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3. 태봉
  • 4) 태봉의 몰락
  • (2) 반궁예세력의 동향과 918년 정변

(2) 반궁예세력의 동향과 918년 정변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지지하였던 세력은 오히려 소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는 궁예와 그에게 충성하는 측근 인물들에 의해 유지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는 정치적 진출을 기대하였을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궁예세력의 구체적인 움직임과 관련하여 915년 궁예가 부인과 두 아들을 살해한 후 의심이 많아지고 화를 잘내어 여러 신하들은 물론 심지어 백성들까지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우선 궁예가 부인은 물론 두 아들을 죽여야 했던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였을까.

 부인 康氏는 궁예가 ‘非法’을 많이 행하여 왔음에 대하여 ‘正色을 하고’ 간언하였다고 한다. 강씨의 간언의 대상이 되었던 궁예의 ‘비법’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궁예가 미륵불을 자칭하였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따라서 강씨는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비판하는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표명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그에 대해 궁예는 부인 강씨를 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청광보살·신광보살이라고 하여 자신과 함께 신격화시켰던 두 아들도 죽였다. 궁예가 자신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부인과 심지어 두 아들까지 살해하였을 것으로는 좀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특히 두 아들이 모두 어렸다는 점이나 그들 중 한 사람이 이미 太子로 책봉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부인 강씨가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던 배후에는 그를 반대하는 모종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조금 더 추리하여 본다면 강씨로 대표되는 반궁예세력이 두 아들을 내세워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에 도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그로 말미암아 강씨는 물론 두 아들까지도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에 부인 강씨 사건에 연관되었음직한 세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더듬어 보면서 그를 통하여 반궁예세력의 동향을 검토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선 박유가 떠오른다.292)박유에 대해서는≪高麗史≫권 92, 列傳 5, 朴儒傳에 의거하였음. 그는 궁예의 정치가 문란하였기 때문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東宮記室이 그의 최종 관직이었다고 보이므로, 박유의 은퇴는 궁예의 태자 살해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직하다. 아마 그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강씨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유는 유학자였다. 그러한 그가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에 찬성하기는 애당초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태봉대에 활약하였던 유학자들 대부분도 그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掌奏였던 최응이 궁예로부터 모반의 혐의를 받았던 왕건을 구해 주었던 것이나, 文人 宋含弘 등이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를 예언하였다는 古鏡의 글을 거짓 해석하였다는 일화는 모두 이를 알려 주는 것이라고 본다.

 한편 승려들도 강씨 사건에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가령 궁예의 강설을 비난하였다가 철퇴를 맞고 죽었다는 釋聰의 경우에서 그를 짐작할 수있다. 그런데 그는 진표의 法弟子 중의 한 사람으로 진표의 가사와 간자를 왕건에게 전해주었다는 釋冲과 동일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93)申虎澈, 앞의 글, 49∼50쪽. 만약 그렇다면 진표의 미륵신앙에 기반을 두었던 궁예의 미륵신앙은 이제 진표의 제자들로부터도 배척받았던 셈이 된다. 이 점에서 석총의 비난은 궁예에 대한 불교계의 반발이 보다 광범위한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逈微의 죽음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선종 승려로서 소위 海東의 四無畏大士 중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던 그는 917년 궁예에게 죽임을 당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 석총과 비슷한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던 것같다.

 궁예와 부인 강씨의 결혼이 정치적 고려를 무시하고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강씨는 호족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왕건이 집권한 후 강씨 성을 갖고 활약하였던 인물들은 대개 信川 강씨로 알려져 있다.294)李樹健,≪韓國中世社會史硏究≫(一潮閣, 1984), 171∼172 쪽. 아마도 부인 강씨는 신천의 호족 출신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강씨의 중요한 배후세력은 바로 그들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尹瑄에게 생각이 미치게 된다.295)≪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附 尹瑄. 그는 패서 지역에 속했던 鹽州의 호족 출신으로 여겨진다. 윤선은 궁예 말년에 궁예로부터 禍를 입을까 두려워 망명하였다고 한다. 이는 윤선이 부인 강씨 사건에 연루되었거나 그렇지는 않았더라도 궁예로부터 반궁예세력이라는 혐의를 받았음을 일러준다. 그런데 이미 검토한 바와 같이 궁예는 건국함에 있어 패서호족들로부터 힘입은 바 컸다. 그리고 그들이 궁예에게 협력하였던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고자 함에서였다. 하지만 궁예가 904년 철원으로 환도를 단행하고, 청주세력을 끌어들임에 따라 패서호족들의 영향력은 감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296)洪承基, 앞의 글, 75∼76쪽.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패서호족들이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에 찬성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을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부인 강씨의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그를 계기로 반궁예세력에 대한 일대 숙청이 단행되었으리라는 점, 그것이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으리라는 점 등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부인과 아들을 살해한 후 궁예가 의심이 많아지고, 급하게 노하게 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살해하였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정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궁예의 감시와 숙청은 일단 반궁예세력의 조직적인 결집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왕건은 洪儒 등의 政變 참가 제의에 소극적인 태도를 나타내었다.297)≪高麗史節要≫권 1, 태조 즉위전. 이는 그가 정변의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음을 말해 주거니와, 궁예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반궁예세력을 계획적으로 모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였고, 왕건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정변이 일어나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 호응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홍유 등의 정변 모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자들이라는 흔적은 찾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궁예의 감시와 숙청은 오히려 반궁예세력을 확산시키고, 그들의 반궁예적인 성향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듯하다. 918년 홍유 등이 주동한 정변이 일어나자 ‘國人’들이 그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으며, 만여 인은 궁문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298)위와 같음. 즉 그들은 반궁예세력이었으며 또한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에 반대하였던 여러 세력이 정변을 계기로 그들의 힘을 결집시켜 정변이 성공할 수 있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태봉이 몰락하게 된 원인이 모두 설명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예가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졌던 것은 왜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918년 정변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에 관해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1등공신으로 포상을 받은 홍유 등은 정변의 주모자였다. 그들 이외에 왕건을 추대한 공으로 馬軍將軍이 되었고, 그의 신임을 얻어 그의 경호를 담당하였던 桓宣吉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다. 단 그는 모반을 꾀하다가 죽었으므로 1등공신에서 빠졌을 것이다.299)환선길과 그의 동생 향식에 대해서는≪高麗史≫127, 列傳 40, 桓宣吉傳 참조. 다음 2등공신으로는 堅權 등 7인이 있다. 환선길의 동생 香寔도 이들에 준하여 볼 수 있다. 이들은 적극 가담자였다고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주모자들과 적극 가담자에 관해 정리한 것이 다음<표 3>과<표 4>이다.300)<표 3>과<표 4>는≪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경명왕·권 50, 列傳 10, 弓裔 및≪高麗史≫世家·列傳 및≪高麗史節要≫등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政變 以前의 經歷 政變 直後의 官職(階)
洪 儒 義城府人,
弓裔末年 騎將
將軍
太祖 元年   大相
   元年 7月 馬軍將軍
裵玄慶 慶州人, 膽力過人 起行伍
弓裔末年 騎將
將軍
太祖 元年 7月 馬軍將軍
申崇謙 光海州人, 長大 有武勇
弓裔末年 騎將
將軍
太祖 元年 9月 馬軍將軍
卜智謙 沔川人,
弓裔末年 騎將
將軍
太祖 元年 9月 馬軍將軍
桓宣吉 才力過人 士卒服從 太祖 元年   馬軍將軍

<표 3>918년 政變의 主謀者

人 名 政 變 後 의 活 動 狀 況
堅 權 921년 騎兵을 이끌고 達姑狄 격파
能 寔 태조 원년 7월 壬申 廣評郞中에서 徇軍郞中으로 轉職
權 愼  
廉 湘 태조 원년 6월 庚申 馬軍大將軍
金 樂 태조 10년(927) 7월 戊午 元甫, 9월 大將
連 珠 태조 19년(936) 9월 元甫로 馬軍지휘

<표 4>918년 政變의 적극 가담자

 <표 3>을 보면 환선길을 제외한 홍유 등 주모자들은 정변 당시 騎將 혹은 장군이었으며, 정변 후에는 모두 마군장군이었다. 정변 당시 그들은 마군의 지휘관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환선길이 정변 후 마군장군이 되었음을 보면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표 4>에 나오는 견권 등 2등공신들은, 능식을 제외하면, 정변 당시 대체로 무신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졍변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들 중 廉湘은 林春吉 모반사건을 처리할 때 마군대장군으로 나오므로 이전부터 마군을 지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견권이나 연주가 기병과 마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들도 일찍부터 마군과 연관을 맺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과 같이 정변의 주도자들이나 적극 가담자들은 대부분 마군의 지휘관들이었거나 그와 연관을 맺고 있었다.301)鄭淸柱,≪新羅末·高麗初 豪族硏究≫(全北大 博士學位論文, 1991), 144∼152쪽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찾을 수 있다.

 한편 배현경은 남보다 뛰어난 담력으로 인하여 행오에서부터 입신하였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기초로 하여 일반 병졸에서 기장(장군)으로까지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문적인 군인 출신이었다. 그리고 배현경의 예로 미루어 볼 때 신숭겸도 장대한 신체적 조건과 무용을 활용하여 기장에 이르렀던 전문적인 군인 출신이었을 것이다. 환선길도 남보다 뛰어난「재력」를 바탕으로 출세하였던 전문적인 군인 출신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세 사람의 경우에 비추어 홍유와 복지겸도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뿐만 아니라 적극 가담자들의 대부분이 마군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을 주모자들과 같은 전문적인 군인 출신이었다고 보아도 괜찮을 듯하다.302)정변을 주도한 자들이 대체로 호족적 배경을 지니고 있지 않았음은 이미 河炫綱이 언급한 바가 있으며(河炫綱, 앞의 글, 31∼32쪽), 鄭淸柱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鄭淸柱, 위의 글, 145∼50쪽).

 그런데 마군은 전투부대 중 핵심적인 부대였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문적인 군인출신들은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지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홍유를 비롯한 정변의 주모자들이나 적극 가담자들도 본래는 궁예의 지지세력이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이제 궁예가 정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던 까닭이 어느 정도 드러나지 않았는가 한다. 즉 이전에는 그의 지지세력이었던 전문적인 군인출신들의 일부가 등을 돌림으로써 궁예로서는 정변을 예방하거나 그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이들과 함께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지지하였던 것으로 파악되는 청주세력의 동향이다.

 사실 청주출신이라고 하여 한결같이 궁예를 지지하였던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청주세력 내의 여러 세력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청주세력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가령 청주인 아지태는 궁예에게 기대어 같은 청주인이었던 笠全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로 인해 여러 해 동안 곤경에 빠져 있었던 입전 등은 시중 왕건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아지태의 참소사건을 계기로 입전 등은 반궁예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303)金周成,<高麗初 淸州地方의 豪族>(≪韓國史硏究≫61·62, 1988), 166∼172쪽 참조. 또 청주인의 반란을 우려한 궁예가 尹全 등 군인 80여 인을 처벌하였던 일도 있다.304)≪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무오. 윤전 등은 청주출신으로서 그들은 반궁예적인 성향의 인물이었음직하다. 왕건이 즉위한 후의 일이지만 淸州領軍將軍 堅金이 金勤謙·寬駿·金言規 등 재경청주인들을 제거할 것을 요청하자 태조는 그들이 918년 정변에서 자신을 도와 활약하였음을 들어 거절하였던 사실이 있다.305)≪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附 堅金. 이상의 몇 예에서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지지하였던 청주세력의 일부도 반궁예세력으로 돌아섰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문적인 군인 출신들 일부에 더하여 청주세력의 일부가 궁예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궁예는 정변을 막을 수 없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306)洪承基는 918년 정변이 기본적으로 친위쿠데타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시도한 바 있다(洪承基,<高麗 太祖 王建의 執權>,≪震檀學報≫71·72, 1991).

<趙仁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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