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3. 태봉
  • 3) 마진과 태봉의 중앙정치조직
  • (2) 광평성체제의 변화와 전제왕권―태봉

(2) 광평성체제의 변화와 전제왕권―태봉

 904년 성립된 광평성체제는 그 이후 재정비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그 전모를 알려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918) 6월 신유조에 나오는 인사발령을 통하여 어느 정도 그 변화의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인사 조치는 왕건이 즉위한 지 6일 만에 나온 것으로, 거기에는 904년 이후로부터 태봉이 몰락한 918년까지의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을 정리한 것이<표 2>이며, 이를 성립 당시의 광평성체제와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첫째 904년 이후 새롭게 설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관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순군부의 경우<표 1>에는 나오지 않지만<표 2>에서는 찾을 수 있다. 그런데<표 2>를 보면 광평낭중에 임명된 신일과 임식, 내봉경에 임명된 능준은 전 순군부 관리였다. 따라서 순군부는 904년 이후 왕건 즉위 이전의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267)李泰鎭, 앞의 글, 8쪽 주 16. 진각성과 內軍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268)邊太燮, 앞의 글, 158쪽.

序列/官府 長 官 次 官 下 級 職
1) 廣評省 侍中(韓粲 金行濤) 侍郞(閼粲 林積璵) 郞中(前徇軍部郞中
   韓粲 申一)
  (前徇軍部郞中
   韓粲 林寔)
員外郞(前廣評史 國鉉)
2) 內奉省 令(韓粲 黔剛) 卿(前守徇軍部卿 能駿)
 (倉部卿 權寔)
監(前廣評郞中 康允珩)
理決(前廣評史 倪言)
評察(內奉史 曲矜會)
郞中(前內奉史 劉吉權)
3) 徇軍部 令(韓粲 林明弼)    
4) 兵 部 令(波珍粲 林曦) 卿(閼粲 金堙)
 (閼粲 英俊)
 
5) 倉 部 令(蘇判 陳原) 卿(閼粲 崔汶)
 (閼粲 堅術)
 
6) 義刑臺 令(韓粲 閻萇)    
7) 都航司 令(韓粲 歸評) 卿(林湘煖)  
8) 物藏省 令(韓粲 孫逈) 卿(姚仁暉) (香南)  
9) 內泉部 令(蘇判 秦勁)    
10) 珍閣省 令(波珍粲 秦靖)    
11) 白書省   卿(一吉粲 朴仁遠)
 (一吉粲 金言規)
 
12) 內 軍   卿(能惠)
 (曦弼)
 

<표 2>太祖 원년(918) 6월 辛酉의 人事發令

 둘째, 관부의 서열이 일부 변하기도 하였다.<표 2>를 보면 내봉성이 제2위로, 순군부가 제3위로, 병부가 제4위로 되어 있어<표 1>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변화는 정변을 주도한 세력의 계획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표 2>에 나오는 관부들이 왕건 즉위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상과 같은 서열의 변화도 904년 이후 918년 이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셋째, 각 관부 소속의 관직도 늘어났던 듯하다.<표 2>에 내봉감에 임명되었다고 나오는 강윤형은 전 광평낭중이었으며, 광평원외랑 국현·내봉이결 예언은 전 광평사였다. 광평성 설치 당시 고려의 시랑과 원외랑에 해당하는 서사와 외서가 설치되었을 뿐 낭중과 사에 해당하는 관직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낭중과 사는 904년 이후에 새로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여겨 진다. 이로써 다른 관부의 관직도 늘어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넷째, 기왕의 관부 명칭이 바뀐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표 2>를 보면 창부경 권식이 내군경에 임명되었다. 창부는<표 1>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새로 설치되었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도<표 1>의 대룡부를 개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항사도 수단의 개명일 것이다.269)李基白, 앞의 글, 21쪽.

 지금으로서는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은 변화가 언제 일어났는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대략 911년을 전후한 시기로 잡아 보려고 한다. 904년 국호를 후고구려에서 마진으로 바꿈과 더불어 성립된 광평성체제가 911년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할 즈음에 재정비되어 고려초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광평성체제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먼저 관부 명칭의 변경이 주목된다. 가령 신라의 진각성은 穢宮典을 개명한 관부로서 이른바 漢化政策이 추진되었던 경덕왕대와 9세기 중엽에 사용되었던 명칭이다.270)≪三國史記≫권 39, 志 8, 職官 中 및 권 11, 新羅本紀 11, 문성왕 15년 8월.
한화정책에 대해서는 李基白,<新羅 惠恭王代의 政治的 變革>(≪社會科學≫2, 1958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244∼247쪽) 및 李基東, 앞의 책, 235∼237쪽 참고.
비록 광평성체제의 진각성은 태봉대에 새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로 미루어 위에서 언급한 대룡부에서 창부로, 수단에서 도항사로의 변화를 한식 개명이었던 것으로 보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신라시대의 한화정책이 왕권강화를 촉진하려는 경향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광평성체제의 변화는 태봉대에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으로 서열의 변화와 관직의 증가와 관련하여서는 내봉성이 주목된다. 우선 광평성체제가 성립할 당시 서열 제9위였던 내봉성이 제2위의 관부가 되었다는 것은 그 정치적 비중이 커졌음을 뜻한다. 궁예는 내봉성을 통해 본격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것은 곧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앞의<표 2>를 보면 내봉성의 장·차관인 령과 경 밑의 하위관직으로 감·이결·평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봉성의 하급관직에 그것들 외에 사가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외랑이나 낭중 등도 있었을 법한데, 이는 내봉원외랑에서 내봉낭중으로 승진하였던 允珩의 예271)≪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을축.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내봉성의 하급관직은 낭중 계통과 감 계통으로 나누어지는 셈이다. 그 중 다른 관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낭중·원외랑·사는 내봉성의 인사 업무를 맡아 처리하였던 관직으로 보인다. 반면 감·이결·평찰 등은 인사와는 다른 특수한 업무를 맡았던 관직인 것 같다.

 후자와 유사한 명칭을 신라의 內司正典에서 찾을 수 있어 흥미롭다. 이결과 평찰은 내사정전의 議決과 貞察에 각각 대비해 볼 수 있다.272)≪三國史記≫권 39, 志 8, 職官 中.
邊太燮, 앞의 글, 171쪽, 주 56.
그렇다면 이결·평찰의 임무를 관리들에 대한 감찰로 볼 수는 없을까. 그리고 감도 역시 감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좋지 않을까 한다.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내봉성은 이제 사정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며, 내봉성의 格上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본래의 인사 기능 외에 사정 기능이 추가되었다는 것과도 무관할 수 없으리라고 짐작된다. 이에 감·이결·평찰 등은 광평성체제가 변화하면서 새로 설치된 것이며, 그것은 궁예가 관리들에 대한 자신의 통제를 보다 강화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헤아려본다.273)감·이결·평찰이 인사의 공정을 위하여 설치되었다고 여기는 견해(李泰鎭, 앞의 글, 9쪽)와 내부 행정의 감독을 맡았으리라는 견해(邊太燮, 위의 글, 170∼171쪽)도 있다.

 <표 1>을 보면 광평성체제 성립 당시 군사 문제를 담당하였던 관부로는 병부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태봉대에는 순군부와 내군이 새로 두어졌다. 그 중 순군부는 병부보다 중요시되기까지 하였다.<표 2>에 드러나 있듯이 순군부는 서열 제3위, 병부는 서열 제4위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어떠한 배경에서 설치되었을까.

 광평성체제 성립 당시의 병부는 신라의 병부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신라의 병부는 신라가 본격적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던 법흥왕 때 설치되었다. 이는 그것이 일반적인 군사 업무 즉 軍政 외에도 軍令을 담당하는 관부로 두어졌던 것임을 시사한다. 마진의 병부도 본래는 그러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도 이른바 후삼국이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군부는 兵權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고 한다.274)≪高麗史≫권 127, 列傳 40, 桓宣吉. 여기에서의 병권이란 군사지휘권 즉 군령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275)李基白,<高麗京軍考>(≪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一潮閣, 1956 ;≪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55쪽). 순군부가 병권(군령권)을 맡았던 관부라는 견해는 대체로 인정되고 있지만, 이와 달리 순군부를 후삼국시대의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大本營의 성격을 지닌 관부라는 견해(黃善榮,≪高麗初期 王權硏究≫, 東亞大 出版部, 1988, 135∼137쪽)와 국왕의 명에 따라 병력의 징발과 동원을 담당한 관부였다는 견해(鄭景鉉,<高麗初期 京軍의 統帥體系―徇軍部의 兵權에 대한 再解釋을 겸하여―>,≪韓國學報≫62, 1991, 43∼52쪽) 등도 있다. 결국 궁예는 광평성체제를 개편하면서 병부로부터 군령권을 분리하여 순군부로 하여금 맡도록 한 셈이 된다.276)李基白, 위의 책, 51쪽.

 당시가 戰時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순군부 신설과 관련하여 일단 군사적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전쟁수행을 위해서는 군령만을 전담하는 기구를 둘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순군부의 서열이 병부에 앞섰던 것은 이를 시사한다.

 한편 효율적인 지휘는 지휘권의 강화를 가져올 것이다. 이 점에서 순군부는 최고지휘관으로서의 궁예의 지휘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진 때에도 출전 명령권 등 군의 최고지휘권은 궁예에게 속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 호족연합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궁예의 지휘권 강화라는 것은 결국 왕권의 강화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하여 좋지 않을까. 순군부를 통하여 궁예는 군부에 대한 보다 효과적이고 강력한 통제를 행할 수 있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나아가 순군부의 설치는 병부가 군사적 권한을 독점함으로써 야기될 수도 있는 왕권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도 짐작된다.

 내군은 친위군으로서 궁예의 신변 경호를 맡았을 것이다.277)李基白, 위의 책, 55∼56쪽. 그런데 내군장군 犭犬鈇는 참소를 자행하여 자주 죄없는 사람들에게 죄를 씌웠다고 한다. 은부가 궁예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나 그가 군인이었다는 점 따위를 고려하면 은부가 하였다는 참소나 모략이란 그가 군 내부의 반역 움직임을 적발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278)은부에 대해서는≪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임술조와≪高麗史節要≫권 1, 태조 원년 6월조 참조. 결국 내군의 설치는 군부를 보다 강력하게 통제하려고 하였던 궁예의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파악되며, 이 점에서 그것은 순군부의 설치와 그 성격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태봉대 광평성체제의 변화를 궁예의 왕권강화와 연결지어 검토하였거니와, 이에 따라 호족세력의 대표였다고 여겨지는 광평성 시중의 정치적 지위가 낮아졌으리라는 예상을 하게 된다. 가령 913년 시중이 된 왕건은 「衆心」을 얻고자 힘썼다고 한다.279)이하의 사실에 대해서는≪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즉위전조 참조. 이는 그가 시중으로서 호족들의 이해를 두루 대변하려고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阿志泰의 참소 사건을 해결한 후 따르는 자들이 많자 왕건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戰線으로 나가기를 원했고, 914년 궁예는 그를 시중에서 해임하여 다시 수군을 맡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는 수군 장수가 적에게 두려움을 줄 수 없다는 궁예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그보다는 호족들의 대표자로서 활동하고자 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던 왕건을 호족들과 격리시키려는 궁예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헤아려 보는 것이다. 요컨대 궁예는 이제 시중이 행정 실무자로서 자신에게 충성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왕건의 해임에서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러한 자신의 바램에 어긋날 경우 시중을 교체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왕권이 신장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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