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3. 풍수지리·도참사상
  • 1) 풍수지리설의 도입

1) 풍수지리설의 도입

 민족문화를 논하고자 할 때 환경, 즉 풍토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문화가 영위되면서 先人들은 지리를 살펴서 생활 속에 그것을 이용해 왔다. 처음에는 경이로운 숭배의 대상이었던 자연에 대한 이해가 경험과학에 의한 지식으로 체계화되었다. 風水地理說은 이렇게 하여 성립되어 갔다. 풍수지리는 도읍·궁택·무덤의 터를 잡기 위해 점을 치는 일종의 관상학인 까닭에 相地學으로 규정되며, 본래는 地母神的인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453)李丙燾,≪高麗時代의 硏究―特히 圖懺思想의 發展을 중심으로―≫(乙酉文化社, 1947 ; 亞細亞文化社, 1980, 21∼22쪽). 뒤에 그것은 도읍이나 집터의 형태적인 지리에 음양오행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부여하고, 그 밖에 천문·방위 등의 사상을 첨가하였으며, 유가의 윤리사상과 결합되어 상당한 발달을 보았다.454)李丙燾, 위의 책, 23∼26쪽. 그렇지만 풍수지리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산수의 형세를 살펴서 인간생활에 이용하려는 인문지리적 지식으로서 이미 상고대에서부터 활용되어 왔다.

 삼국시대 이전에도 풍수지리는 전래되어 신앙되었다. 脫解가 半月城 쪽으로 정착하는 기사에서 풍수지리적 지식이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해안으로 들어와 漢祗部에 머무른 탈해가 하루는 吐含山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땅을 선정하려 했다. 그는 학문에 정박했고 겸하여 지리를 알았는데, 양산 아래 瓠公의 집터가 길한 땅임을 알고, 위계를 써서 그 곳을 빼앗아 거주하였다. 탈해가 길한 땅으로 내세운 “한 봉우리가 3일의 달과 같다”455)≪三國遺事≫권 1, 紀異 2, 第四脫解王.는 표현은 반월성을 가리킨 것이겠지만, 그 곳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해서 선정되었다.

 탈해에 관한 기사만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풍수지리설이 유행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당대에 풍수지리적 지식이 공공연하게 이용되고 있었음을 생각할 수는 있다. 성읍국가에서 출발한 고구려·백제·신라가 삼국시대 초기에 국도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런 모습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의 儒理王은 祭儀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그것을 추격하다 보니, 졸본보다 더 좋은 地勢를 발견하고 마침내 그 곳으로 천도하였다. 거기가 바로 國內城이다. 국도 건설의 필요조건인 땅이 기름지다든가 山河가 險高하여 적의 침입을 방비하기에 편리하다든가와 같은 기준이 있었는데, 그러한 기준에 맞는 도읍지를 구하려는 과정에서 이른바 풍수지리적 지식이 활용되었다.

 풍수지리적 지식은 국도의 설정에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궁실이나 왕릉·사찰 등의 터를 선정하는데 중요하게 쓰였다. 원성왕릉을 위시하여 오늘날 전해지는 대부분의 왕릉이나 寺址가 모두 풍수지리설의 조건을 구비한 곳에 위치해 있다. 또 귀족들이 별장을 희사하여 개인의 원찰로 만들었는데, 그러한 원찰이 빼어난 산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의 私邸 역시 풍수지리적인 지식을 고려하여 터를 잡았을 법하다.

 김유신의 증손인 金巖은 당나라에 숙위로 머물 때 스승을 만나 陰陽家法을 배워 통달하였고 스스로 둔갑법을 저술하였다고 하므로, 풍수지리설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중대에는 당문화와의 교류가 잦아져서 曆書의 제작이나 산학·율학·의학 등의 수준이 높아졌고, 음양오행에 기초한 천문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에 의해 풍수지리설의 이해가 심화되어 갔다. 김암도 역시 이 방면에 종사한 司天博士였다. 이후 나말에 이르기까지 풍수지리는 사상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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