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1. 고려의 건국과 호족
  • 4) 태조의 정치이념과 사상
  • (2) 불교사상

(2) 불교사상

신라 하대에 지방 豪族의 등장과 함께 불교계에서는 禪宗이 점차 유행하였다. 진성여왕 이후부터는 이들 선종의 각 종파가 지방의 호족세력과 각기 결합되어 갔고 후삼국 성립 이후에는 敎宗의 승려들도 지방세력과 연결되어 갔다.

일찍이 왕건은 松岳의 대호족으로 禮成江 일대의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궁예의 휘하에 있으면서 효공왕 7년(930)에 나주를 정벌하고 서남해 일대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이 때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은 대부분 왕건의 도움을 받으며 귀국하였기 때문에 유학승들과 왕건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졌다. 각 지방의 호족들과 연결되어 있던 이들 승려들을 매개로 하여 왕건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들에게 보다 용이하게 접근하여 이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117)金杜珍,<王建의 僧侶結合과 그 意圖>(≪韓國學論叢≫4, 國民大, 1981) 참조. 특히 왕건은 918년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를 건국한 이후 앞서 살펴 본 호족포섭 정책과 더불어 이들 호족과 연계되어 있던 승려들과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이는 승려들을 통해 각 지역 호족과의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이들 호족들의 세력권 하에 있는 백성들을 교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도된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가 건국되기 전에 四無畏士인 逈微·麗嚴·慶猷·利嚴과 行寂·忠湛이 왕건과 연결되었고 坦文·璨幽·玄暉·兢讓·慶甫·開淸 등이 고려의 건국 이후에 왕건과 결합되었다. 이들 가운데 闍崛山派의 제2조인 開淸은 고려가 건국된 후 오랫 동안 태조 왕건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해 왕건을 근심케 한 명주의 대호족 순식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순식이 태조에게 귀속한 후 고려에 대해 비협조적이었던 이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태조의 요청에 협력하였다. 또 경보는 후백제의 견훤과 결합되어 있었으나 태조 19년 후삼국의 통일과 함께 태조에게 포섭되어 후백제 지역 백성들을 위무하면서 이 지역의 민심 수습에 나섰다. 이에 태조는 충청도 連山에 開泰寺를 세우고 친히 願文을 지어 삼국 통합의 뜻이 천명을 받아 간악한 자를 제거하고 약한 자를 구하고 기울어진 자를 받치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河南 30여 군의 백성들을 포용하여 이들을 조금이라도 범하고 상하지 않게 하였음을 밝혀 교화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118)≪新增東國輿地勝覽≫권 18, 連山縣 佛宇 開泰寺. 태조는 개태사를 창건하여 후백제인들을 교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 사찰은 華嚴道場으로서 성립되었는데 華嚴敎學이 신라 이래 중앙의 왕실에 의해 수용되었고 지방세력을 포함한 모든 사회체제를 중앙의 왕실에 통합시키는 데 유리한 사상체계였던 점으로 보아, 태조는 결국 후백제 영역 내의 각 지역의 이질적인 지방세력들을 통합하고 이어 삼한의 통일에 있어서 민족의 대융합을 도모하고자 이 개태사를 창건한 것이다.

한편 당시 사원은 莊園으로 형성된 막대한 토지를 가졌으며 본사에서 떨어진 支寺에 莊舍를 두어 경영하였다. 이럴 경우 왕건은 한 승려와 결합함으로써, 그와 사회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다른 사원세력과의 결연이 용이하였다. 실제 왕건과 연결된 승려들의 많은 緣故寺院이 대체로 그와 연결되어 있었다. 왕건은 더 많은 호족세력과 유대관계를 맺고 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세력확대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태조 왕건은 고려의 건국 이전부터 각 지역의 승려들과 교우관계를 맺어 이들 승려들과 연결된 각 지방의 호족세력들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고, 고려 건국 이후에도 호족포섭책의 일환으로 승려들과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으며 또한 복속된 지역의 백성들을 이들 승려들로 하여금 佛法을 통해 교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불교를 장려하고 육성시켜 나갔다.

태조 왕건은 개경에 法王·王輪·慈雲·內帝釋·舍那·天禪·新興·文殊·圓通·地藏의 10寺를 비롯한 많은 사원을 건축하였다. 특히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팔관회와 연등회를 통해 불교의식과 의례를 문무 관료와 백성이 다 함께 참여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승화시키는 한편, 고승 대덕을 국사·왕사로 맞아 師弟의 예를 표하고 통일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많은 자문과 도움을 받으면서 앞서 본 국내외의 많은 승려들을 포섭하여 우대하였다. 이렇게 불교를 호국신앙으로서 국가를 보위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나아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있어서 국가의 대본으로 삼으려는 태조의 의도는 그의「訓要10條」가운데 제1조에서 확인되어진다.

우리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호위하는 힘에 도움받아야 하므로 선종·교종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분향하고 불도를 닦으며 각기 그 맡은 바 일을 다스리게 하라(≪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하4월).

또한 태조가 崔凝에게 통일발원문을 짓기를 명령한 아래의 사실로부터 불교를 통일 지도이념으로 숭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조가 崔凝에게 “옛날에 신라가 9층탑을 만들어 마침내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이제 개경에 7층탑을 세우고 서경에 9층탑을 세워 현묘한 공덕을 빌려 뭇 악인들을 제거하고 삼한을 통일하고자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발원문을 지으라”고 하였다(≪高麗史≫권 92, 列傳 5, 崔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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