 계기로 국교는 사실상 단절되어 오다가 哀莊王 4년(803) 교빙이 시작되어132)≪三國史記≫권 10, 애장왕 4년 7월. 양국간에는 사무역에 대한 욕구가 증대되었다.

 당시 일본상인들은 중국 문물에 대한 욕구는 컸으나 조선술과 항해술이 신라보다 뒤떨어져 신라상인의 중계무역에 의해 그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실정이었다. 신라인의 對日交易은 9세기에 들어와 한층 활기를 띠었다.≪日本後紀≫권 22, 弘仁 3년(812)조에 보면, 신라의 선박 20여 척이 對馬島 근해에 나타난 것을 보고 해적선으로 오인하여 신라어 통역관과 군대를 동원하여 엄히 경계한 일도 있었다. 이 때 일본 당국은 대마도에 新羅譯語를 두었다.133)≪日本後紀≫권 24, 嵯峨天皇 弘仁 6년 정월 임인.

 장보고의 대일교역은 청해진 설치 이전인 在唐시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134)天長 원년에 張大使가 일본에 도착했다는(≪入唐求法巡禮行記≫권 4, 會昌 5년 9월 22일) ‘장대사’는 赤山지역 신라인 집단의 두목인 張詠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李永澤,<張保皐海上勢力에 관한 考察>,≪韓國海洋大學論文集≫14, 1979, 75쪽) 小野勝年은 장보고로 간주하고 있다(小野勝年,≪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4, 鈴木學術財團, 1969, 243쪽). 청해진 설치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는 回易使라는 무역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그들은 大宰府나 일본 본국정부의 묵인 아래 교역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회역사들은 博多에 무역소를 두고 일본관원을 상대로 상거래를 하였는데 상품의 인기가 높아 구입대금을 선납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일본정부는 일본인들의 그 같은 상행위를 경계하는 행정명령까지 내렸다고 하니135)≪續日本後紀≫권 10, 仁明天皇 承和 8년 2월 무진. 장보고는 일본과의 무역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보고는 대일무역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文聖王 2년(840) 회역사 李忠·揚圓을 大宰府에 파견하여 독자적으로 공적인 무역관계를 터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그 제의에 대하여 人臣으로서의 遣使는 舊例에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서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그들이 지참한 상품만을 교역하도록 허락하였다.136)위와 같음. 이처럼 장보고의 교역품은 양국 경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사실은 前筑前太守 文室官田麻呂가 장보고가 살해되었다(841년)는 것을 알고 장보고의 무역소에 있는 화물을 선납금 대신 차압하여 손실을 보충하려 한 것에서도 족히 알 수 있다.137)≪續日本後紀≫권 10, 仁明天皇 承和 8년 2월 을사. 그리고 장보고가 피살된 후 이충·양원이 일본 博多로 들어가자 장보고를 살해한 염장은 그의 부하 李少貞을 일본에 보내어 이충 등이 가지고 온 화물을 인도해 줄 것을 大宰府에 요청한 사실138)위와 같음.도 있었다.

 요컨대 장보고의 해상세력은 남서해안에 출몰하던 해적 소탕은 물론, 신라·당·일본을 연결하는 국제무역을 독점하여 우리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해상왕국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장보고의 해상세력 몰락에 대하여 살펴보자.

 장보고가 東亞三國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하여 해상군주로 군림하자 중앙의 왕실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139)신라 하대 호족세력의 경우가 그러했듯이 1만의 병사를 갖게 된 장보고는 일정한 지역에서 군사·행정·경제적 독립성이 유지된 세력이었다(崔根泳,≪統一新羅時代의 地方勢力硏究≫, 신서원, 1993, 137∼146쪽). 또한 청해진은 중앙 진골귀족들간의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정객들의 정치적 망명처가 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흥덕왕이 죽자(836) 均貞과 悌隆(후의 僖康王)간의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그 싸움에서 패한 균정의 아들 金祐徵이 처자와 함께 청해진으로 피신하여 장보고에게 의지하였다.140)≪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희강왕 2년. 그리고 上大等 金明(후의 민애왕)이 侍中 利弘과 함께 희강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이에 분노를 느낀 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도망갔다.

 청해진에서 김우징과 김양은 민애왕 타도를 결심한 후 장보고로부터 병력 5천명의 지원을 받아냈다. 민애왕 원년(838) 12월 김양은 청해진에서 平東將軍이 되어 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 등을 이끌고 首都 진격을 개시하여 武州 鐵冶縣에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839년 정월 19일 달구벌(대구)에서 또다시 伊湌 大昕 등이 거느린 王軍의 절반을 살해한 뒤 수도에 진입하였다. 궁궐에 난입한 김양군은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839)으로 즉위시켰다.

 이렇듯 장보고의 후원으로 왕위에 오른 김우징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感義軍使란 직함을 제수하고 食邑 2천 호를 封하여 주었다.141)≪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신무왕 원년. 그리고 신무왕이 병사(839년 7월)한 뒤 太子 慶膺이 문성왕으로 즉위하자 그는 父王 즉위의 공을 추가하여 鎭海將軍142)將軍이란 군단(幢·停)의 최고 지휘관으로 진골귀족이 독점한 무관직이다. 이 職은 급찬에서 아찬에 이르는 신분이 임명된다. 즉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임명, 청해진을 거점으로 남서해안 등 일정지역을 통어하는 장군으로 그의 직위를 높여준 것이라 하겠다.이란 직함을 제수하였다. 이로써 장보고는 명실공히 왕권과 연계된 중앙의 귀족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장보고의 운명은 그의 딸을 문성왕의 妃로 들이려는 納妃문제가 화근이 되어 끝내 살해되고 말았다.143)장보고가 살해된 해는 846년(≪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문성왕 8년)이 아닌 841년이다.≪續日本後紀≫권 11, 仁明天皇 承和 9년 정월 을사조에 “寶高는 지난해 11월 중에 死去”라 하였고,≪入唐求法巡禮行記≫ 권 4, 會昌 5년 7월 9일조에 前淸海鎭兵馬使 崔暈이 국난을 당하여 회창 5년(845) 7월에 중국 漣水의 신라방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 그리고≪新唐書≫ 신라전에 회창 연간(841∼846) 이후로 당에 장보고의 조공이 끊겼다는 기록, 또한 842년 3월 김양의 딸을 문성왕의 妃로 삼은 점 등을 종합해 보면 그는 841년에 살해되었으며, 그것은 반란으로 인한 살해가 아니라 김양의 사주로 염장에 의해 암살된 것이었다(崔根泳, 앞의 책, 141∼144쪽 참조).

 장보고가 살해된 뒤 청해진은 염장을 중심한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10여 년간 존속하다가 문성왕 13년(851) 혁파되고 그 곳 주민마저 碧骨郡(김제)으로 강제로 사천되었다. 그 어간의 정세를 보면, 장보고가 살해되자 그의 副將이었던 李昌珍은 염장을 제거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討平되어144)≪續日本後紀≫권 11, 仁明天皇 承和 9년 정월 을사. 장보고계의 상인들은 당과 일본 등지로 망명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145)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4, 會昌 5년 7월 9일.

 당시 실권을 장악한 염장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부하 이소정을 일본에 보내어 이충·양원 등이 지참한 화물을 인도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청해진을 혁파하고 그 곳 주민들까지 강제적으로 사천시킨 것은 염장 등의 신흥세력이 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장보고의 해상세력은 신라 하대사회의 지방세력 형성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고 보겠다.

<崔根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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