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4) 유·불·선 3교의 융합
  • (1) 유·불 2교의 교섭

(1) 유·불 2교의 교섭

 儒敎가 신라사에서 중요하게 되는 것은 중대의 전제주의가 성립하면서부터였다. 유교는 주로 六頭品 지식인을 중심으로 수용되었는데, 신라 중대에 왕실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眞骨귀족을 억압하는 대신 그들과 이해를 달리한 6두품 귀족을 측근 세력으로 키워 나갔다. 자연 6두품 귀족들은 진골귀족과 함께 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신라 중대에 유교적 정치이념이 도입되면서 불교 및 유교의 논리는 각각 독자의 영역을 가지면서 서로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신라 전통적인 진골귀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金大問은 유교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보았음에 대해,427)李基白,<金大問과 그의 史學>(≪歷史學報≫77, 1978 ;≪韓國史學의 方向≫, 1978, 一潮閣, 14쪽). 薛聰은 불교 논리에 대해 은근히 비판적이었다. 설총은 元曉의 아들로서 유학자였다. 그는 유학자로 자리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고민을 느껴왔고, 그 결과 불교 논리를 비판하는 입장에 섰을 것으로 생각한다.428)李基白,<新羅 骨品體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大東文化硏究≫6·7, 1970 ;≪新羅思想史硏究≫, 1986, 一潮閣, 226쪽). 불교에 대한 비판은 强首에게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불교를「世外敎」라 배척하고는 유교를 배우려한다고 하였다.429)≪三國史記≫권 46, 列傳 6, 强首.

 불교와 유교의 논리가 가장 차이를 보이면서 서로 대조적으로 비교된 것은 세외교와 세내교였음이 분명하다. 물론 유교가 세내교라고 언급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불교의 세외교와 비교하여 그렇게 생각된다. 강수가 불교를 세외교라 한 것은 출가하여 入山 수도하는 면을 이름이다. 속세를 떠나 출가하면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게 된다. 그럴 경우 불교와는 달리 유교는 세내교로서 자리하게 되었고, 불교의 출가는 孝道와 부합할 수 없게 되었다.

 신라 중대 이래에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은 효도에 대한 것이었다. 곧 출가하게 되면 누가 어버이를 모시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귀족들과는 달리, 홀어머니를 모시고 날품으로 그날그날의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서민들에게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유학자들의 비판에 대한 불교계의 대응이「孝善雙美」신앙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佛家의 수도와 儒家의 효도를 함께 닦음으로써, 양자 사이의 조화를 모색하려 했다.430)李基白,<新羅 佛敎에서의 孝觀念―『三國遺事』孝善篇을 중심으로―>(≪東亞硏究≫2, 1983 ; 앞의 책, 1986, 278쪽). 그리하여 대체로 귀족들인 在家 신자들은 부모를 위한 佛事를 일으켜 공덕을 쌓음으로써 효도를 수행했는가 하면, 眞定과 같이 서민으로서 출가한 승려는 그 출가로 인해 부모가 극락으로 왕생하는 것이 효도를 수행하는 것이라 하였다.

 신라 하대에 효도와 수도는 결코 대치될 수 없었다. 信孝거사가 효도와 출가 후의 수도를 함께 닦고 있었다. 신효거사는 幼童菩薩의 化身이라 불리웠다. 그의 집은 公州에 있었는데 효성을 다해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려고 돌아다니다가 절에서 학 다섯 마리가 노는 것을 보고 활을 쏘았다. 학 한 마리가 날개의 깃을 떨어뜨리고 갔는데, 거사가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이에 고기를 구하지 못하고 자기의 넙적다리 살을 베어서 어머니께 바쳤다. 그 뒤에 그는 중이 되어 자기 집을 내놓아 절로 삼았는데, 孝家院이 그것이다.431)≪三國遺事≫권 3, 塔像 4, 臺山月精寺五類聖衆.

 신효는 신라말에 공주에 살았던 인물로서 사람이 業報에 의해 畜生으로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께 자기의 허벅지 살을 드리는 효도를 행하였다. 그런 후 그는 출가하여 뒤에 月精寺를 크게 일으켰는데, 그가 자기의 집을 희사하여 경영한 절을 효가원이라 했으며 또한 그는 儒童보살 곧, 孔子의 화신이라 불리웠다. 이로 보면 신효거사는 신라 하대에 불교신앙과 유교의 효도를 조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신효거사의 행적은 신라 중대의 대표적인 효행 신앙을 편 向德이나 聖覺의 故事와 일치하는 점이 많다.432)聖覺은 신라 菁州 사람인데 史에 그 氏族이 전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명예나 벼슬을 즐겨하지 않고 스스로 居士라 하여 一利縣의 法定寺에 의탁하여 살았는데, 뒤에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 나물 밥을 먹기 싫어하므로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 먹였고, 죽게 되자 정성껏 佛事를 행하여 祭를 올렸다(≪三國史記≫권 40, 列傳 8, 向德 聖覺). 또한 向德故事도 허벅지 살을 어버이에게 공양했다는 면에서 信孝의 孝行과 비슷하다. 물론 향덕이나 성각의 고사는 불교와 유교윤리를 함께 지니는 것이면서도, 어쩌면 향덕은 그 이름으로 보아 유교윤리가 강요되는가 하면 성각이라는 뜻은 불교의 수행이 조금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433)金杜珍,<新羅義湘系 華嚴宗의 ‘孝善雙美’ 信仰>(≪韓國學論叢≫15, 1992), 23쪽. 그리하여 신라 하대에는 효도를 숭앙하던 사원이 산재해 있었다. 신효가 세웠다는 효가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흥덕왕대에 孫順이 자기 집을 내놓아 창건한 弘孝寺도 그런 절이었다.434)≪三國遺事≫권 5, 孝善 9, 孫順埋兒 興德王代條에는 품을 팔아 살아가는 孫順이 늙은 어머니의 반찬을 빼앗아 먹는 자기 아들을 묻으려 하였다. 땅을 파자 마침 石鐘이 나오므로 이상히 여겨 묻는 일을 중단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종을 매달아 치니 마침 종소리를 듣고 손순의 효행을 안 흥덕왕이 그를 포상하였으며, 뒤에 그는 집을 내놓아 弘孝寺라 하였다.

 신라 중대 이래 유교의 비판에 대한 불교계에서의 대응이 효도와 수도를 조화하려는 경향을 형성시켰지만, 신라 하대에 그러한 분위기는 사회 전반에 넓게 확산되어 있었다. 헌강왕이 喪을 당함에 대해 “藤文公은 禮를 다하여 居喪함으로써 끝내 자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초나라 莊王은 때를 기다려 政事를 닦음으로써 그 실로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하물며 性情이 中國風을 답습하고 몸소 불교의 교리에 젖으시니, 조상을 높이 받드는 의리를 행했고, 부처님께 귀의하는 정성을 激發시켰다”435)崔致遠,<崇福寺碑文>(≪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新羅篇), 237쪽.고 하였다. 헌강왕이 상복을 입고 조상을 받드는 효행과 함께 佛道를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효도와 불도의 실천을 국왕이 몸소 행하고 있으며, 바로 그 점을 높이 칭송함은 신라 하대에 그것이 사회윤리로서 확산되어 갔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승려들도 유교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鳳巖寺의 지증대사는 유교에 매우 밝았다. 그의 행적은 크게「六異」과「六是」로 나뉘어 기술되었는데,「6이」가 그의 생애 중에 있었던 이적을 적은 것이라면,「6시」는 주로 그의 옳은 행동을 기록한 것이다. 물론 지증대사의「6시」로 제시된 것은 나아가고 물러나는 옳음과 은혜를 알아 은혜를 갚는 옳음, 狂氣를 억제하고 개발하는 옳음, 쓰거나 버리는 데의 옳음 등으로 불교 수행이면서도 유교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지증대사의「6이」는 불교신앙상의 이적을 지적하려는 것이지만, 그 중의 효도와 感泣의 이적이나 마음을 격려하는 이적, 아홉번 생각하게 하여 훈계를 내리는 이적 등은 유교적인 교훈을 떠올리게 한다.436)崔致遠,<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참조.

 신라 하대에 불교와 유교를 함께 닦으려는 경향은 최치원의 글에서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들은 헌강왕이나 지증대사에 관한 서술이 모두 최치원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말여초에는 많은 禪師들의 비문이 현존하는데, 그것을 작성한 자들은 모두 유교 知識人이었고 그들 또한 불교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로 보면 신라말에 불교와 아울러 유교를 함께 이해하려는 경향이 확산되어 있었다. 특히 慈寂禪師는 일찍부터 불경을 열람하고, 유교 또한 정통하였다.437)<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許興植 編,≪韓國金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1984), 314쪽. 유·불을 함께 이해하려는 경향은 비단 지증이나 자적선사에게 한정되었다기 보다는 신라말의 선사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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