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1. 고려의 건국과 호족
  • 4) 태조의 정치이념과 사상
  • (1) 고구려 계승이념

(1) 고구려 계승이념

王建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高句麗의 계승자였다. 弓裔는 순전히 그의 정치적 목적에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였으므로 그의 세력이 강대해지고 국가의 기초가 확고해지자 (後)高麗란 국호를 摩震·泰封으로 고치고 말았으나, 왕건은 (후)고려란 국호를 다시 채택하고 장차 국도를 平壤으로 삼고자 당시 폐허가 되어 잡초가 무성한 평양을 개척하였다. 또한 북진정책을 통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동족인 渤海의 유민을 받아 들여 후대하는 시책을 통해 고구려의 부흥과 재현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는 왕건이 고구려의 후예인 점이나114)朴漢卨,<高麗王室의 起源>(≪史叢≫21·22, 1977) 참조. 당시 한반도 중·북부지방 주민의 주류가 고구려 유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점에서 보다 분명한 고려의 통치 지도이념으로 자리를 잡고 실천에 옮겨졌던 것이다.

≪高麗史≫나≪高麗史節要≫의 태조 원년 6월 병진조에 보면 “太祖가 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高麗라 하고 天授로 연호를 고쳤다”라 하여 태조가 즉위하면서 국호를 고려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資治通鑑≫권 271, 梁 鈞王 龍德 2년 12월에 “太封王 躬乂는 성격이 잔인하여 海軍統帥 왕건이 그를 죽이고 자립하면서 다시 高麗王을 칭하였다”라 하고, 또≪海東繹史≫권 12, 世紀 12, 高麗 1, 後梁 均王 龍德 2년에도 이를 인용하여 “大封王 躬乂(東史에 보면 太封은 泰封이라 짓고 躬乂는 弓裔라 지음)는 성격이 잔인하여 해군통수 왕건이 그를 죽이고 자립하면서 다시 고려왕을 칭하였다”라 하여 왕건이 즉위하여 다시 고려왕을 칭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다시 고려를 칭하였다’고 한 것이 옛날 고구려로부터 칭하였다는 것인지 또는 궁예의 (後)高句麗로부터 칭하였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태조의 입장으로서는 옛 고구려로부터의 復稱이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궁예가 처음 건국하였을 때에 국호를 고려라 하다가 얼마 후에 마진·태봉으로 고침으로써 애초의 고구려 부흥이념을 버렸기 때문에, 고구려 부흥과 계승을 이념으로 삼았던 왕건이 궁예의 고구려 부흥의 표방 사실을 묵살하고 자기야말로 진정한 고구려의 부흥자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도 스스로를 연결시켜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궁예가 고려를 칭했던 사실이≪高麗史≫등 官撰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 조정에서 고의로 이를 묵살하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주는 것으로도 짐작된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고려라는 국호가 고구려를 줄여서 부르는 것이요, 또 고구려와 고려는 완전히 단절된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으나 중국인은 옛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려라는 국호를 고구려와 같은 것으로 여기어 고구려도 흔히 고려로 혼용해 왔고 또 우리가 말하는 고려왕조와 고구려가 그대로 연결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明史≫권 320, 列傳 208, 外國 1, 朝鮮傳에 “朝鮮은…漢나라 이전에는 朝鮮이라 하다…漢나라 말기 扶餘사람 高氏가 나와 그 땅을 근거로 삼아 국호를 고쳐서 高麗라 하였고 또는 高句麗라고도 하여 平壤을 차지하고 살았다”라 했다. 또 唐나라 초엽에 편찬된≪隋書≫권 81, 列傳 46, 東夷傳에 삼국을 高麗·百濟·新羅로 기록하고 그 高麗條에 “高麗의 선조는 扶餘로부터 나와…朱蒙이 나라를 세워 스스로 高句麗라 하고 高로써 성씨를 삼고…湯을 다시 사신으로 보내 궁궐을 방문하여 大將軍에 올려 주고 高麗王으로 바꾸어 책봉하다”라 하여 고구려와 고려를 구별없이 쓰고 있으며 또≪高麗圖經≫을 비롯한 중국의 각종 사료에서는 모두 고려에 관한 기록을 고구려로부터 기술하기 시작하여 고구려와 고려가 연결된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三國遺事≫王曆에서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하고 또 궁예가 세운 태봉을「後高麗」라 하고「辛酉稱高麗」라 하여 분명히 고구려를 고려로도 표기하고 있어서 당시에는 우리도 고구려와 고려를 구별없이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고려인은 자기네와 고구려가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왕건이 즉위 후에 국호를 고려라 했다는 것은 바로 고구려를 칭했다는 얘기와 마찬가지가 된다. 원래 궁예가 처음 건국하였을 때에도 국호를 고려(즉 고구려)라고 하였다. 즉 상술한 바와 같이≪三國遺事≫王曆의 國名欄에는 궁예의 나라를「後高麗」라 하고 또 辛酉稱高麗라 하여 궁예가 (후)고려 즉「(후)고구려」를 칭하였던 것을, 善宗(궁예)이 신유년(901)에 왕을 칭하면서 자기의 건국이 고구려의 멸망과 관련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지난날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으므로 옛 平壤의 구도읍은 내버려져 수풀이 우거지게 되었으니 내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三國史記≫권 50, 列傳 50, 弓裔, 天復 원년 신유).

궁예는 자기가 엄연한 신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후예를 자칭하고 고구려의 부흥과 계승을 주장하며 (후)고구려를 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의 행위는 순전히 그가 권력을 잡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서 나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정권이 안정된 것으로 보이는 904년 이후에는 국호를 마진·태봉 등으로 고치는 동시에 또 고구려의 부흥과 계승을 강력히 주장하였을 왕건의 세력 기반인 開城을 떠나 다시 鐵圓(鐵原)으로 환도함으로써, 고구려 계승의 표방은 자취를 감추고 궁예 개인의 위대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갔던 것으로 보이며 또 이 사실이 궁예의 몰락에 간접적인 한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태조가 국호를 다시 고려로 한 것은 중단된 고구려 부흥운동의 재개로서 이것은 궁예의 경우에서와 같이 현실적인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며, 그의 출신이 말하여 주는 것처럼 진정한 의미의 고구려 부흥의 표시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고려의 서울을 開京으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정책 내지 북진정책이 희박해진 이후를 기준으로 해서 정착된 인식이지, 이념적인 측면에서 보나 실제적으로 고려 태조가 북진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나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평양을 중심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資治通鑑≫권 271, 梁 鈞王 龍德 2년에 태조 왕건이 즉위하여 “開州로써 東京을 삼고 平壤으로써 西京을 삼다”라 하여 동경인 개주(개성)와 서경인 평양의 兩京制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개경이 현실적으로 수도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경을 포함하여 양경으로 말한 것이다. 즉 태조가 즉위하던 해 9월에 군신에게 평양에 대한 관심을 아래와 같이 표하였다.

平壤 옛 서울이 황폐되어 비록 오래 지났더라도 그 터는 여전히 남아 있다(≪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9월 병신).

이 때에 ‘평양 옛 서울’이라 하면서도 고구려란 말을 쓰지 않은 것은 고구려와 고려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있는 같은 나라라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태조는 평양을 大都護府로 하고 사촌 아우인 王式廉과 廣評侍郞 列評으로 하여금 그 땅을 지키게 하였으며 자신의 세력기반이었던 黃州·鳳州·海州·白州·鹽州 등의 민가를 평양에 옮기도록 하였다. 이어 태조 2년(919)에는 성을 쌓고 얼마 후에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시켰고, 태조 5년에는 서경에 행차하여 관청과 관원을 새로 배치하고 在城을 쌓았으며, 태조 13년에는 세 차례나 서경에 순행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태조 21년에는 서경의 羅城을 쌓았다. 그리고 태조 4년 이후 거의 해마다 가는 등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평양의 재건에 힘썼다. 태조 15년 5월에 왕은 군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시하였다.

요즈음 西京을 온전히 증축하여 민가를 옮기고 충실히 한 것은 그 지방이 지닌 힘에 기대어 三韓을 평정하기 위함이다. 장차 거기에 도읍하고자 한다(≪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5년 5월 갑신).

당시 남방에서는 신라의 포섭 및 후백제와의 쟁패전으로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태조가 서경 개척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평양이 한갓 이념상의 도읍이 아니라 현실적인 國都로 삼기 위한 준비로서, 또한 그곳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의 옛 땅, 즉 東明의 옛 강토를 수복하려는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 26년 임종에 가까와 남긴「訓要10條」중 제5조에서도 태조는 서경을 중시하고 해마다 2·5·8·11월에 왕이 그곳에 가서 100일 이상씩 머물 것을 말하는 등 후대의 왕들에게까지 평양을 중요시 할 것을 부탁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은 그대로 지도층의 이념이 되었던 것이다.115)≪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하4월.

이렇게 서경을 중요시하고 여러 가지 시설을 확충하면서 서경을 북방 개척의 전진기지로 삼아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서북 지역을 개척하였다. 그리하여 서쪽은 淸川江 유역까지 동쪽은 永興에 이르는 선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한편으로 고구려 계승이념 및 북진정책 등과 결합시켜 태조는 渤海의 유민을 받아 들이고 후대하였다. 발해는 원래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遺將인 大祚榮이 동쪽으로 가서 건설한 나라로서, 그 주민의 하류층은 대체로 말갈족으로 이루어졌으나 지배계층은 대조영을 위시한 고구려인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다가 태조 9년(926)에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되자 왕족과 관료 등 고구려 계통의 지배계급은 대부분이 남하하여 동족국가인 고려로 귀순하여 오게 되었는데 태조는 이들을 받아 들여 우대한 것이다. 즉 태조 8년 9월에 발해의 장군 申德 등 500인이 오고, 같은 달에 발해의 禮部卿 大和鈞·均老, 司政 大元鈞, 工部卿 大福 , 左右衛將軍 大審理 등이 백성 100호를 거느리고 온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 12월에는 左首衛小將 冒豆干, 檢校開國男 朴漁 등이 백성 1,000호를 거느리고 왔으며, 태조 10년 3월에는 工部卿 吳興 등 100여 인이 오고, 동 11년 3월에는 金神 등 60호가, 같은 해 7월에는 大儒範 등이, 9월에는 隱繼宗 등이, 동 12년 6월에는 洪見 등이, 9월에는 正近 등 300여 인이 왔다. 태조 17년 7월에는 발해의 세자인 大光顯이 수만 명의 백성을 거느리고 오자, 태조는 그에게「王繼」란 성명을 내리고 宗籍에 올리는 동시에 특별히 元甫의 관품을 주어 白州를 지키며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陳林 등 160여 인이, 태조 21년에는 朴昇 등 3,000호가 오는 등 발해인의 귀순이 계속되었는데 태조는 이들을 모두 받아 들여 후대하였던 것이다.

한편 발해를 멸망시킨 契丹에 대하여서는 격렬한 증오감을 나타내었다. 태조 25년(942)에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을 선물하였으나, 왕은 이것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契丹이 일찍이 발해와 화친하였으면서도 맹서를 배반하고 이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것이다(≪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5년 동10월).

드디어 거란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그 사신의 일행 30여 인을 섬으로 귀양보내는 동시에 낙타는 萬夫橋 아래 붙들어 매어 두어 모두 굶어 죽게 하였던 것이다.116)≪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5년 동10월.

그리고≪海東繹史≫에 왕건이 “발해는 본래 나의 친척의 나라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발해국과 발해인에게 친밀한 뜻을 나타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결국 고구려에 대한 태조의 생각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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