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2. 후백제
  • 3) 후백제의 대외정책
  • (3) 대중국·일본정책

가. 대중국외교

 후삼국기 중국과의 외교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唐이 멸망한 후 五代의 혼란한 시기로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국 과의 관계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189)신라말 고려초의 대중관계를 다룬 연구는 다음과 같다.
李基白,<高麗初期에 있어서의 五代와의 관계>(≪韓國文化硏究院論叢≫1, 1960 ;≪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2).
金庠基,<新羅末에 있어서의 地方群雄의 對中통교>(≪黃義敦古稀紀念論叢≫, 1960 ;≪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74).
金在滿,<五代와 後三國·高麗初期의 關係史>(≪大東文化硏究≫17, 1983).
日野開三郞,<羅末三國の鼎立と對大陸海上交通貿易>(≪朝鮮學報≫16·17·19·20, 1960·1961).
후삼국 중에서도 특히 견훤 이 중국과의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후백제는 吳越과 後唐, 북쪽의 거란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견훤은 특히 오월과 일찍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견훤이 오월왕에게 사신을 파견한 것은 기록상으로는 900년이 처음이다.190)≪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900년은 후백제가 전주로 천도하여 본격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던 해였다. 견훤이 이 때 오월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전주천도의 사실을 전하고 오월왕으로부터 이를 공인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에 대해 오월왕은 보빙사를 파견하여 견훤에게 ‘檢校大保’의 직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견훤의 지위가 중국으로부터 공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런데 견훤이 오월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전에도 이미 오월과 사신교환이 있었다. 900년 오월왕이 보빙사를 보내면서 ‘검교태보의 직을 加授하고 다른 직은 전과 같이 하였다’라고 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견훤이 오월에 처음 사신을 파견한 것은 892년 경으로 추측된다. 견훤은 892년 광주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신라서면도통…’이라고 했는데, 이 때 견훤은 오월왕으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제수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918년 8월에도 견훤은 오월에 사신을 보냈다.191)위와 같음. 그 목적은 당시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사정을 오월에 알리는 등 신생 고려와의 대중국 외교에서 우선권을 잡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927년 12월에는 오월국의 사신 班尙書가 후백제에 와서 고려와의 화해를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하였다. 이는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제거한 지 3개월 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오월왕의 서신은 후백제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었고, 아마도 견훤측의 외교정책의 소산이라고 생각된다. 즉 견훤은 경주 침공 후 고려측의 반발을 오월왕의 서신을 통해 무마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192)이 때 吳越王이 견훤과 왕건에게 각각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서신을 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오월왕은 견훤을 통하여 왕건에게 서신을 전달한 것이 옳다. 후백제·고려·오월 삼국간의 외교관계를 짐작케 해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처럼 견훤은 일찍부터 오월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특히 892년의 무진주 도읍과 칭왕, 900년의 전주천도와 국가체제 정비, 918년의 고려 건국, 927년의 경주 침공과 경애왕 살해 등 국내외의 중요한 정치적 변수가 있을 때마다 오월과의 외교를 통해서 이를 해결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자신의 지위를 공인받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한편 후백제는 후당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후당과의 외교기록은 두 차례 보이는데, 925년 12월과 936년 정월에 각각 후당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193)≪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冊府元龜≫권 972, 外臣部, 朝貢 5, 淸泰 3년 정월
≪五代史≫권 7, 後晉, 天福 원년 정월.
기록상으로는 925년이 처음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후당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892년 견훤이 무진주에 도읍을 정하면서 오월과 함께 후당에게도 사신을 보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후당이 925년 견훤에게 사신을 보내 “檢校大尉兼侍中判百濟軍事의 관직을 제수하고 그 밖의 持節都督…食邑二千五百戶의 직은 이전과 같이 하였다”고 하였는데, 후당이 이전에 제수했다고 하는 ‘지절도독’운운의 직함은 견훤이 892년 자서했다고 한 직함과 그 내용이 같기 때문이다. 한편 936년 정월 후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견훤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신검이 한 일이었다. 신검정권에서 후당에 사신을 보낸 목적은 후백제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 신검이 그 사실을 후당에 알리고 아울러 자신의 지위를 후당으로부터 공인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후백제는 거란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927년 거란왕은 裟姑·馬拙 등 35인의 사신을 후백제에 파견·來聘했다고 한다.194)≪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35인에 달하는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거란에서는 후백제와 친선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전에 거란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낙타와 말 등을 바친 것과 같이195)≪高麗史≫ 권 1, 世家 1, 태조 5년 2월. 많은 물건을 보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견훤은 중국과의 외교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오월과의 외교가 그 중심이 되었다. 특히 오월이나 후당으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국내에서의 권위를 강화하고 나아가 후삼국간의 관계에서도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생각된다. 결국 후백제의 대중국정책은 정치·외교적인 목적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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