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1. 유교사상의 변화
  • 1) 유교사상의 발달

1) 유교사상의 발달

 통일신라의 유교사상은 무열왕계 왕권의 전제정치 확립과정에서 발달하였다. 하대에도 계승되어 元聖王 때 讀書出身科의 실시(788년)307)李基白,<新羅骨品制下의 儒敎的政治理念>(≪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226쪽.나「5廟制의 변화」등 유교정치이념의 구현을 꾀한 사례를 볼 수 있다.308)신라 五廟制의 성격에 대해서 邊太燮은 시조(미추왕)로, 다시 직계조상신으로 바뀌는 과정으로 풀이하였으며, 특히 神宮의 의미를 骨에서 族으로의 변화로 파악한 바 있다(邊太燮,<廟制의 變遷을 통하여 본 新羅社會의 변천과정>,≪歷史敎育≫8, 1964, 59∼66쪽). 그러나 崔光植은 신궁의 주신을 天地神으로 간주하였으며, 사상적 통일에 따른 국가의식의 성장으로 파악하고 있다(崔光植,≪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205∼213쪽).

 유교정치가 왕권의 전제화를 확립하는 데 기틀을 마련하였지만, 그러나 전제정치는 율령정치라는 틀 속에서 이룩된 것이며 왕의「도덕적 행위」라는 명분과 君臣간의 합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 자신도 道德政治 규범 속에 얽매인 결과가 되어 도덕정치 규범에 대한 반성이 잇따라 스스로 겸양지덕으로 禪讓의 조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즉 宣德王은

과인(선덕왕)은 본래 본성에 덕이 없어 大寶(왕위)에 뜻이 없었으나 추대를 벗어나지 못해 왕위에 올랐을 뿐이다. 즉위 이래로 모든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민생이 곤궁에 빠졌으니, 이는 모두 자신의 부덕으로 백성들의 여망에 부합치 못한 것이며 정치가 천심에 벗어난 것이다. 이에 항상 왕위를 선양하고 밖으로 退居하려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매번 정성껏 말림으로써 여의치 못하고 이 지경(중병)에 이른 것이다(≪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선덕왕 6년 정월).

라 하여「부덕의 소치」로 讓位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왕의 정치반성은 眞聖女王 때에도 있어 당시의 도덕정치의 풍조를 엿볼 수 있다.309)≪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진성여왕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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