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3. 풍수지리·도참사상
  • 5) 도참사상의 전개

5) 도참사상의 전개

 도선이나 나말 풍수지리설의 참모습은 역시 산수의 순역을 살펴서<삼국도>를 작성하고, 그 응용 원리로써 비보를 내세우는 것이다. 비보사상은 왕건의 호족연합책과 연결되면서, 고려초 호족세력을 편제하고 일방으로 그들을 제어하려는 왕실의 통치정책과 얽히어,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왕건과 대항할 수 있는 호족이 존재하는 지역은 지리쇠왕설에 의해 逆地로 떨어질 수 있었으며, 역한 땅을 비보하려는 조치는 바로 호족세력을 통어하면서 왕권을 집중해 가려는 왕건의 의도와 밀착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풍수지리설은 도참적 성격을 띠어 갔다.

 사실 풍수지리설과 도참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도참은 장래의 일, 특히 인간 생활의 吉凶禍福과 盛衰·得失에 대한 예언이 징조를 보이는 것이지만, 흔히 정치와 결부되어 그 능력을 행사했으며, 그 내용 자체가 믿기 어려운 맹랑한 비기로 전해졌다. 그것은 신비한 측면에서 풍수지리와 통하는 것이어서, 고려 초기에 양자가 결합하면서 정치적 목적으로 주장되는 경우가 흔히 있어 왔다. 이리하여 고려시대에 지리·도참사상이 풍미했는데, 이런 면은 역시 부정적으로 생각해야 될 것이다.

 삼국시대에 도참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백제 멸망시에 “백제는 보름달이요 신라는 초생달이다”479)≪三國遺事≫권 1, 紀異 2, 太宗春秋公.라는 것이나 나말의 王昌瑾 설화 등은 도참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 안에 지리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리·도참사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고려 초기이며, 왕건의 훈요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왕건은 훈요의 제8조에서 “車峴 이남 公州江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거꾸로 뻗쳤으니 인심도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고을의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고 왕이나 왕실의 인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오로지 하면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되니, 비록 양민이라 하더라도 관리로 뽑아쓰지 말라”고 하였다. 또 제5조에서는 “西京은 水德이 순조로와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고 큰 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므로 巡駐하게 하라”480)≪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고 하였다.

 물론 훈요는 왕건이 자손들에게 은밀하게 내린 유훈이기 때문에 거기에 충분히 참위적인 내용이 들어갈 소지를 가졌다. 이 점은 도선의 풍수지리설과 확실히 구별되어질 수 있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비보사상으로 흘렀지만, 참위적 성격을 띠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왕건에 의해 풍수지리는 참위적 성격으로 자손들에게 은밀히 전달되어졌다. 평양을 중시하고 금강 이남 지역을 차별하려는 도참사상은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연관되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왕건은 한반도의 남쪽지역과는 달리, 기존의 호족세력에 의해 점거되어 있지 않았던 평양지역을 왕실의 세력기반으로 확보하려 했다.481)河炫綱,<高麗 西京考>(≪歷史學報≫35·36, 1967), 141∼146쪽. 한편 고려에 가장 적대적이었던 금강 이남의 후백제지역이 逆한 땅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풍수지리설이 고려초에 왜 도참과 연결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는지가 궁금해진다. 풍수지리설은 한 지방을 국토의 중심인 명당으로 설정하여 그 곳을 중심한 국토 재구성안으로 성립되면서, 그것의 모순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A라는 지역을 중심한 국토 재구성안인 풍수지리설은 B라는 지역을 중심한 풍수지리설과 배치하게 된다. 왜냐하면 A지역이 명당으로 국토의 중심이 되면 B지역은 국토의 중심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설의 이런 면이 지방에 웅거한 호족세력 사이의 정치 싸움을 조장하는 일익을 담당하였다.

 나말에 선종과 더불어 풍수지리설은 다같이 지방호족과 연결되어 유행하고 있었으나, 고려초 풍수지리설과는 달리 선종은 계속해서 사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선종산문은 서로 공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종사상에서는 외적인 인연을 끊으면서 각자가 자기 내에 있는 불성을 깨닫으려고 하기 때문에, 각각의 산문이 다른 산문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고려시대를 통하여 선종 9산문파가 그대로 그 法脈을 전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풍수지리설은 서로 배타적이라서 공존이 불가능하였다. 말하자면 풍수지리는 고려초 삼한을 통일한 세력, 즉 왕건에 의해 정리될 수밖에 없었다.

 풍수지리설이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정리되고, 정치세력에 의해 이용되면서 더 이상의 사상적 발전을 가져오기 힘들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풍수지리가 비보사상을 거쳐 도참사상으로 흐르면서 미신적 요소를 짙게 띠어 갔다. 말하자면 비보사상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소지를 가졌다. 왕건에 의해 그것이 수용되면서 반대세력이 雄據한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또는 자기의 세력기반을 확충하는 방법으로 전락하면서 비보사상은 도참으로 흐르게 되었고, 그 결과 풍수지리는 더 이상의 사상적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또한 신라말 대호족이 거주하였던 지역에는 대체로 그 곳을 국토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풍수지리가 존재했는데, 그것은 선종사상과는 달리 서로 배타적이어서 후삼국을 통일한 세력에 의해 정리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왕건 중심의 풍수지리만이 전해지는 이유가 이러한 데 있다. 신라말에 여러 갈래로 존재했던 풍수지리가 왕건에 의해 정리되면서, 다양한 사상적 발전이 저해된 셈이다. 신라말 전국토의 운영을 생각하던 방대한 영역의 풍수지리설이 사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위축되면서 그 안에는 미신적 요소가 대신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주로 도읍을 옮기거나 새로 정하려는 定都사상으로 성립되었다. 三京制를 정하려는 것과 같은 지리·도참의 모습이 그 전과는 달리 고려시대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풍수지리설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것은 그 합리적인 면과 미신으로 흐른 면을 분명히 하면서 先人들이 국토를 관찰하여 이용하였던 방법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인문지리학으로 접목·발전하여야 할 것이다. 어느 지방의 산수가 풍수지리적 사고에 적합한가를 신비적으로 추구해 가려는 연구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한 연구는 풍수지리설로 하여금 민족문화의 창조를 위한 에네르기로 작용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金杜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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