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3. 태봉
  • 1) 궁예의 출신과 사회적 진출

1) 궁예의 출신과 사회적 진출

  205)이하의 서술은 趙仁成,≪泰封의 弓裔政權 硏究≫(西江大 博士學位論文, 1991), 7∼30쪽에 주로 의지하였다.

 ≪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傳을 보면 궁예는 憲安王 혹은 景文王의 아들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자마자 부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乳婢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206)이 절과 관련된 자료는≪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傳과 권 11, 新羅本紀 11, 진성여왕조에 실려 있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이 자료에 나오는 기사를 인용할 경우에는 전거를 밝히지 않겠다. 이 점에서 궁예는 신라의 왕자 출신으로 아마도 정권다툼에 희생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207)李基白,≪韓國史新論(新修版)≫(一潮閣, 1991), 142쪽. 궁예가 헌안왕과 경문왕 중 누구의 아들인가를 밝히려는 연구로는 申虎澈,<弓裔의 政治的 性格―특히 佛敎와의 관계를 中心으로―>(≪韓國學報≫29, 1982), 33∼36쪽과 鄭淸柱,<弓裔와 豪族勢力>(≪全北史學≫10, 全北大, 1986), 2∼7쪽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궁예의 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설이 있다는 점, 그가 구사일생 하게 된 경위가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점 등을 염두에 두면 그가 과연 왕자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208)洪淳昶,<變革期의 政治와 宗敎―後三國時代를 中心으로―>(≪人文硏究≫2, 嶺南大, 1982), 227∼228쪽.
崔圭成,<弓裔政權의 性格과 國號의 變更>(≪論文集≫19, 祥明女大, 1987), 289∼290쪽.

 궁예와 더불어 후삼국시대를 이끌었던 甄萱은 眞興王의 5대손이었다고 하고,209)≪三國遺事≫권 2, 紀異 2, 後百濟 甄萱條에 인용된≪李碑家記≫. 王建의 시조 虎景은 聖骨將軍을 칭하였다고 한다.210)≪高麗史≫, 高麗世系에 인용된 金寬毅의≪編年通錄≫. 하지만 그들 누구도 실제로 신라 왕실과 혈연이 닿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궁예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그러하지 않았지만, 신라 왕실과의 혈연상의 연결을 도모하였다고 여겨 좋지 않을까. 단 견훤이나 왕건이 자신들을 중고시대 신라 왕실의 먼 후손으로 꾸몄던 점에 비해 궁예만이 바로 앞 시대의 왕들과 자신을 연결시켰으리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호족 출신이었던 견훤이나 왕건과는 달리 궁예가 중앙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음을 시사한다고 믿어진다. 왕실을 제외하고 중앙의 유력한 가문을 생각한다면 眞骨貴族의 가문을 떠올리게 된다. 이에 궁예가 진골귀족 출신이었을 것으로 본다.

 진골귀족 출신이었다고 하여도 궁예가 성장하였던 곳은 경주가 아닌 듯하다. 그는 낙향한 진골귀족이었던 셈이다. 한편 궁예가 비록 낙향한 진골귀족이었을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승려였다고는 하지만, 호족세력이나 사원세력 등을 배경으로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승려생활을 그만두고 竹州(安城·龍仁)의 세력가 箕萱의 부하가 되었던 궁예는 기훤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우울하여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만약 궁예가 호족세력이나 사원세력 등을 이끌고 있었거나 그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면 기훤이 그를 푸대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궁예로서도 기훤이 자신을 무시하였다고 하여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궁예의 가문은 이미 몰락하였던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진골귀족 가문의 몰락이 정치적 사건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문은 아마 정권의 장악을 둘러싸고 벌어진 진골귀족들 사이의 투쟁에서 패함으로써 몰락하게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궁예가 정권 다툼에서 패배하여 몰락한 진골귀족 출신이었다면 그는 자연 반신라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는 몰락하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을 진골귀족으로서의 특권과 권위를 회복하려고 하는 집념을 품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궁예는 일찍부터 신라를 타도하고 자신이 지배하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꿈꾸었을 것으로 헤아려지는 것이다.211)鄭淸柱, 앞의 글, 28∼29쪽 참고.

 궁예는 소년시절 寧越의 世達寺212)세달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申虎澈, 앞의 글, 37쪽 및 鄭淸柱, 위의 글, 8쪽 참조.에 출가함으로써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잘 알려진 바이지만 건국 후 궁예는 彌勒佛을 자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20여 권의 경전을 저술하고 강설도 하였다고 한다. 그 경전이나 강설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궁예가 미륵불을 자칭하였다면 적어도 거기에는 자신이 하생한 미륵불이며, 자신의 치세가 미륵불이 하생한 이상세계임을 주장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궁예가 그러한 내용의 경전을 쓰고, 강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불교 전반 특히 미륵신앙에 대하여 정통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궁예가 세달사에서 승려생활을 하였던 사실과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궁예의 미륵신앙과 관련하여 그보다 약 50년 정도 앞서 활동하였던 세달사의 승려 調信이 溟州에서 미륵신앙과 관련을 맺었음이 주목된다.213)조신에 대해서는≪三國遺事≫권 3, 塔像 4,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條 참조. 洛山寺의 觀音菩薩像 앞에서 金昕의 딸과 맺어지기를 기원하였던 조신은 꿈에서나마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에 시달리다가 15세 된 큰 아들이 굶어 죽자 명주 蟹縣嶺에 묻었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조신이 그 곳을 파보니 돌미륵이 나와 그것을 인근의 절에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승려 궁예의 활동 범위는 영월을 중심으로 하여 太白山脈을 넘어 동해안에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 같다. 궁예는 北原(原州)의 세력가 梁吉의 명에 따라 북원의 동부지역과 酒泉(寧越)·奈城(영월)·鬱烏(平昌)·御珍(蔚珍) 등을 비롯한 명주 관내의 여러 군현을 정복하였던 일이 있다. 이처럼 양길이 궁예에게 위의 여러 지역의 정복을 맡겼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그 곳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조신의 예에서 보듯이 궁예도 명주에서 미륵신앙을 접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미륵신앙은 크게 太賢系와 眞表系로 나누어 파악되고 있다.214)金南允,<新羅 中代 法相宗의 成立과 信仰>(≪韓國史論≫11, 서울大, 1984), 141∼146쪽. 그 중 진표는 명주에서 戒法을 설하고, 金剛山에 鉢淵藪를 열고 7년 동안 거주하였다215)이하 진표의 행적에 대해서는≪三國遺事≫권 4, 義解 5, 關東楓岳鉢淵藪石記條에 의거함.. 그 때 그는 흉년으로 인하여 굶주렸던 명주 일대의 백성들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진표가 설한 계법을 저마다 받들었고, 그로 인해 굶어 죽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때 발연수를 떠났던 진표는 그 만년을 다시 발연수에서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명주 일대의 주민들을 상대로 한 진표의 교화가 대체로 성공적이었을 것이라는 점, 진표 이후에도 명주 지역에는 그의 미륵신앙이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궁예가 명주에서 접하였을 미륵신앙은 진표 이래의 그것이었음직하다.216)궁예와 진표의 미륵신앙을 연결시켜 이해하였던 논자는 李基白이었다(<眞表의 彌勒信仰>,≪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274∼276쪽. 특히 274쪽의 주 16 참조). 한편 궁예를 태현계 미륵신앙과 관련짓는 견해도 있다(金杜珍,<高麗 初의 法相宗과 그 思想>,≪韓㳓劤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性相融會’思想 成立의 思想的 背景―高麗初의 法相宗과 그 思想―>,≪均如華嚴思想硏究≫, 一潮閣, 1983, 117∼118쪽).

 진표는 미륵보살로부터 그의 뼈로 된 簡子를 받았으며, 미륵보살은 그가 現身의 육체를 버리고 大國王의 몸을 받으리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진표가 미륵보살의 대행자로 현세에서 이상국가를 만들려고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217)李基白, 위의 책, 271쪽. 그런데 이 진표의 소망에는 종교적 혹은 정신적으로 百濟를 부활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으며, 그가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반신라적 이상국가의 건설을 꿈꾸었다는 지적이 주목된다.218)李基白, 위의 책, 274∼276쪽.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궁예는 신라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점에서 궁예와 진표의 희망은, 현실과 종교라는 차이는 있지만, 서로 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진표의 미륵신앙은 주로 지방의 농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219)金南允, 앞의 글, 135·147쪽.
李基白, 위의 책, 272∼273쪽.
궁예가 호족세력이나 사원세력의 후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궁예는 진표의 미륵신앙을 이용하여 반신라적인 농민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은 아닐까. 궁예는 이미 대국왕이자 미륵불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궁예가 승려생활에 언제까지나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壯年이 된 후 궁예는 僧律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기상이 활발하고 膽氣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일반 승려의 그것과 크게 다르거니와, 이는 이제 궁예가 현실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891년 궁예는 드디어 세달사를 떠나 기훤에게 투신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대두하고 있었던 호족들이나 眞聖女王 3년(889)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던 농민봉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던 신라정부를 보면서 궁예는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였던 듯하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호족세력이나 사원세력으로부터 이렇다 할 후원을 받을 수 없었을 궁예로서는 우선 기훤과 같은 기왕의 세력가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가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훤의 푸대접을 받았던 궁예가 그 밑에서 자신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궁예가 그러한 기회를 얻었던 것은 892년 기훤을 떠나 양길의 부하가 된 이후였다고 여겨진다. 양길의 명에 따라 성공적으로 정복활동을 수행하였던 궁예는 양길의 신임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궁예가 양길의 부장으로 만족할 수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궁예는 894년 6백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원으로부터 명주에 들어갔다. 이는 양길의 명에 따른 것일 터이지만, 그 때 궁예가 將軍을 자칭하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라 하대에는 대호족들이 장군을 자칭하였다. 그렇다면 궁예는 양길로부터 얻은 병력을 기반으로 하여 독립을 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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