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2. 후백제
  • 4) 후백제의 몰락
  • (1) 신검 형제의 정변

(1) 신검 형제의 정변

 후백제는 군사적인 면에서 고려와 신라를 압도하고 있었고 대외정책적인 면에서도 오월이나 후당과의 외교를 통해 그 지위를 인정받는 등 유리한 국면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930년 정월 고창전투에서 왕건군에게 패한 후 전세는 역전되어 급격히 쇠퇴하였고 주변의 호족들도 다투어 후백제를 이반함에 따라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다. 이처럼 갑자기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후백제의 정치적 혼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견훤전에 의하면 그 정치적 혼란은 견훤 자식들간에 있었던 왕위쟁탈전에서 비롯된 것으로 되어 있다. 견훤은 여러 아들 중 넷째인 金剛을 사랑한 나머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이에 長子인 神劍과 2·3子인 良劍·龍劍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 때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와 무주에 도독으로 나가 있었는데 伊粲 能奐이 이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4子인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金山佛宇에 유폐시킨 후 신검을 왕위에 추대하였다.

 그러나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은 3개월 만에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였고, 이어 후백제 내에 있던 견훤의 사위 박영규도 이에 내응하여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견훤과 박영규의 도움을 얻게 된 고려측은 936년 신검군과 황산에서 결전을 벌여 승리하였다. 신검·양검·용검 3형제는 항복하였고 곧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이처럼 후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신검 3형제와 금강 사이의 왕위쟁탈전을 둘러싼 내분에서 비롯되었고, 거기에 견훤과 朴英規가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급진전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후백제 멸망의 원인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견훤이 금강을 편애한 데서 온 형제간의 알력에만 초점을 둔 지극히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설명에 불과할 뿐 견훤이 금강을 편애한 이유, 즉 왕위를 물려 주고자 한 이유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신검·양검·용검의 3형제를 제쳐두고 금강이 견훤의 후계자로 등장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야말로 후백제의 지배세력을 둘러싼 권력쟁탈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약 반세기 동안이나 존속하였던 후백제의 지배세력은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집단들로 구성되었을 것이고, 그들간에 권력의 핵심을 둘러싸고 상호 대립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신검 3형제와 금강간의 싸움도 다만 견훤의 금강에 대한 편애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이들 형제를 둘러싼 서로 다른 정치 지배세력의 존재라든가 그 세력을 구성하였던 인물들간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후백제 내의 이러한 대립은 이미 930년의 고창전투 이전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후백제는 930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전라·충청 전지역과 경상 북부일대를 지배하에 두면서 신라와 고려를 크게 압박하고 있었다. 즉 927년에는 신라의 경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폐위시키고 대신 경순왕을 옹립하여 견훤의 괴뢰정부를 수립하였고 이에 반발하는 고려를 公山桐藪에서 대파시킴으로써 왕건은 겨우 單騎로 도망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는 후백제가 보은·회인·청주·공주·홍성 등 충청 일대와 합천·초계·의성·약목·벽진·거창 등 낙동강 일대를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930년 정월 고창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는 경상 일대에서는 영천·하양·안동·청송 등 30여 군현을, 충청 일대에서는 청주·보은·홍성 등 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고려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1, 2년 만에 갑자기 이루어진 변화였다.

 이처럼 930년을 고비로 하여 갑자기 상황이 역전된 이유를 단순히 고창전투의 패배라고 하는 군사적인 측면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이유는 후백제의 내분으로 여겨진다. 후백제의 내분은 930년을 전후하여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정변으로 표출된 것이 935년으로 생각된다.≪삼국유사≫ 견훤전에는 견훤과 신검 형제들간에 대고려전의 대립을 암시해 주고 있는 기록이 보인다. 즉 견훤이 왕건에게 귀부할 의사를 비치자, 신검·양검·용검 3형제가 모두 이에 불응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200)이러한 내용은≪三國史記≫ 견훤전에만 보이고,≪三國遺事≫ 견훤전이나≪高麗史≫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신검이 정변을 일으킨 후에 발표한「敎書」에 의하면 견훤이 초기에는 “뛰어난 무용과 지모로 그 功業이 거의 중흥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智慮가 一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갑자기 ‘智慮一失’ 하게 된 이면에는 “간신이 권세를 농락하여 (견훤을) 昏暗과 迷惑에 빠지게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견훤이 갑자기 ‘지려일실’ 했다고 하는 것은 930년 이후의 상황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권세를 농락하던 소위 간신들이란 바로 금강을 왕위에 추대하고자 한 세력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당시 전투에 나가 활약하던 신검을 비롯하여 양검·용검의 3형제를 제쳐두고 나이 어린 금강을 내세워 견훤의 후계자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신검 형제들로 하여금 불만을 초래하게 하였고 결국 정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금강이 왕위에 추대된 이유를≪삼국사기≫ 견훤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즉 “넷째 아들 금강은 키가 크고 智略이 많아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해 주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실정을 옳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금강은 당시까지만 해도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신검이 935년 반란을 일으킨 후 즉위하여 내린 敎書에 의하면 금강을 가리켜 ‘幼子’ 또는 ‘頑童’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신검정변이 있기 10여 년전인 924년에는 신검과 양검은 曹物城전투에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고, 또 양검과 용검은 군사요충지인 康州(진주)와 武州(광주)의 도독으로 나가 있었다.201)≪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7년 7월.
이들 3형제의 나이는 적어도 20세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12년 후인 935년 10월 금강을 ‘幼子’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연소한 어린아이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신검 3형제와 금강은 적어도 20년 정도의 나이차가 있었다고 생각되며, 금강이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아 그를 왕위에 추대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아 좋을 것이다.

 금강이 왕위에 추대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견훤에게 여러 명의 부인과 자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견훤은 광주와 전주에서 지방 호족세력과 결합하기 위해 정책적인 통혼을 했고, 그 결과 후백제 내에는 여러 외척세력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결국 신검·양검·용검 3형제와 금강은 서로 母系를 달리하는 이복형제간이며, 신검 3형제와 금강간의 왕위쟁탈전도 이들 두 외척집단간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신검 3형제와 금강이 이복형제였을 것이라는 점은 신검 3형제는 모두 성장한 어른이었던 데 비해 금강은 이들과 20년 정도 나이차가 있었다는 사실과, 신검 3형제와 금강이 그들의 이름에서도 차이가 나는 점에서 알 수 있다.202)신검·양검·용검은 모두 ‘劍’자가 들어 있어 후백제 초기 고려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던 자신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데 비하여, 金剛은 불교적 색채가 강한 이름을 갖고 있다. 이는 견훤 말기 견훤의 불교사상과도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신검·양검·용검은 모두 후백제 초기 즉 광주정부 시절에 출생한 아들이었던 데 비하여 금강은 전주로 천도한 후에 새로 맞아들인 부인의 소생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신검 3형제의 외척세력은 광주정부 시절 견훤이 맞아들였던 ‘光州 北村의 富人女’의 집안으로 여겨지며, 금강의 외척세력은 전주천도 후 그 곳 지방세력과 결합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혼인한 전주 일대의 호족세력으로 추측된다.

 특히 신검 3형제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신검이 반란을 일으킨 직후에 내린 교서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중 견훤의 업적을 평가한 부분이 특히 주목된다. 즉 견훤이 초기에는 무용과 지모가 특출하여 백제를 크게 중흥시키게 되었는데 후에 가서는 간사한 신하들이 권세를 잡고 견훤을 昏暗과 迷惑에 빠뜨렸기 때문에 갑자기 금강을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후백제의 정치적 추이와 비교해 볼 때 대체로 사실과 부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지적한 대로 후백제는 930년 이전까지는 군사적으로 크게 우세하여 고려와 신라전에서 계속 승리하였고 주변의 호족세력들도 다투어 후백제에 내속되고 있었다. 교서에서 “백제를 중흥시키는 공업을 이룩하였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930년 고창전투의 패배 이후 전세는 역전되어 갔는데, 그 이유를 위의 교서에서는 견훤이 주위의 세력들에 의해 혼암과 미혹에 빠진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어린아이에 불과하였던 금강에게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는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으며, 새로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금강의 외척세력―신검의 교서에 의하면 ‘권세를 농락한 간신’들―이 그를 옹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신검과 금강과의 대립은 신검 3형제를 중심으로 한 그의 외척세력과 930년 이후 새롭게 대두된 정치세력, 즉 금강의 외척세력간의 권력쟁탈전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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