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1. 고려의 건국과 호족
  • 3) 태조의 여러 시책
  • (2) 대외정책

가. 외교정책

高麗의 외교정책은 어디까지나 후백제를 겨냥한 것이었다. 태조는 후백제와 우호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하면서 백성을 편안케 하고 국력을 신장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견훤의 태도는 초기에는 고려와의 평화 유지에 협조하는 듯했으나 대체로 항상 공세를 취하는 입장에 있었고, 특히 신라 및 그 영토 내의 여러 지방세력들을 무력으로 점령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와 후백제는 외교관계가 서로 단절되고 무력 대결하는 상태로 일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신라에 대한 외교이며 그밖에 부수적 존재로 중국과 일본을 들 수 있다.

신라의 외교적 향배는 고려·후백제 간의 군사적 우열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후백제가 무력적 공세를 취하고 있는 이상 그 자체만도 고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세력인데 신라까지 후백제에 가세한다면 그것은 고려로서 크게 우려되는 사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외교적으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외교전의 초점은 신라를 고려·후백제·신라의 삼각관계에서 고려·후백제 양국이 모두 노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있어서의 고려의 외교정책은 크게 보면 後百濟 孤立政策이요 작게 보면 親新羅政策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친신라정책은 후백제 고립정책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이며 또한 그 핵심이 되는 것이었다.

태조가 외교정책에 있어서 후백제 고립정책을 채택하게 된 것은 외교관계의 여하에 따라서 군사적 우열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태조는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위의 모든 세력을 가능하면 고려쪽으로 끌어 들이고 후백제와는 격리시킴으로써 후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 하였으니 이것이 태조의 통일정책의 일단이 되는 것이다.

후백제의 입장에서 외교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크게 네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북쪽의 고려, 동쪽의 신라, 남쪽의 일본 및 서쪽의 중국이었다. 이 중 북쪽의 고려는 후백제와 서로 대립하여 패권을 다투는 당사자들이므로 재론할 여지가 없고 나머지 세 방면과의 관계를 살펴 보기로 한다.

편의상 먼저 중국과의 관계를 살펴 보면 역대로 중국에 강력한 국가가 나타나면 우리 나라가 군사적 침략을 받게 되며 특히 통일제국이 등장하면 그 피해가 커지게 된다. 예를 들면 漢帝國에 의하여 漢四郡이라는 식민지가 설치되었으며 隋帝國에 의하여 隋 煬帝의 막심한 침략을 경험하게 되고 唐帝國에 의하여 唐 太宗의 침입 내지 백제·고구려의 멸망을 경험하였던 것이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 태조로서는 중국과의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는 중국이 五代十國時代로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쪽으로 군사적 압력을 가해 올 가능성은 희박하였고, 따라서 중국과의 관계는 크게 염려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의 정세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런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설사 중국쪽에서 군사적 압력을 가해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외교관계의 여하가 우리 나라의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양국의 중국과의 관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견훤도 마찬가지여서 견훤은 중국의 왕조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즉 900년 견훤이 後百濟王을 칭한 후 사신을 吳越國에 보내어 朝聘한 것을 비롯하여, 918년에 사신을 吳越에 보내고, 925년에는 사신을 後唐에 보내는 등073)≪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光化 3년·貞明 4년·同光 3년). 중국과의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후백제가 900년 이래 세 차례 오월·후당 등에 조빙하였을 때에 상대방으로부터 報聘 또는 외교적 승인을 받았으며, 또한 927년 11월에는 오월국왕이 사신을 후백제와 고려에 보내어 양국이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지낼 것을 권유한 일도 있었던 것이다.074)≪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天成 2년 12월·3년 정월).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0년 12월·11년 춘정월.
≪高麗史節要≫권 1, 태조 10년 12월·11년 춘정월.

이러한 까닭에 고려 태조는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며 특히 북중국과의 관계에 더욱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우리 나라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행동은 언제나 북쪽으로부터 벌어졌던 점에서 북쪽에 가까운 고려로서는 당연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태조는 즉위 6년(923)에 福府卿 尹質을 後梁에 사신으로 보낸 것을 비롯하여,075)≪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6년 하6월 계미. 後唐이 성립된 다음에는 태조 9년 張彬을, 태조 10년에는 林彦을,076)≪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9년·10년. 또 태조 15년에는 大相 王仲儒를 각각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는 등077)≪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5년. 노력을 기울인 결과, 태조 16년 3월에 후당에서 太僕卿 王瓊과 大府少卿 楊昭業을 사신으로 고려에 보내 와 태조를 고려왕으로 책봉함으로써 외교적인 승인을 얻는 동시에 ‘抹馬利兵하여 견훤의 세력을 좌절시켰다’고 하여 태조를 칭송케 하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078)≪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6년 춘3월 신사. 태조 18년(935)에는 禮賓卿 邢順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는 등079)≪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8년. 중국과의 외교를 긴밀히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태조의 대중국 교섭 상대는 거의 북중국의 왕조였는데 그것은 북쪽에 위치한 고려의 입장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중국의 왕조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또한 당시의 중국 형세가 후량·후당 등 북중국에 위치한 五代諸國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고 할 수 있다. 태조의 이러한 외교적인 노력은 결국 중국의 여러 왕조를 후백제로부터 분리 차단시키고 고려쪽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중국왕조들이 군사적인 면에서 후백제를 원조하거나 고려를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후백제가 남중국의 오월 등에 사신을 보내어 조빙했을 때에 오월국이 보빙했다 하더라도 오월국이 특별히 고려에 대하여 적대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며, 그것은 927년에 오월국 왕이 후백제와 고려에 각각 사신을 보내어 양국이 서로 화친할 것을 권고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080)註 73)과 같음. 그리고 오월국과 고려와도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은, 태조 2년 9월에 오월국 文士 酋彦規가 고려에 내투하고 태조 6년 3월에는 역시 오월국 문사 朴巖이 고려로 내투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081)≪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2년 9월·6년 하6월 계사. 뿐만 아니라 당시의 중국세력의 중심은 북중국의 5대였고 남중국의 한 지방세력인 오월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의 대상이 못되는 것이었다.

반면에 중국의 중심세력인 북중국에 대하여 견훤도 925년에 사신을 後唐에 보내어 조빙했던 일이 있었으나, 고려 태조가 926년 등 자주 사신을 후당에 보내어 교섭한 결과 드디어 933년에는 후당에서 왕경 등을 보내어 고려를 외교적으로 승인하여 완전히 고려쪽에 기울어졌던 것은 태조의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고려의 입장은 중국세력이 고려·후백제의 양국 관계에 외교적·군사적으로 불간섭 내지 중립만 지켜도 충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대중국관계 외교는 고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다음 日本과의 관계를 살펴 보면 일본은 역대로 신라와 같은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침략을 자행하면서도 百濟와는 늘 친선관계를 유지하여 백제가 곤경에 처하게 되면 군사적으로 이를 도왔던 경우가 있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 왕족 福信이 僧 道琛과 함께 일본에 가 있던 古王子 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고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켜 羅唐 연합군과 격전을 벌였을 때, 倭國兵船 400척이 와서 백제를 도와 싸우다가 패퇴한 일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견훤도 후백제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다음에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를 맺고자 하여 922년에 輝嵒을 일본에 보내어 수호를 청하였고 929년에는 張彦澄을 역시 일본에 보내어 통교를 구하였으나,082)≪扶桑略記≫24 裡書, 延喜 22년 6월 5일·延長 7년 5월 17일·21일.
≪本朝文粹≫12, 牒(答新羅返牒).
일본에서는 두 번 다 받아 들이지 않고 對馬島에서 그냥 돌려 보냄으로써 실패로 돌아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태조는 전례도 있고 하여 후백제와 일본과의 외교관계의 성립 내지는 이로 인한 군사동맹의 성립 가능성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고려 태조는 후백제의 일본 왕래를 방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후백제가 일본을 왕래하는 통로가 되는 남해안의 봉쇄였다. 남해안의 봉쇄라 하여 船隻으로써 해상을 막는 것은 아니었다. 남해와 연결되는 전라도의 남해안 지방을 점령하여 자동적으로 남해로의 진출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고려 태조가 군사적으로 전라도의 남해안을 점령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에서 다루기로 하겠지만, 고려 태조는 실제로 전라도의 남해안 지방을 점령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후백제가 일본에 직통으로 연결되는 출구를 막기 위해서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노력은 후백제와 일본과의 왕래를 차단하고 양국의 외교관계 성립을 방해하여 후백제를 일본으로부터 고립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新羅와의 관계를 보면 이것은 고려의 친신라 외교정책을 특징지우는 것이며 이러한 고려의 친신라정책은 바로 고려 태조의 후백제 고립정책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중국이나 일본과의 외교관계보다도 직접 경계를 맞대고 있는 신라야말로 그 외교관계의 여부에 따라 후삼국 쟁패전의 대세를 좌우하는 중대한 뜻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라에 대한 외교적 향배가 바로 군사적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전혀 비교할 상대가 못될 정도로 중대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신라는 하나의 세력이 아니었다. 신라 중앙정부의 세력은 너무나 미약해서 신라 판도 내의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어버리고 각 군현들이 모두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 지방세력과 중앙정부와의 연계력은 극히 희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 판도 내의 각 지방세력은 거의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해서, 형식적으로 신라정부에 복종하거나, 또는 완전히 독립적인 행동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려나 후백제와 손잡는 등 각양 각색의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남에 따라 더욱 심해져서 후삼국 말기쯤에는 지방세력의 대다수가 고려나 후백제와 연결되어 있었고 신라에 복종하는 세력은 별로 없다시피 되었다. 신라는 경주 일원의 아주 좁은 판도만을 유지하는 세력으로 축소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신라 중앙정부인 신라 왕실의 세력이 매우 미약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천년을 유지해 온 왕조로서의 명분이 있고 또 왕실로서의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 태조로서는 신라정부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외교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신라정부의 향배에 따라서는 비록 서로 유대관계가 미약하기는 하지만 신라 판도 내의 여러 지방세력의 향배에 미치는 효과가 큰 것이기 때문에 신라정부를 고려쪽으로 끌어 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려 태조가 신라 왕실을 그렇게 애써서 위로하고 원조한 원인이었다. 그리고 신라 판도 내의 각 지방세력은 각각 나름대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모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었다.

고려 태조가 대외적으로는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대내적으로는 유화정책을 써서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은 위에서 고찰했던 바이다. 즉 고려정권 안의 여러 호족들로부터 신임과 협조를 얻어서 왕권이 안정되고 국력이 충실해지고 있었고 또 각처의 많은 호족들이 來附해 와서 고려의 국세가 외부로 퍼져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 태조가 신라 판도 내의 여러 세력을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견훤이 무력주의였던 데 비해 고려 태조는 평화주의였으므로 각처의 세력들은 고려 태조쪽에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후백제의 군사적 압력을 독자적으로 물리칠 힘이 부족한 신라로서는 원조를 얻기 위해서도 고려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 태조가 평화주의적 외교정책을 써서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은 상술한 바이지만 여기서 좀더 살펴 보기로 하겠다.

고려 태조는 즉위 3개월째인 원년(918) 8월에 각처로 사신을 파견하여 후한 예물과 겸손한 말로써 화친의 뜻을 보이자, 각지의 많은 호족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고려에 귀부해 오는 자가 많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고려 태조의 대외적 평화주의 표방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고려 태조는 평화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후백제와의 외교적 노력에 의하여 7∼8년 동안 거의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를 누려 왔다.

즉 고려 태조 원년 9월 尙州賊帥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어 귀부하였는데 상주는 당시 후삼국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충적 위치에 있는 지점으로서 상주가 귀부한 것은 고려로서는 외교적으로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상주의 사자가 왔을 때에 태조가 의례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도록 명하고 또 그 영접식의 예행 연습까지 한 것으로 보아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태조 3년(920) 정월에는 康州將軍 윤웅이 귀부하는 동시에 그의 아들 일강을 보내어 볼모로 삼게 하자 태조는 일강을 阿粲으로 삼는 동시에 郎中 春讓을 강주(진주)로 보내어 귀부를 慰諭케 하였다. 또한 태조 5년 6월에는 下枝縣(安東의 豊山) 장군 원봉이 내투하였고 동 11월에는 眞寶(靑松郡) 성주 홍술이 사신을 보내어 귀부하기를 청하였다. 이어서 태조 6년 8월에는 碧珍郡 장군 양문이 내부하고, 동 8년 10월에는 高鬱府(永川) 장군 능문이 사졸을 거느리고 내투하였다. 이 때에 태조는 능문을 그 성이 신라 왕도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 하여 위로만 하고 돌려 보냈지만,083)≪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3년 춘3월·5년 6월 정사·11월 신사·6년 춘3월 갑신·추8월 임신·동10월 기사·동11월 무신. 능문이 태조의 의기와 도량에 대하여 더욱 감격하고 고려에 기울어졌을 것은 쉽게 짐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태조 10년 8월에 태조가 강주에 순행하러 갈 때에 高思葛伊城(聞慶) 성주 興達이 귀순하였고, 동 13년 정월에는 載巖城(청송군 진보면) 장군 선필이 내투하였고, 동 2월에 태조가 昵於鎭(迎日郡 神光面)에 幸行하였을 때에 北彌秩夫(迎日郡 義昌面) 성주 萱達이 南彌秩夫 성주와 함께 내항하였고, 동 9월에는 皆知邊(蔚山)에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다.

이상과 같이 고려 태조가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신라 판도 내의 수많은 세력을 고려쪽으로 끌어 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신라판도 내의 각 지방세력과 고려와의 외교적 관계에 관한 것이고 이제 신라세력의 핵심적 존재인 신라 왕실과의 관계를 살펴 보기로 한다.

고려 태조의 신라 왕실에 대한 외교정책이 친신라정책이라 함은 앞에서 기술한 대로이다. 태조가 친신라정책을 써서 신라 왕실의 환심을 삼으로써 신라가 외교적으로 후백제에 기울어지는 것을 막으면서 아울러 고려로 끌어 들이려고 하였다. 그는 궁예가 극도의 반신라정책을 써서 신라를 적대시하던084)≪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天復 원년·天祐 2년).
≪高麗史≫권 1, 世家 1, 太祖紀 前文.
방식을 버리고 즉위 초부터 친신라적 태도를 표명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가 즉위 직후에 각처로 사신을 파견하여 값진 폐백과 스스로를 낮춘 언사로 惠和의 뜻을 보였을 때 신라에도 마찬가지로 사신이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태조의 이러한 평화주의적인 외교정책에 대한 신라측의 반응은 태조 3년 정월에 신라정부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한 것이 처음이다. 이 해 10월에 견훤이 출병하여 신라의 大良(합천)·仇史(경산?) 2개 군을 침공하였을 때, 신라의 요청에 따라 고려 태조가 원병을 보내어 견훤의 군사를 물러 가게 함으로써 고려의 친신라정책은 확연해진 것이며, 그것이 단순한 외교적인 친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백제로부터 무력적 공격을 받으면 군사원조까지도 제공하는 일종의 군사동맹까지 포함하는 성질을 띄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태조 7년 9월에 신라 景明王이 죽고 景哀王이 즉위하였는 바 신라에서 사람을 고려에 보내어 喪을 알리자 태조는 弔問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085)≪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7년 9월. 한편 태조 8년 10월에 고울부 장군 능문이 고려에 내투하였을 때에 그 성이 신라 왕도의 입구가 되는 곳이라 하여 위로만 하고 돌려 보낸 것도 고려의 신라에 대한 큰 호의의 표시로서 예의있는 조처였던 것이다.

그런데 태조 8년 10월 태조와 견훤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曹物郡에서 대치하였다가 평화조약을 맺었을 때에 신라왕은 사신을 보내어 “견훤은 이랬다 저랬다 하여 속임수가 많기 때문에 화친해서는 안됩니다”고 권고한 일이 있다. 또 이듬해에는 견훤의 質子 眞虎가 고려에서 병사하자 견훤이 고려에서 살해한 것이라고 트집잡아 고려로 쳐들어 왔을 때, 태조는 굳게 지키고 싸우지 말라 하였는데, 이 때에도 신라왕은 사신을 보내어, “견훤이 조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돕지 아니할 것입니다. 대왕이 견훤을 치면 견훤은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하고 싸울 것을 권하였다.086)≪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8년 동10월 을해·9년 하4월 경진.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신라쪽에서는 고려가 무력으로 후백제를 견제하고 타도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듯싶다.

이어서 태조 10년 정월에 태조가 후백제의 龍州(醴泉郡 龍宮面)를 親征할 때에 신라왕이 군사를 보내어 원조하였고,087)≪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0년 춘정월 을묘. 동년 9월에 견훤이 영천을 거쳐 신라 왕도로 쳐들어 가자 태조가 侍中 公萱 등에게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가서 원조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견훤은 고려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신라의 서울을 기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왕의 외사촌 아우 金傅를 세워 왕을 삼은 후, 왕의 아우 孝廉과 宰臣 英景 등을 포로로 하고 자녀·백공·병장·진보를 모조리 빼앗아 가지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가 격노하여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문하는 동시에 친히 정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대구의 公山 桐藪에서 견훤을 공격하여 싸우다가 패전하여 고려의 大將 申崇謙과 金樂이 전사하고 태조는 겨우 단신으로 살아 도망했던 것이다.088)≪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0년 9월. 그러나 이 공산 동수싸움에서는 비록 고려군이 패전하였으나 이 무렵에는 이미 양국의 군사적 비중이 고려쪽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견훤이, 신라 왕도의 습격같은 여론에 나쁜 영향을 미칠 서투른 사건을 저지를 정도로, 초조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태조 13년(930) 양국의 안동대결전에서 견훤이 대패하고 永安(안동군 풍산면)·河曲(안동군 임하면?)·直明(안동군 일직면)·松生(청송군) 등 후백제쪽의 30여 군현이 고려에 항복한 것으로089)≪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2년 12월·13년 춘정월 병술·경인.
≪高麗史節要≫권 1, 太祖 12년 12월·13년 춘정월. 그런데≪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慶尙道 東京留守官 蔚州에는 河曲이 蔚山이라고 하였으나 전후 사정으로 보아 하곡은 安東의 臨河面일 듯하다.
증명되는 것이다.

태조 10년 견훤의 신라 왕도에 대한 기습사건과 태조 13년 안동싸움의 결판으로 신라 왕실은 더욱 고려쪽에 기울어지고 의지하게 되었다. 즉 안동싸움이 끝나고 후백제쪽에 속해 있던 30여 군현이 고려에 항복한 다음달인 2월에 고려왕이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안동의 승전을 알리자, 신라왕은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보빙하는 동시에 고려 태조와 서로 만날 것을 청하였으며 다음해 2월에도 다시 사신을 보내어 고려왕과 만날 것을 청하였던 것이다.090)≪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3년 2월 을미·권 2, 世家 2, 太祖 14년 춘2월 정유. 태조는 같은 달 신해일에 다만 50여 기만을 거느리고 신라 왕도를 방문하여 신라의 군신과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화친관계를 더욱 굳게하고 3개월만에 돌아 갔다. 이 때에 신라의 士女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저번에 甄氏가 왔을 적에는 豺虎를 만남과 같더니 이번에 王公이 온 것은 부모를 본 것과 같다고 하였다는 것은091)≪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4년 춘2월 신해·하5월 계미.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리하여 고려 태조는 신라왕실을 완전히 고려쪽으로 끌어 들여 그의 보호 하에 두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은 그의 친신라정책이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서 후백제와의 외교전에서 일대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고려 태조의 이러한 친신라정책의 성공은 바로 그의 후백제 고립정책이 완성된 것으로 견훤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더욱 무력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태조 12년 10월에는 후백제의 一吉干 廉昕이 고려로 투항해 오고, 동 15년 6월에는 후백제의 유력한 호족 중의 하나인 龔直이 고려로 항복해 오고, 동 18년에는 견훤 자신까지 고려로 귀순해 오게 됨으로써,092)≪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12년 동10월 병신·권 2, 世家 2, 태조 15년 6월 병인·18년 춘3월·하6월 및 권 92, 列傳 5, 龔直. 後三國의 외교전은 결말이 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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