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2. 후백제
  • 2) 후백제의 발전과 호족연합
  • (1) 영토의 확대

(1) 영토의 확대

 견훤은 서남해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광주를 거쳐 점차 내륙지방으로 이동하여 전주에 천도하였다. 전주 천도 이후부터 견훤은 본격적인 영토확장을 위해 전투에 들어갔는데, 후백제의 영토확장은 크게 세 방향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그 하나는 후백제의 배후지역인 서남해 일대이고, 두번째는 고려와 접경지역인 한강 상류의 충청도 내륙지역이며, 세번째는 신라와 인접한 낙동강 이동의 경상도 지역이다.

 후백제가 제일 먼저 공략에 나선 곳은 서남해 일대였다. 견훤이 전주에 천도한 직후인 901년 8월에 羅州(錦城) 남쪽의 10여 개 州縣을 공략하고 돌아왔다. 한편 궁예는 2년 후인 903년에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거느리게 하여 서해로부터 光州界에 이르러 나주를 공격하여 빼앗고 인근 10여 주현을 공략케 하였다고 한다.173)≪高麗史≫ 권 1, 世家 1, 태조 즉위전(天復 3년).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가 처음으로 나주 일대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나주 일대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견훤의 초기 세력기반이 된 곳이었다. 견훤이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나주 일대 10여 주현을 공략하게 된 것은 이 곳의 지방세력들이 이 때에 이르러 견훤을 이반했기 때문이었다. 즉 나주의 해상세력들이 왕건과 결합하여 후백제의 배후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주를 비롯한 서남해 일대의 해상세력들은 일찍부터 왕건세력과도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이 곳 토착세력들이 후백제 건국 후 견훤의 지배력이 강화되는데 대한 불만을 품고 이반하자 견훤이 제일 먼저 이곳을 공략한 것이다.174)羅州를 비롯한 영산강 하구의 서남해 일대는 일찍부터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지방세력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이 왕건의 선대세력과도 연관이 있었음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朴漢卨,<羅州道大行臺考>(≪江原史學≫ 1, 1985).
文秀鎭,<高麗建國期의 羅州세력>(≪成大史林≫4, 1987).
鄭淸柱,≪新羅末 高麗初 豪族硏究≫(全北大 博士學位論文, 1991), 167∼217쪽.
李泰鎭,<金致陽亂의 性格>(≪韓國史硏究≫17, 1977).
이후 후백제는 서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노력하였으나 이 곳 지방세력이 원래 강성하여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나주 일대의 지방세력들은 견훤과 왕건의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과 견제를 하면서 독자적인 지배권을 유지해 갔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망하였다. 나주에서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의 뜻을 전하고 이어 해로를 통해 개경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나주의 지방세력들은 후백제의 건국 초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견훤과 왕건에게 있어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

 다음으로 견훤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북부지역의 공략에 나섰다. 후백제에서는 주로 경기도 남부지역인 廣州·唐城(남양)과, 충청 북부지역인 報恩·淸州·塊壤(괴산)·忠州 일대, 그리고 충청 중서부 지역인 運州(홍성)·熊州(공주)·燕岐 일대를 연결하는 지점을 영토확장의 주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이 곳은 남한강 상류와 금강 일대의 평야지대이자 호서와 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여 이 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부지역의 공략은 918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서남해의 제해권 장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곳의 경략에는 소홀하였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때까지만 해도 이 일대의 호족세력이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곳에 대한 본격적인 공략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고려가 건국된 918년 무렵에는 중부 일대의 지방세력들 대부분은 견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수립하는 혼란한 상황에서 이 지역 호족에 대한 왕건의 영향력은 견훤의 그것에 비해 훨씬 약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호족들은 후백제와의 관계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대체로 후백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게 되었고, 고려에서는 중부지역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였다. 그러한 대책 중의 하나가 918년 8월 前侍中 金行濤를 東南道招討使知牙州諸軍事로 삼고,175)≪高麗史≫ 권 1, 世家 1, 태조 원년 8월. 이어 일년 후인 919년 8월에는 烏山城을 고쳐 禮山縣으로 삼고 大相 哀宣·洪儒를보내 유민 500여 호를 安集시키게 한 일이다.176)≪高麗史節要≫ 권 1, 태조 2년 8월. 925년 10월에는 유금필을 征西大將軍으로 삼아 후백제 영향권에 있던 燕山鎭과 任存郡을 공략케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6개월 후인 926년 4월에는 견훤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熊津으로 진군하였다. 그 결과 웅주·운주 등 충남 일대의 10여 개 주현뿐 아니라 본래부터 궁예의 강력한 세력권이었던 충북 일대까지 점차 후백제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고려군의 반격이 부분적으로 있긴 하였지만, 대체적으로 昧谷縣(회인)·燕山鎭(문의)·三年城(보은) 등 청주에서 가까운 지역까지 견훤이 지배하게 되었다.

 930년 이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후백제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77)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930년 정월에 있었던 古昌전투이다. 그 해 8월 고려는 天安에 도독부를 설치하였고, 같은 달 왕건이 청주에 행차하여 羅城을 쌓음으로써 이 일대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 그 전초기지를 마련하였다. 특히 932년 6월에 昧谷城의 성주이자 장군인 龔直이 고려에 귀부하였는데 이는 후백제에 커다란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공직은 일찍부터 견훤의 心腹이 된 인물이며 매곡성은 후백제의 가장 강력한 북방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178)공직에 대해서는 申虎澈,<新羅末·高麗初 昧谷城 將軍 龔直>(≪湖西文化硏究≫10, 忠北大, 1992) 참조. 공직의 고려 귀부를 계기로 그 동안 후백제의 지배영역이었던 중북부 일대가 반대로 고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공직이 귀부한 바로 다음달인 7월에는 왕건 자신이 一牟山城(문의)의 정벌에 나섰고, 이어 2년 후인 934년에는 웅주 이북의 30여 성이 스스로 귀부하였는데 이것은 공직의 귀부가 미친 직접적인 결과였다.

 끝으로 견훤정부가 경상도 일대에서 지배권을 장악하고자 한 곳은 위로는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그 이남과 아래로는 낙동강의 하류에 이르는 지역이 그 대상이 되었다. 특히 尙州·古昌·義城·眞寶城·曹物城 등 경상 북부지역과 高鬱府·進禮郡·淸道 등 경주와 인접한 지역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견훤은 특히 이 곳의 지배에 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 곳에서의 전투는 앞의 두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전투 규모도 대부분 견훤이 직접 나서서 전투를 지휘하는 전력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 곳에서의 첫 전투는 상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견훤은 906년 처음으로 3천 명의 군사를 이끈 왕건과 沙火鎭에서 대결하였으나 패하였다. 이 때는 궁예가 개경에서 철원으로 환도한 지 1년 후였다. 그런데 당시 상주는 매우 특이한 곳이었다. 잘 알려진 사실로 진성여왕 3년(889) 沙伐州에서 元宗과 哀奴가 반란을 일으켜 전국적인 농민 봉기의 서단을 열었고, 견훤의 父인 아자개가 장군이 된 곳도 바로 사불성이었다. 이 곳은 鳥嶺과 竹嶺 등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경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낙동강 상류 지역의 중심권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 곳을 지배하게 되면 고려와 신라와의 통로를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므로 견훤은 일찍부터 상주·고창·의성 등 경상 북부지역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906년 상주에서 궁예정권과의 충돌은 바로 이와 같은 양국의 이해가 맞부딪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그 후에도 경상 일대에서의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920년 10월 견훤은 직접 大良(陜川)·九史(초계)를 공취하고 이어 진례군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 그가 이끈 1만의 기병도 대단한 숫자이지만,179)견훤군의 통상 병력은 대개 2∼3천 명이었다. 1만의 기병은 보통 병력의 4, 5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특기할 만 한 것은 이로 인해 신라가 고려에 처음으로 원병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이며, 신라와 고려가 서로 동맹을 맺고 후백제에 대항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이후에도 견훤은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여러 차례 전투에 나섰다. 즉 924년 7월과 925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물성을 공략한 것을 비롯, 925년 12월에는 거창 등 20여 성을 공취하였고, 이어 927년 9월에는 近品城과 경주와 근접한 高鬱府까지 쳐서 빼앗았다. 그리고 경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하였다.

 이 때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이 원병을 이끌고 내려오다 견훤군과 公山桐藪에서 대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곳 전투에서도 견훤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고려의 장군 申崇謙과 金樂이 전사하였고 왕건은 單騎로 겨우 도망하여 살았다. 927년 11월에는 大木郡(若木)을 공취하였고 이어 벽진군을 공격하여 고려의 장군 索相이 전사하였다. 928년 5월에는 康州(晉州)를 습격하여 장군 有文의 항복을 받았으며, 11월에는 오어곡성(군위)을 공격하여 고려군 1천 명을 죽이고 장군 陽志·明式 등 6인의 항복을 받았다. 929년에는 견훤이 갑병 5천 명을 거느리고 義城을 공격하여 洪術이 전사하였다. 이 때 왕건이 “나의 左右手를 잃었다”고 애통해 한 것을 보면 의성의 함락과 홍술의 전사가 고려에 커다란 타격을 준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이어 견훤군은 順州城을 공격하였는데 장군 元奉은 도주하고 말았다. 그리고 929년 12월에는 고창군을 포위하였다. 이처럼 929년말까지 후백제와 고려와의 전투에서 후백제의 군사력은 고려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는 갑자기 역전되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930년 정월의 古昌에서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견훤과 왕건이 직접 대결하여 견훤군의 대패로 끝났다. 후백제의 侍郞 金渥은 생포되고 8천여 명이 전사했으며 견훤은 패주하고 말았다. 고창전투의 패배로 말미암아 주변 호족들은 대거 왕건측으로 기울었다. 이를 계기로 永安(永川)·河谷(河陽)·直明(安東)·松生(靑松) 등 30여 군현이 고려에 來降하였고,180)≪高麗史節要≫ 권 1, 태조 13년 정월. 다음달인 2월에는 溟州(江陵)에서 興禮府(安東)에 이르기까지 110여 성이 고려에 항복하였다고 한다.181)≪高麗史節要≫ 권 1, 태조 13년 2월. 고창전투의 영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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