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2) 선종의 흥륭
  • (2) 선종 유행의 사회적 기반

가. 선종의 대두

 불타의 교리는「禪」과「敎」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느 시기에 누군가에 의해 특징적으로 포용되면서, 敎가 강조되기도 하고 禪이 중요시되기도 하였다. 선종은 靈山 설법에서 석가가 말없이 꽃을 들자 迦葉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기원하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 때문에 佛心宗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達磨가 그것을 전한 뒤 惠能·神秀 등에 의하여 선양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禪的인 사고는 일찍부터 있었다. 元曉는 모든 현상이 마음 작용임을 깨달았다.372)元曉가 西學하기 위해 가던 중 비를 만나 길가의 토굴로 피해 쉬면서 해골 바가지의 물을 먹었다. 그날 저녁 그 곳이 무덤인 줄을 몰랐을 때에는 편히 잠들었으나, 다음날 그것을 알고부터는 귀신을 보았으며 구토증이 일어났다. 곧 원효는 모든 것이 마음 작용이라 하여 유학을 포기하였다. 그것은 곧 선과 통하는 것이지만, 정작 선종의 유행은 신라 하대에 가서야 가능해졌다.

 선종은「不立文字」과「見性悟道」를 내세운다.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자기 내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外息諸緣」즉 밖으로 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고 깊숙한 山間에 파묻혀 수행하는, 이른바 坐禪을 행한다. 절대적인 불타에 귀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불성의 개발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 성향을 지녀, 중앙정부의 거추장스런 간섭을 배제하면서 지방에 웅거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호족의 의식 구조와 부합하게 되었다.373)金杜珍,<朗慧와 그의 禪思想>(≪歷史學報≫57, 1973), 44∼46쪽. 신라 하대 선종의 유행은 지방호족이 대두된 사회상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신라 중대 무열왕계가 의도한 전제정치는 귀족세력의 반발을 받으면서 점차 실패로 기울게 되었다. 혜공왕대가 되면 族長으로 생각될 수 있는 96角干이 서로 다투는 속에, 왕은 난중에 살해되고 전국이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 왕위를 차지하려는 권력쟁탈전에서 패배한 중앙 귀족이 지방의 연고지에 내려와 지방호족이 되었다. 이들이 落鄕豪族이다.

 한편 신라 중대 이래로 村의 長에 불과한 村主들이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꾸준히 그 지위를 향상시켜 왔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그들은 하나 내지 수개의 성을 다스리는 지방호족 세력으로 성장하여 城主나 將軍으로 자처하였다. 이들이 土着豪族이다. 그 외에 海上貿易으로 富를 축적한 軍鎭勢力이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지방에서 강한 기반을 가졌을 뿐 아니라 地方民과 쉽게 결합할 수 있어서, 사회의 명망과 권세를 한꺼번에 쥐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신라 하대에 중앙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지방호족이 대두하여 그 사회를 움직여 가는 분위기 속에서 선종은 크게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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