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1. 후삼국기의 신라

1. 후삼국기의 신라

 신라 분열의 機運은 사회적 혼란이 극치에 달했던 眞聖女王 때 표면으로 나타났다. 진성여왕의<讓位表>에서 말해주듯이 돌이킬 수 없는 ‘疵國’146)徐居正,≪東文選≫권 43.으로 변한 말기적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반란의 최초 봉기는 상주지방의 元宗과 哀奴에 의해 일어났다. 이들의 기세에 자극을 받은 지방세력가들이 각지에서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즉 北原(원주)의 梁吉, 양길의 부하가 된 弓裔, 竹州(竹山)의 箕萱, 完山(全州)의 甄萱 등이 반란군의 대표적 두목이었다.

 그 중 견훤과 궁예는 각기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면서 새로운 정권을 수립, 후백제(900)와 후고구려(901)가 등장하여 이로써 후삼국이 정립되었다. 이후 신라 景明王 2년(918) 궁예가 추방되고 申崇謙·洪儒·庾黔弼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王建은 고려를 개창한 뒤 신라(935)와 후백제(936)를 차례로 통합, 한 민족체로의 실질적인 삼국통일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후삼국이 존속한 시기는 불과 40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후삼국기 신라의 왕은 孝恭王·神德王·경명왕·景哀王·敬順王이다. 효공왕의 즉위는 진성여왕 9년(895) 10월 왕이 조카인 嶢(憲康王의 庶子)를 太子로 삼아, 왕이 죽기 전인 동왕 11년(897)에 禪位의 형식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147)太子책봉은 왕의 아들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 왕의 동생에게 하는 것이 상례 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嶢의 경우는 달랐다. 또한 嶢의 즉위(효공왕 ; 당시 15세)는 왕이 죽기도 전에 왕위를 스스로 물려 준 예로 신라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진성여왕 9년·11년). 그러면 진성여왕은 아들이 있었음에도(≪三國遺事≫권 2, 紀異 2, 眞聖女大王 居陁知) 姪男 嶢에게 선위코자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연구된 견해를 보면, ① 골품제적 원리에 따라 헌강왕의 직계에 왕위를 계승코자 한 의도(李培鎔,<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眞聖女王>,≪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85, 354쪽) ② 여왕의 자식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고 본 견해(李鍾旭,≪新羅上代 王位繼承硏究≫,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0, 157쪽) ③ 정치세력간의 대립과 타협의 결과로 본 견해(全基雄,≪羅末麗初의 文人知識層硏究≫, 釜山大 博士學位論文, 1993, 39∼44쪽) 등이 있다. 필자는 그가 신하들에게 “근년 이래로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봉기하니 이는 나의 부덕한 까닭이다”라고 밝힌 점(≪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진성여왕 11년)이나 嶢를 太子로 책봉하기 전해에 최치원이 왕에게 時務策 10여 조를 진헌한 점, 그가 10번이나 왕위에서 물러날 뜻을 표한 사실(徐居正,≪東文選≫권 33, 謝嗣位表) 등을 고려하면 자신의 失政에 대한 책임, 즉 난제를 극복하기 어려운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껴 선양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왕위를 嶢에게 넘긴 것은 설혹 자식이 있다 하더라도 私通한 情夫 魏弘과의 관계(≪三國遺事≫권 2, 紀異 2, 眞聖女大王 居陁知 참조) 등을 고려하면 자신과 왕실의 체통으로 보아 죽은 오라버니인 헌강왕의 아들에게로 돌려줌이 순리요, 명분이었을 것으로 판단한 선위로 봄이 상식이 아닐까 싶다.

 효공왕대의 시대상은 후백제·후고구려가 건국된 후 그들 세력이 날로 성장 확대되어 궁예의 세력은 죽령 동북지역까지 이르고, 견훤은 一善郡(선산) 이남의 10성을 공취하는 등 신라의 영토는 날로 줄어들어148)≪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효공왕 9년·11년·13년·14년 참조. 국력은 매우 미약했다. 당시 신라는 소백산맥 외각을 벗어나지 못한 경상도 지역만을 겨우 관장하는 소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러한 형편에 효공왕은 말년에 들어와 賤妾에 매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아 첩이 殷影에게 살해되는149)≪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효공왕 15년. 등 왕실의 권위와 체통은 회복이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효공왕은 재위 16년만에 후사가 없이 죽자 왕위는 乂兼의 義子이며 헌강왕의 사위(효공왕의 처남)인 朴景暉가 계승하였다. 신덕왕의 즉위는 8대 阿達羅의 遠孫으로 신라말 왕통의 변화를 갖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의 즉위는≪三國史記≫에 “國人에게 추대되어 즉위하였다”150)≪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신덕왕 즉위년조의 ‘國人’이란 나라 사람이란 뜻이나 실제로는 그를 지지하던 乂兼·繼康·殷影 등의 집단으로 추대의 명분을 높이기 위하여 假託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나 당시 왕위계승의 경쟁자로는 화랑출신으로 효공왕 때 侍中을 역임한 金孝宗151)≪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효공왕 6년. 景暉와 孝宗은 헌강왕의 사위. 정치적 경륜이나 경제적·군사적인 면으로 보아도 화랑출신인 효종(≪三國史記≫권 48, 列傳 8, 孝女知思 및≪三國遺事≫권 5, 孝善 9, 貧女養母條에 의하면 그는 1천여 명의 郞徒를 거느렸다)은 지위가 막강했던 인물이다.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경휘가 효종을 제치고 즉위된 배경은 곧 義父(乂兼)의 정치적 배경과 효공왕 때 시중직에서 밀려난 繼康152)繼康은 효공왕 2년 정월에 侍中에 임명되어 동왕 6년 2월 大阿湌 孝宗이 侍中에 임명되면서 물러났다(≪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효공왕 2년·6년). 등이 당시 불만세력을 포섭하여 추대한 것으로 생각된다.153)曺凡煥,<新羅末 朴氏王의 登場과 그 政治的 性格>(≪歷史學報≫129, 1991), 7∼8쪽. 그 사실은 신덕왕 원년(912) 5월 계강을 즉시 상대등으로 등용했다154)≪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신덕왕 원년.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신덕왕은 즉위 원년 5월에 죽은 예겸을 추존하여 宣聖大王이라 하고 아들 昇英을 태자로 삼았다. 이러한 사실은 곧 朴氏王統의 정통성을 사전에 대비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려 한듯 싶다. 그러나 그는 크게 한 일도 없이 후백제 견훤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재위 6년 만에 죽자 태자 승영(경명왕)이 즉위했다.

 경명왕은 왕권의 안정과 정통성 유지에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그는 즉위 원년(917) 8월에 同母弟 魏膺을 上大等으로 삼고 大阿湌 裕廉(효종의 조카이며 金傅 즉, 경순왕과는 堂弟間)을 侍中으로 등용했다. 이 점은 곧 왕권안정을 위한 김씨 세력과의 제휴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동왕 2년 一吉湌 玄昇의 반란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 상대등(金成)과 시중(彦邕)을 새로 임명한 것을 보면155)≪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명왕 2년·3년. 왕권이 불안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경명왕이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는 후백제 견훤의 침입에 대한 방어와 지방에 군림하는 호족세력들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이에 따라 고려에 사신을 파견(경명왕 4년 ; 920)하여 우호를 닦았다.156)≪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명왕 4년. 경명왕의 친고려책은 견훤을 자극시켜 920년 10월 견훤으로 하여금 步·騎兵 1만을 이끌고 大耶城을 공격·함락하고 進禮城으로 진격하게 하는157)≪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명왕 4년 및 권 50, 列傳 10, 甄萱. 등 신라 중심부를 향한 공격에 치중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견훤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경명왕은 阿湌 金律을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920년). 태조 왕건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원병함으로써 견훤은 후퇴하고 말았다. 이같은 왕건의 新羅軍援策은 후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곧 고려와 신라와의 군사동맹을 뜻하는 결과가 되어 신라는 후백제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에 위기의식을 느낀 지방의 호족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에 따라 고려와 후백제로 귀부하는 자들이 속출하는 실정이었다.158)崔根泳,≪統一新羅時代의 地方勢力硏究≫(신서원, 1993), 106∼107쪽,<표 15> 참조.

 이와 같은 사회적 혼란기에 즉위한 경애왕(魏膺 ; 경명왕의 弟)은 대외적으로는 前王의 뜻대로 즉위 원년(924)부터 고려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는 등 화친책을 쓰면서 親高麗策을 폈다.159)≪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애왕 원년·4년.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즉위 원년 10월 神宮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大赦했다. 한편 황룡사에서 百座說經을 說하고 겸하여 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친히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는160)≪三國遺事≫권 2, 紀異 2, 景哀王. 등 국민화합과 국태민안의 뜻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妃嬪과 宗戚들을 불러모아 鮑石亭에서 향연을 베풀고 놀다가 견훤의 침입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때 견훤은 효종의 아들 金傅를 왕(경순왕)으로 추대하고 왕의 동생 孝廉과 재상 英景을 포로로 붙잡아서 돌아갔다. 이리하여 3대에 걸친 朴氏王室은 단절되고 金氏王이 다시 등장하였다.

 경순왕은 견훤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견훤을 적대시하였고 고려 태조와는 친선책을 견지했다. 태조 왕건 역시 신라의 서울 金城을 방문, 수십일 동안 머물다가 갈 정도의 親新羅的 입장을 표했다. 이 때 신라인들로부터 “견훤이 왔을 때는 豺虎를 만난 것 같았으나 태조 왕건은 父母를 대함과 같다”161)≪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순왕 5년.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신라의 민심은 점차 왕건에게로 쏠리게 되어 載巖城의 장군 善弼이 고려로 귀부하자 신라 동북지대의 永安(安東郡 豊山面)·河曲(안동군 임하면)·直明(안동군 일직면)·松生(청송군 청송면) 등 30여 군현이 연이어 귀부했다. 뒤이어 명주(강릉)로부터 興禮府(울산)에 이르는 동해연안의 110여 성이 다투어 고려에 투항하니162)≪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3년 2월.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명목만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이 때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이 자진하여 고려에 귀부할 뜻을 표하여 그를 맞이한 왕건은 견훤을 尙父로 대우하고 楊州를 食邑으로 삼게 하는 등 융숭한 예우를 하였다(935년).163)≪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이렇듯 견훤의 고려 귀부로 왕건의 지위가 확고해지자 명목만을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할 뜻을 결심하고 군신회의를 열어 그 가부를 물었다. 그 때 麻衣太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오직 忠臣과 義士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 것인데 어찌 一千年社稷을 하루 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줄 것이랴”164)≪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순왕 9년.라는 반대 의견을 내었다.

 이에 경순왕은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은데 형세는 능히 온전할 수 없으니 이미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한 이 형편에 무죄한 백성만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는 바라”는 명분을 들어 스스로 고려에 항복할 뜻을 결정짓고 시랑 金封休로 하여금 항복문서를 가지고 가서 왕건에게 귀부를 청하게 하였다(935년 11월).165)위와 같음.

 항복문서를 받은 왕건은 攝侍中 王鐵 등을 보내어 경순왕의 요청에 동의하는 뜻을 전하니 경순왕은 경주를 떠나(920년 11월) 태조 왕건에 귀의함으로써 신라는 고려에 통합되고 말았다.166)왕건이 경순왕에 베푼 예우는 그가 개경에 당도하자 柳花宮에 머물게 하고 장녀 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그를 封하여 政丞으로 임명, 1년에 祿俸 1천 석을 주고 神鸞宮을 지어주고,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로 삼고 그 지역을 食邑으로 삼는 한편 그를 경주의 事審官으로 임명하였다(≪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순왕 9년 및≪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8년 을미). 이로써 왕건은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이어받는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崔根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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