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3. 태봉
  • 2) 후고구려의 건국
  • (2) 건국―호족들과의 제휴

(2) 건국―호족들과의 제휴

 궁예에게 귀부한 패서호족으로 우선 平州(平山)의 朴遲胤 가문을 들 수 있다.245)이하 박지윤 가문에 관한 사실은<朴景仁墓誌>(≪朝鮮金石總覽≫上), 303쪽 및
<朴景山墓誌銘>(≪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68), 143쪽에 의함. 그 가문의 사회적 진출과 궁예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鄭淸柱,<新羅末 高麗初 豪族의 形成과 變化에 대한 一考―平山 朴氏의 一家門의 實例 檢討―>(≪歷史學報≫118, 1988), 3∼15쪽 참조.
그 아버지 朴直胤은 신라말 大毛達이었다고 한다. 대모달은 고구려의 장군직명인 大模達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라의 장군에 견주어 볼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신라 정부에서 박직윤을 대모달에 임명하였을 리는 없다. 그는 대모달을 자칭하였을 것이다. 신라 하대 대호족들이 장군을 자칭하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박직윤은 평주의 대호족으로서 패서 지역의 13군현246)李基東,<新羅 下代의 浿江鎭>(≪韓國學報≫4, 1976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韓國硏究院, 1980, 212∼216쪽).을 거점으로 대두한 호족들에게 상당한 지배력을 행사하였으리라는 점, 그의 아들 박지윤도 역시 그러하였으리라는 점 등을 짐작할 수 있다.247)이상과 관련하여서는 金光洙,<高麗建國期의 浿西豪族과 對女眞關係>(≪史叢≫21·22, 1977), 138∼139쪽 참조. 그리고 박지윤이 궁예에게 귀부함248)鄭淸柱, 앞의 글(1988), 12쪽.에 따라 패서 지역의 다른 호족들도 궁예에게 귀부하였을 것으로 보아 좋을 듯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패서호족들의 귀부는 일차적으로 궁예의 병력이 많고 강함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박지윤은 궁예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자신의 세력권에 대한 기득권을 최대한 보장받으려는 목적에서 궁예에게 귀부하였다고 할 수 있다.249)河炫綱,<高麗建國의 經緯와 그 性格>(≪韓國中世史硏究≫, 一潮閣, 1988), 25쪽. 하지만 대호족이었던 박지윤의 귀부를 그렇게 간단히 취급할 수는 없다. 그가 귀부하였던 것은 궁예와의 결합을 통해 얻고자 하는 더 큰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지윤은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그의 할아버지인 赤烏는 신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박직윤 이래 평주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본래 중앙의 귀족가문이었으나 박직윤대에 평주에 낙향하였던 것이다. 낙향하게 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가 중앙관리로서 출세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였을 것임은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박직윤은 반신라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박직윤이 대모달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패서 지역에서 대모달과 같은 고구려 직명이 통할 수 있었음을 일러준다.250)金光洙, 앞의 글, 139쪽. 나아가 그 지역 주민들의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들이었으리라는 점, 당시까지도 그들이 고구려의 문물제도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 등을 시사한다. 요컨대 패서 지역의 주민들 중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박직윤이 장군이 아니라 하필 대모달을 칭하였던 것은 그가 고구려의 재건을 내세우면서 이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을 지배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닐까.251)鄭淸柱, 앞의 글(1988), 10쪽. 그리고 그 아들 박지윤도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비록 그들이 견훤이나 궁예처럼 백제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걸고 건국은 하지 못하였지만, 그 先驅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처럼 반신라적인 나아가 고구려를 재건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기미마저 보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박지윤에게 있어 패서 지역에 대한 기득권의 유지라는 것은 그가 궁예에게 걸었던 최소한의 기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지윤은 궁예와 제휴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나아가 새로운 국가의 지배세력으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박지윤을 따라 궁예에게 귀부하였던 다른 패서호족들도 이에 준하여 생각해서 좋을 줄 안다.

 한편 박지윤은 상당한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또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박지윤과 그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었을 패서호족들은 浿江鎭의 군사조직에 기대어 성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252)李基東, 앞의 책, 216∼220쪽. 그렇다면 비록 궁예가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도 상당한 손실이 예상되는 박지윤을 비롯한 패서호족들과의 무력 대결을 바람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과의 제휴를 원하였을 법하다. 신라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보다 확고한 군사적 기반을 필요로 하였을 궁예였음을 생각하면 이는 그럼직하게 여겨진다.

 패서호족들이 궁예에게 귀부할 즈음인 896년 松岳(開城)의 王隆(왕건의 父, 원명 龍建, 후에 世祖)이 귀부하였다. 귀부 당시 왕륭은 沙粲이었다고 한다. 사찬은 본래 중앙의 관등이었지만, 신라 하대에 上村主 혹은 第二村主가 사용하였던 예가 있다. 고려초에는 호족 휘하의 상급 촌주들이 이를 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왕륭이 郡을 들어 궁예에게 귀부하였다는 것은 당시 그가 송악군 전체를 대표하는 상촌주였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그것은 상촌주 왕륭이 송악군의 향배을 결정할 수 있었음을 일러 주기도 한다. 이에 비록 왕륭이 상촌주였지만, 이미 송악군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를 호족에 버금가는 존재로 취급하여 좋을 줄 안다.253)李基東, 위의 책, 227∼228쪽 참고. 그렇다면 왕건 가문의 호족적 기반은 그리 강한 것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왕건가를 후원하고 우대하였던 듯하다. 가령 궁예는 왕륭의 설득에 따라 송악에 勃禦塹城을 쌓도록 하고 그 성주에 왕건을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왕건가의 송악군에 대한 지배권이 보다 확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귀부 당시 호족에 준하는 지위를 갖고 있었던 왕건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송악의 호족으로서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이 궁예가 호족적인 기반이 약한 왕건가를 후원하고 우대하였던 것은 궁예가 그들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왕건가는 그 선대로부터 해상무역에 종사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상당한 富를 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궁예가 왕건가를 우대하였던 것은 특히 그들의 경제력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고자 함이었다고 이해된다.254)朴漢卨,<後三國의 成立>(≪한국사≫3, 국사편찬위원회, 1976), 635쪽.

 군사적 기반이 강하였던 평주의 대호족 박지윤을 비롯한 패서호족들과 상당한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왕건가와 제휴하였던 궁예는 898년 철원을 떠나 송악으로 천도하였다. 송악이 왕건가의 본거지라는 점이나 그 배후에 바로 평주가 위치한다는 점 등이 눈길을 끈다. 즉 궁예가 박지윤과 왕건가와의 결합을 공고히 하여 그들의 군사적·경제적 기반을 활용하려고 천도를 결정하였던 것으로 헤아려 볼 수 있다. 송악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899년 궁예는 북원을 중심으로 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양길과 겨뤄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는 궁예의 송악 천도가 성과를 거두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양길을 격파함에 따라 그 이듬해(900) 궁예는 남쪽으로 영역을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廣州와 唐城(南陽)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궁예는 한강 하류 유역을 확보하고, 나아가 서해 활동의 기반을 다짐으로써 해상으로부터 후백제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南漢江 유역의 요지인 國原(忠州)과 인근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후삼국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255)이상과 관련하여서는 河炫綱, 앞의 글, 27쪽 참고. 그러므로 900년 정복활동의 성공적 수행은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256)≪三國遺事≫권 1, 王曆 1, 後高麗 弓裔. 원래 국명은 고려였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고구려라고 한다.를 세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거니와, 이 역시 궁예가 송악 천도를 통해 박지윤과 왕건가와의 결합을 보다 공고히 하여 그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충분히 이용한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처음 미륵신앙을 내세워 하층농민을 포섭하여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던 궁예였지만, 그러나 호족들과의 제휴를 통해 건국하게 되었다. 미륵하생의 이상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염원만으로는 또 그것만을 지닌 농민들을 이끌고서는 국가를 건설한다던가 혹은 운영한다던가 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궁예정권은 호족연합정권으로서 출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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