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3. 풍수지리·도참사상
  • 3) 지방호족 중심의 국토 재구성안

3) 지방호족 중심의 국토 재구성안

 도선은 중국에서 一行으로부터 풍수지리설을 전수받았다고 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463)今西龍,<新羅僧道詵に就いて>(≪高麗史硏究≫, 近澤書店, 1944), 82∼83쪽에서 도선은 스승인 혜철과 혼동되어, 혜철의 入唐이 그에 대한 기록으로 나타났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도선은 중국에 유학한 적이 없다. 다만 일행과 얽힌 연기설화는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일행의 사상과 무언가 연관되었기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464)崔昌祚,≪韓國의 風水思想≫(民音社, 1984), 47쪽. 우선 일행은 혜철의 사상에 영향을 준 楊筠松의 문도이다. 양균송의 제자에 曾文遷이 있으며 증문천의 제자가 일행인데, 그들은 실증법을 사용함으로써 풍수지리설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465)崔昌祚, 위의 책, 45∼47쪽.

 일행은 성덕왕 23년(724)에 칙명으로 남쪽은 交州로부터 북쪽은 鐵勒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위도를 측량하여≪舊唐書≫律曆志에 편입된 大衍曆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당나라를 지세에 따라 貨殖·用文·用武의 땅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국토를 관찰하였던 대단히 과학적인 인물이었다. 일행의 풍수지리설은 전국토를 용도별로 편제하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도선의 풍수지리설에서도 역시 이런 면이 강조되었다. 풍수지리는 산수의 順逆을 살피는 과정에서 합리적인 인문지리학으로 성립되었다.

 풍수지리설의 기본 요소는 山(곧 龍)·水로 이루어져 있다. 산수의 정기가 응결된 곳인「穴」과 그 곳을 중심으로 한 형세인「砂」로써 일단 明堂을 결정하게 된다. 풍수지리설은 전국 지세의 순역을 살펴서 명당을 설정하려는 것이다. 전국 산수의 순역을 살피는 과정은 경험 과학에 근거하여 전국토를 올바르게 또한 정확하게 이해하게 한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인문지리적 지식이 쌓이면서 지방의 어떤 곳을 명당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풍수지리는 이미 설정된 명당인 어느 지방을 국가의 중심부에 두면서, 그 곳을 중심으로 전국토를 재편성하게 했다. 말하자면 풍수지리는 명당을 설정하기 위해 전국 지세의 순역을 지정함으로써, 명당으로 지목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국토의 재구성안이다.466)金杜珍, 앞의 글, 43쪽. 풍수지리설에 의해 성립된 지방 중심의 이러한 국토관은 신라의 전통적 국토관을 크게 바꾸는 것이었다. 신라인들은 경주를 국토의 중심에 둔 영토관을 갖고 있었으나, 풍수지리설은 국토관을 경주 중심에서 지방 중심적인 것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이러한 국토관의 변화는 결코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그렇게 되기까지 경험과학에 기초한 세련된 지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신라말에 지방호족이 대두된 분위기 속에서 풍수지리설이 유행해 가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서 찾아진다. 그것은 한 지방을 명당으로 혹은 국토의 중심부로 설정함으로써, 그 곳에 웅거하고 있었던 지방호족 세력을 옹호하는 성격을 가졌다.467)金杜珍, 위의 글, 43∼46쪽.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풍수지리설은 도선계의 것이고, 지방호족 중심이었다기 보다는 왕건에게 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결과 나말의 풍수지리설은 왕건에게 후삼국을 통일하는 이념을 제공하려는 것이었다고 규정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역시 정확성을 잃은 것이다.

 도선은 왕건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그의 碑文에는 왕건의 아버지인 隆建과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선이 松岳郡을 지나면서 융건에게 秘記 한 권을 전하면서, 2년 후에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아이가 장년이 되면 이 책을 주라고 했다. 장년이 된 왕건은 도선이 준 책을 받아 보고 天命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아서 도둑과 포악한 무리를 없애버린 다음 국가를 이룩했다고 한다.468)崔惟淸,<玉龍寺先覺國師證聖蕙燈塔碑>(≪朝鮮金石總覽≫上, 1919), 561쪽. 모르긴 해도 도선의 비문 중 가장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이 기록일 것이다. 그 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왕건이 도선과 직접 만났다고 하는 윤색된 부분이 나오게 되었다.469)도선과 왕건과의 관계는 高麗世系에 인용된 金寬毅의≪編年通錄≫에 보다 상세하게 附會되었고, 閔漬의≪編年綱目≫에서는 도선이 왕건을 찾아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곧 도선은 松岳으로 17세가 된 왕건을 찾아가, 出師置陣 및 땅을 이롭게 하고 하늘의 때를 맞추는 법과 望秩山川과 感通하여 保佑하는 이치를 말해 주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고려시대를 통하여 계속해서 윤색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도선이 융건과 만났다는 사실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선이 만약 왕건의 先代와 연결되어 있었다면, 그의 제자인 경보가 견훤과 연결되었을 까닭이 없다. 경보는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올 때에 견훤의 도움을 받아 전주지역으로 들어 오고 南福禪院에 머물렀다. 그가 光陽의 玉龍寺에 주지가 된 것 역시 견훤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470)金杜珍,<王建의 僧侶結合과 그 意圖>(≪韓國學論叢≫4, 1981), 133∼134쪽. 아마 도선이 개창한 옥룡사를 비롯한 동리산문은 견훤의 세력권 속에 들어와 있었을 법하다. 그럴 경우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애초부터 왕건과 연결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견훤과 관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인다.471)金杜珍, 앞의 글(1988), 22∼23쪽.

 사실 후삼국의 혼란기에 지방에 웅거한 강력한 대호족들은 상당수가 그들 세력 기반에 봉사하는 풍수지리설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삼한을 통일한 고려국가에 의해 정리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松岳 중심 이외의 풍수지리는 남겨지기 어렵게 되었다.472)金杜珍, 위의 글, 43∼46쪽. 말하자면 고려통일 이전에는 각 지방을 명당으로 설정한 상당수의 풍수지리설이 존재했다. 따라서 왕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거나 혹은 다른 지방호족과 연결된 풍수지리설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작업이 이 방면의 연구를 일보 진전시키게 될 것이다.

 송악 이외의 지역으로 天安과 泗川 등의 지역에 풍수지리설이 전하고 있다.473)金杜珍, 위의 글, 44쪽. 이들 지역이 왕건과 전혀 관계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천안의 王字城에는 “五龍이 여의주를 다투는 지역”474)≪新增東國輿地勝覽≫권 15, 天安郡 古跡 懷古亭.이라는 풍수지리설이 왕건의 진주 이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또 사천 지역에도 郁의 아들 詢이 등극하는 풍수지리설이 전해져 있었지만, 욱이 이 지역에 유배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그 본래의 모습은 이것과 상당히 달랐을 법하다. 그런데 후삼국시대에 이들 지역에는 강력한 호족 세력이 웅거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사천 지역은 後唐에 사신을 파견할 정도의 독자 세력을 구축한 王逢規의 지배 아래에 들어 있었으며, 천안지역에는 한 때 왕봉규의 부하로 후당과의 교섭에 주역을 담당했던 林彦이 강력한 호족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천안과 사천 이외의 지역에서도 강력한 호족이 웅거한 지역이었을 경우, 그 곳 중심의 풍수지리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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