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신앙이 이상세계의 건설을 전제로 하여 현실사회를 개혁하려는 경향을 뚜렷하게 표방한 자는 弓裔였다. 물론 궁예는 법상종 계통의 승려로서419)金杜珍, 앞의 책, 117쪽. 자신을 미륵불로, 두 아들을 각각 청광보살과 신광보살이라 했다. 그러한 궁예의 미륵신앙은 미신적인 것으로 윤색되어 있다.
그는 외출할 때에 항상 白馬를 타고 彩色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했으며, 童男童女를 시켜 깃발·양산·香花를 받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또 비구 200여 명을 시켜 梵唄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했다. 그런가 하면 궁예 4년(915)에 부인 康氏는 그가 非法을 많이 행하기 때문에 정색하고 간하였다. 궁예는 이를 미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과 通姦하니 웬일이냐”420)≪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고 하면서 부인을 죽였다.
궁예는 머리에 金幘을 쓰고 方袍를 입었으며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했다. 이런 그의 모습은 金輪寶를 쓴 전륜성왕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善宗이란 法號를 가지고 방포를 입은 모습은 전륜성왕의 출가를 의미하며, 그의 輪寶가 옮겨감을 말한다. 이 때부터 인간의 수명은 줄어들고 거짓과 사기와 도적이 횡행하면서, 전쟁과 살인이 그치지 않은 혼란한 사회에 들게 된다.421)≪長阿含經≫권 2, 轉輪聖王修行經 참조. 궁예의 미륵신앙은 이와 같이 전륜성왕의 윤보를 내세워 신라사회의 혼란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미 진성여왕대는 草賊이 난무하는 혼란한 시대에 들어 있었으며, 이전 시대에서와는 달리 궁예의 미륵신앙은 바로 그러한 사회 혼란을 조장함으로써 신라국가를 붕괴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궁예가 외출할 때의 모습은 龍華樹 아래에서 미륵이 행한 3회의 설법 장면을 연상시켜 준다. 3회의 설법으로 미륵불은 이미 法輪을 굴리고 하늘과 사람을 제도한 다음 제자들을 이끌고 趐頭末城으로 들어간다. 이 때 길거리에는 가지가지의 幡蓋를 세우고 여러 가지의 香을 태워 그 연기가 구름같으며, 帝釋은 여러 天王과 더불어 佛德을 노래로 찬양하고, 하늘의 꽃들을 비오듯 뿌려 부처님을 공양한다.422)鳩摩羅什譯,≪佛說彌勒下生成佛經≫. 궁예가 白馬를 채색 비단으로 장식한 것이나 동남동녀로 깃발·양산·향화를 받들고 범패를 부르게 한 것은 바로 龍華 이상세계의 실현을 의도한 것이다.423)金杜珍,<弓裔의 彌勒世界>(≪韓國史市民講座≫10, 1992), 32쪽.
弓裔는 이상세계의 실현을 위해 현실사회를 개혁하려 하였다. 그가 미륵불로 자칭한 것은 그 만큼 현실사회의 개혁사상을 강하게 표출한 것이다.424)金杜珍, 위의 글, 116쪽. 부인 강씨가 비판하자 그는 신통력을 강조해서 부인을 살해하였다. 여기서는 단순히 신통력이라 되어 있으나, 같은 내용을≪고려사≫에서는 彌勒觀心法이라 했다.425)≪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궁예의 미륵관심법은 이상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현실사회를 개혁하려는 것으로, 미륵의 功德 神力과 통할 수 있지만 이후 미륵신앙이 신비주의에 몰입되게 하였다.
궁예가 표방한 미륵신앙은 어쩌면 이상세계의 건설보다는 현실사회의 개혁에 더 치중되어 있었다. 고려 건국 이후 그것은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미륵신앙은 香徒 조직을 통해426)李泰鎭,<醴泉 開心寺 石塔記의 分析―高麗前期 香徒의 一例―>(≪歷史學報≫54, 1973) 41쪽. 비밀결사를 결성시킴으로써 사회체제를 부정하는 반란세력과 연결되는가 하면, 민간신앙과 연결되어 신흥종교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