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1. 고려의 건국과 호족
  • 2) 왕건의 즉위와 후삼국의 통일
  • (1)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

(1)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

弓裔는 처음에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王建을 비롯한 고구려 부흥세력과 연합하였고, 孝恭王 5년(901)에 국호를 高麗라 하여 고구려의 부흥과 계승을 표방하였다.011)朴漢卨,<後三國의 成立>(≪한국사≫3, 국사편찬위원회, 1978), 630쪽 참조. 그리하여 궁예는 본래 신라 제47대 憲安王의 아들로서 姓은 金氏이고 世達寺의 중이 되었을 때의 이름은 善宗이었지만 그 뒤 高句麗의 國姓인「高氏」를 칭하고 자신의 이름을「朱蒙의 후예」즉「고구려인의 후예」를 자처하여「弓裔」라 자칭하였던 것이다.012)朴漢卨,<弓裔姓名考>(≪韓國學論叢≫, 李瑄根古稀紀念集刊行委, 197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세력 기반이 강화되고 국가기반이 확고해지면서 고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효공왕 8년(904)에 이르러 국호를 摩震으로 고치면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더욱 강화시키고 고구려 부흥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013)≪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孝恭王 9년).를 취하였다. 한편 고구려 유민들의 反新羅的 감정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유민과 부흥세력을 무마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國人으로 하여금 신라를 滅都라 부르게 하고 신라에서 항복해 오는 자는 모조리 죽이는 등 반신라적인 감정을 보다 노골화시켜 나갔다.

효공왕 9년(905) 서울을 松岳으로부터 다시 鐵圓으로 옮기고 궁궐과 전각을 수리하는데 사치를 다하였고014)≪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天祐 2년 을축).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하6월 정사.
민심은 더욱 더 멀어져 갔다. 이것은 결국 고구려의 부흥이라는 국가적인 이상을 버리고 궁예의 명예라는 개인적인 욕망을 나타낸 것으로서 일종의 영웅주의의 발로였다.

그리고 이 영웅주의가 심해지면서 그는 자기를 彌勒佛이라 칭하고 자신의 큰 아들을 靑光菩薩, 작은 아들을 神光菩薩이라고 하였다. 그는 머리에는 金幘을 쓰고 몸에는 方袍(승복)를 입고 외출할 때에는 백마를 타고 채단으로써 그 갈기와 꼬리를 장식하였으며 童男·童女로 하여금 梵唄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015)≪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고 한다.

그는 왕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지니지 못하였으니 왕건이 壓海縣의 賊帥 能昌을 잡아 보내자 크게 기뻐하면서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해적들이 모두 너를 추천하여 영웅이라 한다는데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귀신같은 계산이 아니겠느냐?”하고 사람들에게 구경시킨 후 목을 베게한 것이나,016)≪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前文 참조. 그가 백성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라 부르게 하고 신라로부터 항복해 오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게 한 것 등의 사실을 보면, 그가 난세를 수습하고 평화를 이룩할 만한 지도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인물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행동이 점점 더 포학해졌고, 극도의 정신적 불안상태를 보이기도 하였다.017)≪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傳에 기록된 대로 궁예가 憲安王(857∼861)의 아들이라면 궁예 말년은 60세가 가까운 때이다. 그는 의심증까지 생겨서 915년에는 그의 부인 康氏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였다고 하고 강씨와 그의 두 아들을 죽였으며, 문무관료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반역죄를 씌워 무고하게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생기게 되어 어떤 때에는 그 수가 하루에 100명이 되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이는 궁예가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였다가 이를 버린 이후에 궁예와 그의 반대세력 간의 대립이 심화된 데서 비롯된 것이며 왕건도 崔凝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궁예에게 죽음을 당할 뻔한 일도 있다.018)≪高麗史≫권 92, 列傳 5, 崔凝.

그리하여 궁예의 신하와 백성들은 두려워서 불안에 싸이게 되었고 게다가 그의 사치와 낭비로 말미암아 세금과 부역이 과중하게 되어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후예로서 정치적 지위와 군사·경제적 기반, 그리고 덕망을 배경으로 신임을 쌓아 오던 왕건은 궁예와의 직접적인 대립을 피하고 궁예와 대항할 세력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궁예의 세력권을 벗어나, 이미 오래 전부터 왕건의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자신이 직접 경략했던 羅州로 나아가 왕건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마련하였다.019)朴漢卨,<羅州道大行臺考>(≪江原史學≫1, 1985), 43쪽 참조.

이같은 궁예와 왕건을 중심으로 한 두 세력 간의 대립은 913년에 있었던「靑州人 阿志泰의 모함사건」020)≪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乾化 3년).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왕건의 입지가 강화되고 세력이 확대되자 궁예는 자신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 왕건을 비롯한 고구려의 부흥세력에 대해 태도를 달리하여 경계하였고,021)≪高麗史節要≫권 1, 태조 원년 6월. 이에 將吏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반대세력들을 모두 반역죄로 몰아 죄없는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렇게 궁예와 그의 정치적 반대세력 간에 대립이 심화되어 많은 신하와 백성들이 궁예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마침내 景明王 2년(918) 洪儒·裵玄慶·申崇謙·卜智謙 등이 모의하여 왕건을 추대하고 혁명을 일으키니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여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고려 太祖이다.022)≪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景明王 2년 하6월 및 권 50, 列傳 10, 弓裔(貞明 4년 무인 하6월).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貞明 4년 6월 을묘).

왕건은 국호를 다시 고려라 하고 연호를 天授라 하여 고구려의 부흥과 계승 이념을 뚜렷이 하였다. 다음해에는 서울을 자기의 본거지인 松岳(開城)으로 옮기어 자신의 정치적·군사적인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023)≪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하6월 병진·동 2년 춘정월.

왕건은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다. 왕건이 浿江鎭(平山)·穴口鎭(江華) 등 개성 주위에 설치된 軍鎭의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사회적인 진출을 꾀하였다고도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왕건의 가장 기초가 되는 배경은 경제력이었다. 즉 왕건의 선조들이 해상활동을 하면서 해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거느린 흔적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또 왕건의 집안이 평산 지방의 호족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사실도 발견할 수가 있으나 왕건 집안의 군사력에 앞서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경제력이었다. 그러므로 왕건의 호족으로서의 기반은 해상활동 즉 무역활동을 통하여 획득한 경제력이 주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또 개성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 전체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도 하였다.024)朴漢卨,<王建世系의 貿易活動에 對하여>(≪史叢≫10, 1965) 참조.

이제 왕건 일족이 豪族化하는 과정을 살펴 보기 위해서 먼저 개성 지방의 해상활동에 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고구려·백제와의 대립이 해소됨으로써 인적·물적인 소모가 없어지게 되어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신라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중국에서도 당나라가 세계적인 대국을 건설하고 100여 년 동안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하여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각 부문에 있어서 큰 발전을 보였던 것이다. 이 기간에 신라는 당나라와 아주 친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盛唐의 선진문화를 수입하였으므로 신라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신라의 수많은 선박이 당나라로 왕래하였는데 그 목적은 외교적·문화적인 것보다 경제적인 것 즉 무역이 주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하여 山東半島나 江蘇省 같이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는 新羅坊이라는 신라인의 거류지가 생겼으며 또 그 거류지를 관할하기 위한 新羅所라는 행정기관이 설치되고 그 직원은 신라인이 임명될 정도였다. 그리고 신라의 무역상대는 당나라 뿐만 아니라 日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淸海鎭大使 張保皐가 당과 일본을 연결하는 위치에서 큰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기간에 신라의 각 해안 요충지에서는 무역활동이 번창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곳으로 淸海鎭(莞島)·唐城鎭(華城郡 南陽)·穴口鎭(江華)과 康州(晋州)·金州(金海)·登州(安邊)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개성도 이러한 대외무역 활동으로 번창한 지역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중심은 永安村이라는 마을이었는데 뒤에 이 마을은 作帝建의 활동 이후 永安城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제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진 개성 지방에서의 왕건 일족의 활동을 살펴 보기로 하자.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왕건의 집안은 왕건의 五代祖인 虎景이 북쪽으로부터 와서 개성 지방에 자리잡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때에 이미 호경은「富」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025)≪高麗史≫高麗世系附記 編年通錄 참조. 그리고 호경의 아들인 康忠이 나중에는 영안촌 부자의 딸과 혼인하였다든지, 송악군의 上沙粲이 되었다든지, 집의 형세가「累千金」이었다든지, 또는 당 肅宗의 설화와 같은 무역활동이나 또는 이에 관련된 상업활동에 종사한 흔적과 함께 호족화하여 가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왕건의 선조 중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고 또 큰 성공을 거둔 것은 그의 조부인 作帝建이었다. 작제건은 자신이 직접 무역선을 타고 해외무역에 종사하여 막대한 재부를 축적하고 개성 지방 일대에서 최대의 호족으로 등장함으로써 이 지방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작제건은 당시에 횡행하던 해적들을 소탕하고 제해권을 잡았으며 또 이를 위하여 상당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龍建과 손자인 왕건 때까지도 계속하여 개성 지방을 지배해 왔으며 또 이들은 대대로 주위의 호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그 세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026)朴漢卨, 앞의 글(1965).

그러다가 弓裔의 세력이 철원 지방에 나타나게 되자 용건 부자는 진성여왕 10년(896)에 松岳郡을 바치고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용건 부자가 궁예에게 귀부한 것은 우선 그들의 군사력으로는 궁예의 군사력을 물리칠 만한 충분한 세력이 못되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안위와 해상활동의 기반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용건 부자의 정치적 이념인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궁예의 세력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弓裔로서는 용건 부자가 막대한 재력을 가진 개성 지방 제일의 대호족인데다 개성지방의 큰 경제력과 해상활동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크게 이용할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용건 부자가 귀부하여 오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며 이들을 우대하였고 이에 용건은 귀부한 뒤에는 궁예에게 권유하여 도읍을 자기의 근거지인 송악군으로 옮기게끔 하였다.027)≪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乾寧 3년 병진)·(光化 원년 무오).

이리하여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세력은 제휴하게 되었다. 용건 부자가 귀부하여 오자 궁예는 용건을 金城(金化)太守에 임명하고 왕건은 약관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장군으로 등용하여 해륙 양면으로 여러 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하였다. 효공왕 2년(898) 왕건은 楊州와 見州(楊州의 일부)를 공격하고 효공왕 4년에 廣州·忠州·靑州(淸州) 및 唐城(南陽)·槐壤(槐山) 등의 군현을 공격하여 이를 모두 점령하는 등 陸戰에서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028)≪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光化 3년 경신). 왕건이 해상세력 출신이었으므로 그의 활동은 대부분이 수군 활동에서 이루어졌다. 즉 왕건은 효공왕 7년에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 쪽의 전라도 해안으로 나아가 錦城郡(羅州) 등 10여 군현을 쳐서 점령하고 효공왕 13년에는 珍島의 皐夷島城을 점령하였으며, 효공왕 14년에는 견훤이 친히 거느린 水陸 종횡의 精兵을 德眞浦에서 크게 격파하고 수십 군현을 점령함으로써 이곳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029)≪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天復 3년 계해 3월)·(開平 3년 기사)·(4년 갑술). 특히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 지방을 경략한 것은 후백제의 배후를 교란하여 군사력을 분산시킴으로써 북으로는 泰封에 대한 공격을 약화시키고 동으로는 미약한 신라를 후백제가 병탄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것이며, 또 서쪽과 남쪽으로는 해상을 봉쇄함으로써 후백제의 중국·일본에 대한 외교활동을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왕건은 전라도의 서해안·남해안 쪽에 점령한 군현을 근거로 하고 해안을 따라 경상도 해안에까지 진출하였다. 뒷날 육지로 洛東江을 끼고 남하하는 고려의 세력과 강주(진주)에서 연락함으로써 후백제를 포위하여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왕건이 그 뒤 궁예의 세력 내에서 어떻게 자신의 세력을 성장시켜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를 성립시켰는지 살펴 보자.

왕건 부자가 귀부하여 오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건을 그의 근거지인 철원군의 태수로 삼고, 용건은 그 옆 군인 금성군의 태수를 삼아 이들을 우대하였다. 이에 용건의 건의에 따라 왕건으로 하여금 송악군에 勃禦塹城을 쌓게 하고 왕건으로 그 성주를 삼았으며, 효공왕 2년(898)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긴 후에는 왕건을 精騎大監에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이후에도 왕건은 주로 군사활동을 통하여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효공왕 4년 광주·충주·청주·당성·괴양 등의 군현을 점령한 공로로 阿粲의 관품이 주어졌으며, 효공왕 7년에는 수군으로 나주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자 閼粲으로 진급되고, 효공왕 13년에 나주에 문제가 생겨 다시 왕건이 파견되어 진압할 때에는 韓粲으로 올라 가는 동시에 海軍大將軍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神德王 원년(912)에도 德眞浦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는 등, 거듭되는 전공으로 계속 올라가 波珍粲이 되고 아울러 수상인 侍中이 되었다.

신덕왕 3년에 나주 지방이 다시 불안해지자 궁예는 왕건을 시중직에서 해임하고 百船將軍으로 임명하여 또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수습하게 하는 등 出將入相을 번갈아 하게 되었다.030)≪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前文 참조.
이처럼 왕건은 주로 수군활동의 성과를 통해 태봉에서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한편으로 그는 지식과 덕망도 구비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대표적 지식계급인 禪宗의 승려들과 연결되어 지적 소양을 높였고 또 난세를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이룩할 인물이 될 경륜을 쌓아 갔다.031)≪高麗史≫高麗世系 등 참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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