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2. 후백제
  • 1) 후백제의 성립
  • (2) 후백제의 성립과정

(2) 후백제의 성립과정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후 (後)百濟國171)견훤이 칭한 정식 국호는 ‘후백제’가 아닌 ‘백제’였다.≪三國史記≫의 찬자 등 후대의 사가들이 이전의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서 ‘후’자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금석문 등 당시의 기록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을 수립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두 견훤전 등 기존의 사료에 의하면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것과 후백제를 건국한 것이 마치 동시에 일어난 사건처럼 기술되어 있다.

① 唐昭宗 景福 원년(892)은 신라 진성왕 6년이다.…이에 견훤은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西南州縣들을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호응하여 그 무리가 한달 만에 5천 인에 달하였다. 드디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라 하였지만 아직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고 칭하지 못하고 다만 ‘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行全州刺使兼禦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自署하였다(≪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② 景福 원년(892) 후백제의 견훤이 자칭 왕이라 하였다(≪三國史記≫권 31, 年表 下).

③ 眞聖王 6년(892) 完山州賊 견훤이 완산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후백제라 칭했는데 武州의 동남쪽 郡縣이 항복했다(≪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진성왕 6년).

④ 壬子(892) 처음으로 光州에 도읍을 정하였다(≪三國遺事≫권 1, 王曆 1).

 위의 4개의 기록은 후백제 건국과 관련된 각기 다른 사료이지만, 그러나 그 연대가 모두 892년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①에 의하면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이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를 점령하고는 공공연하게 稱王하지는 못하고, 대신 ‘新羅西面都統…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自署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②에 의하면 같은 해(892)에 후백제를 세우고 王을 자칭했다고 되어 있다. 한편 ③에 의하면 후백제라 칭한 곳이 完山州(全州)였다고 하였다. 반면 ④에서는 같은 해에 도읍을 정한 곳이 光州라고 하였다. 위의 네 기록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견훤은 892년 한 해에 경주의 西南州縣에서부터 반란을 일으켜서 점차 무리를 모으면서 이동하여 무진주를 점령하고 이어 완산주로 옮겨 도읍을 정한 셈이 된다. 그리고 광주에서는 아직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 못하고 ‘신라서면도통…’이라 자서한 단계였으며, 전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후백제왕이라 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백제가 성립되기까지 이러한 과정만은 크게 보아 대체로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여러 과정이 모두 892년에 서로 혼재해서 일어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견훤이 남몰래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남 주현으로 나간 일, 무진주를 습격한 일, ‘신라서면도통…’ 이라 자서한 일, 梁吉에게 裨將職을 제수한 일, 西巡하여 완산주로 이동한 일, 도읍을 정한 일, 그리고 후백제를 세우고 칭왕한 일과 심지어 設官分職한 일까지 모두 892년에 일어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개설서를 비롯한 거의 모든 연구서에 견훤의 반란으로부터 후백제의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사건이 모두 같은 해에 일어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위의 사료들을 아무런 비판없이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 데서 오는 오류이다.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후 후백제를 수립하기까지의 여러 단계는 10여 년에 걸치는 오랜 기간을 거쳐 이루어졌다. 견훤이 처음 반란을 일으킨 해는 적어도 889년 이전의 일이었으며, 889년에는 서남해 방수군을 이끌고 무진주에 들어갔다. 이 때 견훤은 아직 정식으로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다만 ‘신라서면도통…’이라고 하였다. 그 후 892년에 가서야 비로소「백제국」을 세우고 칭왕하였으며, 900년에 이르러는 광주에서 전주로 천도하여「立都·設官分職」등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던 것이다.

 후백제가 수립되기까지의 과정을 단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72)후백제 성립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은 申虎澈, 앞의 책, 35∼64쪽 참조.

 첫째, 지역적으로는 견훤이 서남해의 방수군으로 출발하여 경주의 서남 주현을 거쳐 광주 일대를 점령하였다. 광주에서 다시 내륙지역으로 북상하여 익산을 장악하고 전주로 이동하였으며, 이후 줄곧 전주를 도읍으로 해서 대내외적인 발전을 꾀하였다. 둘째, 정치적으로는 견훤이 처음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다만 ‘신라서면도통…’으로 자서하면서 신라의 지방관을 자임하였고, 그 후 군사력의 증강, 민심의 흡수 등으로 자신감이 생기자 ‘自王’의 단계로 발전하였고, 다시 전주천도 후에는 정식으로 후백제왕을 칭하게 되었다. 셋째, 시기적으로 보면 889년 이전에 견훤이 처음 반란을 일으켰으며, 889년에 광주를 점령하였는데 이 때는 ‘신라서면도통…’이라 자서하는 단계에 불과했다. 892년에 공공연하게 칭왕하였으며, 900년에 이르러 전주에 천도하고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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