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3. 태봉
  • 3) 마진과 태봉의 중앙정치조직
  • (1) 광평성체제의 성립과 호족연합정권-마진

(1) 광평성체제의 성립과 호족연합정권-마진

 궁예는 896년 철원을 도읍으로 정하였을 무렵 나라를 열고 임금을 칭할 수 있겠다고 자부하면서 처음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었다고 한다. 이후 계속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가령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이후 정치조직이 보다 짜임새 있게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궁예는 904년에「百官」을 두고 국호를 摩震, 연호를 武泰로 하였다고 한다.258)이하 마진의 중앙정치조직에 관한 사실은≪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효공왕·권 40 職官志 下 및 권 50, 列傳 10, 弓裔傳에서 찾을 수 있다. 廣評省과 兵部를 비롯한 여러 관부가 이 때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전하고있다. 하지만 904년에 처음으로 두었다고 명시되어 있는 광평성이나, 비록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는 없지만, 그 외 몇몇 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개 896년 이래 필요에 따라 설치되어 왔던 것들로 짐작된다. 아마도 904년에 그것들 간의 담당 업무나 서열 등이 조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광평성에 장관인 匡治奈와 徐事·外書의 관원을 두었다고 하므로, 병부 이하 다른 관부들의 관직체계도 이 때 정비되고, 관원도 충원되었을 것이다. 904년에 관리들의 위계를 나타내는 관등이 정비된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궁예가 중앙정치조직의 정비를 일단락지었던 것은 바로 904년이었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여러 관부들 중 최고 관부는 광평성이었다. 뿐만 아니라 광평성은 그 설치 당시부터 적어도 한동안은 정치적 권력의 핵심에 해당하였다고 여겨진다. 이에 904년에 이루어진 중앙정치조직 정비를 광평성체제의 성립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부들은 신라의 그것들을 모방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각 관부들을 고려의 그것들과 맞추어 놓았다. 그를 토대로 만들어 본 것이<표 1>이다.259)마진의 관부와 신라 관부와의 비교는 주로 李泰鎭이 작성한<표>를 참조하였다(<高麗 宰府의 成立―그 制度史的 考察―>,≪歷史學報≫56, 1972, 5쪽).
고려 관부의 ‘所管業務’는≪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에 의거함.

新 羅 摩 震 高 麗
官 府 序 列/官 府 官 府 所 管 業 務
  (1) 廣評省    
兵 部 (2) 兵 部 (兵 部) 掌武選·軍務·儀衛·郵驛之政
倉 部 (3) 大龍部 倉 部 掌戶口·貢賦·錢粮之政
禮 部 (4) 壽春部 禮 部 掌禮儀·祭享·朝會·交聘·學校·科擧之政
領客府 (5) 奉賓部 禮賓省 掌賓客燕亭
左·右理方府 (6) 義刑臺 刑 部 掌法律·詞訟·詳讞之政
(7) 納貨府 大府寺 掌財貨廩藏
調 府 (8) 調位府 三 司 掌摠中外錢穀出納會計之務
(9) 內奉省    
(10) 禁書省 秘書省 掌經籍祝疏
例作府 (11) 南相壇 將作監 掌土木營繕
船 府 (12) 水 壇 水 部 掌山澤·工匠·營造之事
詳文師 (13) 元鳳省 翰林院 掌制撰詞命
乘 府 (14) 飛龍省 太僕寺 掌輿馬廐牧
物藏典 (15) 物藏省 小府監 掌工技寶藏
(16) 史 臺
  (掌習諸譯語)
   
(17) 植貨府
  (掌裁植菓樹)
   
(18) 障繕府
  (掌修理城隍)
   
(19) 珠淘省
  (掌造成器物)
   

<표 1>摩震과 新羅·高麗 官府의 對比

 광평성은 서열 제1위의 행정관부였다. 이 점에서 광평성은 신라의 執事部에 대응한다. 泰封代나 고려초 광평성의 장관이었던 시중도 집사부의 시중에서 비롯된 명칭일 것이다.260)李泰鎭, 앞의 글, 4쪽.
邊太燮,<高麗初期의 政治制度>(≪韓㳓劤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一潮閣, 1981), 169∼170쪽.

 한편 광평성의 장관 광치나는 고려의 侍中에 대응하는 것으로 註記되어 있다. 그에 따른다면 광평성은 內史門下省(中書門下省)에 해당하는 관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소속된 宰臣들이 국정을 논의 결정하였던 내사문하성은 門閥貴族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이었으므로 그것은 진골귀족의 이익을 대변하였던 和白과 통한다고 여겨진다. 이 점에서 광평성은 신라 화백의 전통을 이은 관부였다고도 볼 수 있다.261)李基白,<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18∼20쪽.

 이처럼 광평성이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 면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신라 하대의 執事省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중대 전제왕권을 지지하는 역할을 하였던 집사부는 하대에 들어와 진골귀족 세력과 연결되고 있었다. 즉 집사성은 국왕 밑의 행정관부였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오히려 화백과 통하는 면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평성을 신라 하대의 집사성에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262)이상과 관련하여서는 李基東,<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中世的 側近政治의 志向―>(≪歷史學報≫77, 1978 ; 앞의 책, 244∼246쪽) 참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901년 후고구려 건국과 함께 출범한 궁예정권은 호족연합정권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광평성체제가 성립되었던 904년 당시 궁예정권은 여전히 호족연합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호족들과 제휴함으로써 건국할 수 있었던 궁예가 그 후 불과 3년 만에 호족세력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왕권을 신장시키기는 어려웠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광평성은 호족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구로서 설치되었고, 적어도 한동안은 그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던 궁예의 노력이 광평성체제에 일정하게 반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내봉성의 경우가 참고된다. 내봉성은 都省 곧 御事都省(尙書都省)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기되어 있다. 어사도성은 選官(吏部)·兵官(兵部)·民官(戶部)·刑官(刑部)·禮官(禮部)·工官(工部)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병부·대룡부·의형대·수춘부·수단 등은 선관을 제외한 병관 이하의 여러 관부에 각각 해당한다(<표 1>). 따라서 내봉성을 어사도성에 비겼던 것은 내봉성이 人事를 담당하는 기구였기 때문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내봉성은 신라의 位和府에 해당하는 관부였던 것이 된다.263)이와 관련하여서는 李泰鎭, 앞의 글, 9쪽 및 32∼33쪽 참고. 그런데 내봉성에 대해서는 신라의 집사부에 비기는 견해(李基白, 앞의 글, 20∼21쪽)를 비롯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출된 바 있다.

 여기서 내봉성의 이름이 국왕의 측근에서 명령을 받드는 관부였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즉 내봉성은 궁예의 측근에서 그의 인사 명령을 받드는 관부였던 셈이다. 이처럼 인사를 담당하였던 내봉성이 궁예의 近侍機構였다는 점은 인사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던 궁예의 의도가 반영되었던 결과가 아닐까. 광평성의 설치로 호족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하였던 궁예가 그 반대급부로서 인사권을 차지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던 궁예의 의도와 관련하여서는 원봉성과 물장성의 경우도 참고된다. 원봉성과 물장성은 신라의 상문사(후의 翰林臺·瑞書院)와 물장전의 후신으로 여겨진다(<표 1>). 그런데 상문사와 물장전은 宮內府라고 할 수 있는 內省과 御龍省에 소속된 관부였다.264)三池賢一,<新羅內廷官制考>(上)(≪朝鮮學報≫61, 1971), 1쪽 및 22∼32쪽 참고. 이 점에서 상문사와 물장전은 집사부나 병부 등과는 그 格을 같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반면 마진에서는 원봉성과 물장성이 병부 등 다른 관부들과 같이 병렬되어 있다. 이는 그것들이 독립된 관부로 격상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궁내부 소속의 관부들은 국왕 직속이었다. 따라서 그것들이 광평성체제에서 독립된 관부로 격상되었다는 것은 광평성체제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던 궁예의 의도를 일러주는 것으로 보아 무방하지 않을까. 신라의 궁내부 계통의 각 관부가 정비되는 것이 중대에 있어서의 왕권강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는 점265)三池賢一, 위의 글(下)(≪朝鮮學報≫62, 1972), 59쪽.을 고려하거나 경문왕대를 전후하여 왕권이 강화되면서 文翰機構가 확장되었던 사실266)李基東, 앞의 책, 241∼244쪽 및 262∼263쪽.과 원봉성의 독립과 격상을 연관지어 볼 적에 이는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광평성체제 성립 당시 왕권이 호족세력을 압도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왕권강화를 위한 궁예의 노력이 아직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가령 내봉성의 서열이 겨우 9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표 1>)에서 그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궁예가 내봉성을 통하여 인사권을 장악하려고 하였지만 그에 대한 호족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고, 그 결과 내봉성의 서열이 9위에 그쳤던 것이라고 헤아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던 궁예의 의도가 광평성체제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호족연합정권을 뒷받침하는 중앙정치조직이었다고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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