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1. 고려의 건국과 호족
  • 2) 왕건의 즉위와 후삼국의 통일
  • (3) 후삼국의 통일

(3) 후삼국의 통일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정은 바로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쟁패 과정이었다. 新羅는 이미 무력해진 데다가 甄萱과 弓裔의 침략으로 인하여 영토가 날로 줄어들어 이 때에는 이미 나라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후백제와 태봉과의 사이에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 되었으나, 王建은 한동안 온건한 정책을 취하여 고려왕으로 즉위하던 해 3월에 각처의 세력가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후한 예물과 겸손한 언사로써 화친의 뜻을 보이는 등 전쟁을 피하려고 하였다. 견훤도 이에 호응하여 같은 달에 一吉粲 閔郃을 보내어 왕건의 즉위를 축하해 오자, 왕건 역시 廣評侍郎 韓申一 등으로 하여금 이를 영접하게 하고 후례로 접대하였다. 또 견훤도 태조 3년(920)에 아찬 功達을 보내어 孔雀扇과 智異山 竹箭을 선물하고 태조 7년에도 사신을 보내어 絶影島 摠馬 1필을 선물하는 등 왕건에게 친선의 뜻을 표하였는데 이것은 물론 왕건을 회유하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왕건이 즉위한 후 7·8년 동안은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큰 충돌없이 일시적인 평화를 이룩하였다. 견훤은 신라에 대한 공격도 삼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에 대한 야심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려에 대해서 평화를 유지하면서 신라를 도모하려고 하였다. 태조 3년 10월 신라의 대아·구사 2군을 점령하고, 또 태조 8년 11월에는 고려와 볼모를 교환하여 평화조약을 맺고 동12월에 居昌 등 신라의 20여 성을 점령한 것이다.

마침내 태조 9년에 견훤의 볼모인 眞虎가 고려에서 병사한 것을 트집잡아 견훤은 고려를 공격하였으며,058)≪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9년 하4월 경진. 다음해에는 경주로 쳐 들어가 경애왕을 죽이는 등 신라와 고려에 대한 공격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와 후백제 두 나라는 쉴 새없는 교전 상태로 들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고려와 후백제의 정면 국경선이라 할 충청도의 중부선에서는 비교적 큰 변동이 없었던 데 비해, 신라의 세력권인 경상도 안동으로부터 상주를 거쳐 합천·진주에 이르는 낙동강 서부 일대에서는 혼전을 벌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충청도의 중부선인 운주·웅주 이북은 고려의 세력으로 고착되고 그 이남은 후백제의 세력으로 고착되었으므로 이곳에서는 서로 공격·점령이 힘들었던 반면, 아직 신라의 세력권이기는 하나 신라 정부의 쇠약으로 거의 독립상태인 각 군현을 쳐서 점령하는 것이 쉬웠으므로 그 외곽 일대가 전선으로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고려의 남진정책과 후백제의 동진정책의 충돌이었다. 왜냐하면 고려는 상주·합천·진주로 연결되는 경상도의 서변을 확보함으로써 후백제의 공격으로부터 신라를 보호하고 고려의 영향권으로 끌어 들이려는 것이고, 후백제는 상주·안동으로 진출하여 고려의 남진을 물리치고 신라를 후백제의 판도로 끌어 들이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태조 3년에는 강주(진주) 장군 閏雄이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태조 5년(922)에는 하지현(안동의 豊山面) 장군 원봉·명주 장군 순식·진보(청송의 진보면) 성주 홍술 등이, 태조 6년에는 京山府(또는 벽진군) 장군 양문이, 태조 8년에는 고울부(영천) 장군 능문이 각각 고려에 귀부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太祖 13년에는 재암성(청송의 진보) 장군 선필이 고려에 귀순하였으며, 또 동해안의 여러 주군이 고려에 귀순하여 興禮府(蔚山)에까지 이르니 왕건은 경주의 북쪽 50리 되는 곳에 昵於鎭(神光鎭)을 설치하고 스스로 이곳에 순행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신라는 경주 일원의 극히 좁은 영토만을 영유하는 명목만의 존재로 전락하였으며, 더욱이 태조 10년에 견훤이 경주를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敬順王을 세운 후로는 사실상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신라는 거의 1천년을 계속해 온 나라이며 또 삼국을 통일하여 200년이나 통치해 온 정통 왕실이었으므로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는 달리 처음부터 친신라정책으로 신라의 지지를 얻는 것이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 아래 항상 신라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며 후백제가 신라를 침략할 때에는 언제나 신라를 도왔다.

즉 태조 3년에 견훤이 步·騎兵 1만으로 대야성(陜川)을 쳐서 함락시키고 계속 진격하여 구사군까지 함락시키자 왕건은 신라에 원병을 보내어 견훤이 물러 가게 하였다. 또 고울부 장군 능문이 고려에 투항해 왔을 때 이를 달래어 그냥 돌려 보냈다는 사실이나, 견훤이 경주를 기습하였을 때에는 크게 분개하여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상하는 한편, 스스로 군사 5천을 거느리고 公山(大邱 동북)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구사일생 한 일도 있었다. 또 태조 13년에는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서로 만나기를 청하자 왕건은 50여 騎만을 거느리고 경주를 방문하여 신라의 군신들을 위로하고 신라인으로부터 부모를 대함과 같다는 칭송을 들었다.059)≪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4년 춘2월 신해.

이와 같은 왕건의 친신라정책으로 신라의 민심은 고려로 기울어지게 되었으며 각지의 성주들이 다투어 고려에 항복해 오는 가운데, 마침내 태조 18년에 이르러 경순왕은 군신과 의논하여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侍郎 金封休를 고려에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다. 왕건은 예의를 갖추어 이들을 맞이하고 장녀인 樂浪公主를 경순왕에게 시집 보내는 동시에 政丞을 삼아 태자의 상위에 두고 해마다 1천 석의 녹을 주었으며, 또 神鸞宮을 지어 경순왕의 거처로 하고 신라를 경주라 하여 경순왕의 식읍으로 삼았다. 한편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도 모두 등용하여 토지와 녹을 후하게 주었다. 56왕 992년을 유지해 온 신라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왕건은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전에서 견훤의 공격은 매우 맹렬하였다. 한때는 후백제의 세력이 오히려 강하여 각처에서 거센 공격을 가하므로 양국의 전선은 혼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060)≪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天成 3년 하5월·동 11월·天成 4년 추7월·長興3년 추9월).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1년 5월 경신·11월·12년 추7월 신사·10월·12월 및 권 2, 世家 2, 태조 15년 9월.

그러나 고려의 반격도 맹렬하였다. 태조 10년에 왕건 자신이 후백제의 龍州(醴泉郡 龍宮面)를 쳐서 항복받고, 같은 해에 운주에 들어 가 성주 兢俊을 격파하고, 또 近品城(聞慶郡의 山陽面)을 함락시켰다. 동년 4월에는 海軍將軍 英昌과 能式 등을 보내어 수군으로 강주 관내의 轉伊山·老浦·平西山(이상 모두 南海郡 소속)·突山(麗水의 突山島) 등 네 고을을 쳤으며, 동년 7월에는 대야성을 격파하고 후백제의 장군 鄒許祖 등 30여 인을 사로 잡았는데, 대세는 고창(안동)의 싸움에서 결판나게 되었다. 태조 12년 12월 견훤은 군사·교통의 요지인 고창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왕건은 이곳을 구원하기 위해 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과 전략회의를 열어 대비책을 마련하었다. 이때 庾黔弼은 만약 서둘러 진군하여 고창군을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에 갇혀 있는 3천여 명이 위급할 것이기 때문에 먼저 자신이 진군하여 적을 공격하겠다고 하여, 태조의 명을 받고 곧 猪首峯으로부터 진격하여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군이 고창군에 들어 올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았다. 이에 태조가 거느린 고려군은 고창군에 들어 가 그곳을 지키던 군대와 합류하였고 이듬해 정월 태조는 고창군 병산에서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견훤의 군대와 결전을 벌여 이를 크게 격파하고 후백제의 군사 8천여 명을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니, 이에 영안(안동군 吉安面)·하곡(안동군 臨河面)·직명(안동군 一直面)·송생(청송) 등 30여 군현이 항복하여 오게 되었다.061)≪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3년 정월 병술·경인 및 권 92, 列傳 5, 庾黔弼.

결국 후백제의 동진정책은 좌절되고 대세는 고려 측에 유리하게 되어 후백제는 신라의 외곽전선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고려는 후백제의 정면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태조 15년(932) 왕건 자신이 一牟山城(淸原郡 文義面)을 크게 격파하고 웅진 이북 30여 성의 항복을 받았다.062)≪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5년·17년 9월 정사.

한편 후백제는 내부의 정세도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태조 18년 견훤의 장자 神劍 등은 견훤을 金山寺(金堤郡)에 유폐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과거의 기록에서는 견훤이 제4자인 金剛을 편애하여 왕위를 금강에게 물려 주려 하였기 때문에 장자 신검이 아우인 良劍·龍劍과 모의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하였으나063)≪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8년 춘3월.
≪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앞서 본 바와 같이 대세가 기울어지게 되자 견훤은 고려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려 한 데 반하여 신검 등은 對高麗 강경책을 견지하려 한 데서 나온 내분이었던 것이다. 후백제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용검·양검에게 “후백제의 군사력이 고려에 비해 갑절이나 많으나 오히려 점차 불리해져 민심이 고려로 돌아 가니 왕건에게 귀순하여 신변을 보전함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여 고려와 타협할 뜻을 비치자 伊飡 能奐, 波珍飡 新德·英順 등이 견훤의 아들 신검·용검·양검과 모의하여 신검을 왕에 추대하고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다.

그 해 유폐당한 지 3개월이 지난 뒤에 견훤은 季男 能乂, 딸 哀福 그리고 애첩 姑比 등과 함께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의 영역인 錦城(나주)으로 달아나 왕건에게 귀부하였다.064)≪三國遺事≫권 2, 紀異 2, 後百濟 甄萱 병신 정월.
≪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태조 왕건은 장군 庾黔弼·대신 萬歲 등을 시켜 바닷길로 견훤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견훤을 맞아 들인 후 견훤을 尙父라 칭하고 남궁에 살게 하고 자리를 백관의 위에 두었다. 또 楊州를 식읍으로, 금과 비단 그리고 노비 각 40인과 말10필을 하사하고 후백제에서 온 信康을 衙官으로 삼아 견훤을 보좌하게 하였다.065)≪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8년 6월.

태조가 견훤을 이와 같이 각별히 우대한 것은 민심을 모으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백제의 내부 분열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태조 19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인 朴英規가 고려에 항복을 청하였다. 박영규는 사람을 보내어 태조가 만약 후백제를 치게 되면 내응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같은 해 여름 6월 태조는 견훤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후백제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하여 우선 正胤(태자) 武와 장군 述希를 시켜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天安府로 가게 하였다. 9월에는 태조가 친히 3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가서 병력을 통합하여 一善郡(善山)으로 진군함으로써 후백제와 최후의 대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후백제의 신검도 이에 맞서서 대군을 이끌고 북상해 갑오일에 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양국이 대치하였다.

태조는 견훤을 비롯하여 대상 堅權·述希·皇甫金山, 원윤 康柔英 등으로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고, 支天軍 대장군 원윤 能達·奇言·韓順明·昕岳, 정조 英直·廣世 등은 보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좌익으로 삼고, 대상 金鐵·洪儒·朴守卿·원보 連珠, 원윤 萱良 등은 기병 1만을 거느리게 하고, 補天軍 대장군 원윤 三順·俊良, 정조 英儒·吉康忠·昕繼 등은 보병 1만을 거느리게 하여 우익으로 삼았으며, 명주 대광 王順式, 대상 兢俊·王廉·王乂, 원보 仁一 등은 馬軍 2만을 거느리게 하고, 대상 庾黔弼, 원윤 官茂·官憲 등은 黑水·達姑·鐵勒 등 북방 민족의 정예 기병 9천 5백을 거느리게 하고, 佑天軍 대장군 원윤 貞順, 정조 哀珍 등은 보병 1천을 거느리게 하고, 天武軍 대장군 원윤, 宗熙 정조 見萱 등은 보병 1천을 거느리게 하고, 杆天軍 대장군 金克宗, 원보 助杆 등은 보병 1천을 거느리게 하여 중군을 삼았으며, 대장군 대상 公萱, 원윤 能弼, 장군 王含允 등은 기병 3백과 여러 성에서 온 군사 1만 4천을 거느리게 하여 3군의 援兵을 삼았다.

이와 같이 태조의 3군 병력은 총 4만 3천 명으로 특히 중군 3천은 태조의 신변을 보호하는 친위부대로서의 역할이 주임무였다. 그밖에 3군의 원병으로 대장군 공훤 등이 지휘하는 기병 3백과 여러 성의 군사 1만 4천 7백 등 도합 1만 5천 명이 따로 편성되어 있었다. 위의 3군과는 별도로 지방 호족과 북방 민족의 독립부대가 참여하고 있었는데 명주 대광 왕순식 등이 지휘하는 마군 2만과 유금필 등이 지휘하는 흑수·달고·철륵 등 북방 민족의 9천 5백의 병력 등 고려의 총병력은 8만 7천 5백 명이나 되었다. 이제 후백제는 고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고려의 대군이 북을 울리며 전진하자 후백제의 좌장군 孝奉·德述·哀述·明吉 등이 고려의 군세가 굉장한 것을 보고 투구를 벗고 창을 던져 버린 다음 견훤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후백제군은 사기가 떨어져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태조가 효봉 등을 위로하고 신검이 있는 곳을 묻자 효봉이 말하기를 “신검이 중군에 있으나 좌우로 공격하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태조가 즉시 대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후백제의 중군을 들이치게 한 뒤 3군이 일제히 나아가 맹렬하게 공격하니 후백제군은 크게 무너졌다. 이 싸움에서 후백제의 장군 昕康·見達·殷述·令式·又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 명을 사로잡고 5천 7백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고려군은 계속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黃山郡(論山)에까지 이르렀고, 炭嶺을 넘어 馬城에 주둔하였다. 이때 후백제의 신검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아우 양검·용검과 문무관료들을 데리고 와 항복하였다.066)≪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9년 하6월·추9월.

後百濟는 견훤이 나라를 세워 完山(全州)에 도읍하고 옛 백제의 부흥을 도모한지 4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후백제를 무너뜨린 태조는 곧 수습책과 함께 전후 문제를 처리해 나갔다.

우선 앞서 사로 잡은 3천 2백 명의 후백제 병들을 모두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 보내고 흔강·富達·우봉·견달 등 40명만 그들의 처자와 함께 개성으로 데려 왔다. 그리고 태조는 신검을 부추겨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킨 능환을 면대해 꾸짖었다.

처음부터 양검과 공모하여 임금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너희 짓이니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9년 추9월 갑오).

태조는 능환을 목베게 하고 양검·용검은 眞州로 귀양을 보냈다가 얼마 뒤에 죽였다. 신검은 처음에 왕위에 오른 것이 타의에 의해 이루어졌고 지은 죄도 두 아우보다 가벼우며, 항복한 점을 고려하여 처벌하지 않았으나 뒤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태조는 후백제의 왕도였던 완산에 들어 가 명령을 내리기를 “적의 괴수들은 이미 항복해 왔으니 나의 赤子(백성)들을 범하지 말라”고 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에 따라 등용하였다. 이러한 군령은 엄격하게 지켜졌고, 백성들의 재물에 대해 어느 누구도 범하지 못하게 함에 따라 각 주현이 편안해졌다. 이에 백성들은 모두 태조를 따랐다.067)위와 같음.

태조 왕건은 전장에서 말을 달리기 40년만에 드디어 後三國을 통일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가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상 최대의 내란기였던 후삼국 시대는 약 50년 만에 수습되고 새로운 통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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