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2. 왕권의 확립과정과 호족
  • 2) 정종의 왕위계승과 왕권의 동향

2) 정종의 왕위계승과 왕권의 동향

혜종의 뒤를 이어 堯가 定宗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혜종 2년(945) 9월 무신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군신들의 추대에 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은 앞에서 본 바와 같고 최승로도 혜종·정종·광종의 세 임금이 서로 왕위를 계승한 초년에는 모든 일이 안정되지 못하여 兩京의 문·무관이 반이나 살상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양경이라 함은 開京과 西京을 말하는 것으로 정종의 즉위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박술희나 왕규파에 가담한 개경의 문·무신들이 그 때 피해를 본 주요 대상자가 아닌가 한다.

정종은 원래 불교를 좋아하고 두려움이 많았다. 그리하여 정종 원년(949) 정월 태조의 묘인 顯陵에 致齋를 드리는데 그 날 저녁 소나무숲 사이에서 왕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하는 말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구휼하라는 소리같았다 한다. 아마도 불교를 좋아했던 그가 많은 사람들을 살상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해에 天鼓가 울므로 죄수를 사면하였다. 천고는 지금으로 말하면 마른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를 가리킨다. 그 천고도 자연재해 중의 하나로 오행 중에서 水가 그 성질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154)≪高麗史≫권 53, 志 7, 五行 1. 이러한 자연재해는 군왕이 음양오행의 운영 원리에 따른 정치를 잘 수행하지 못했을 때 하늘이 내려 주는 일종의 견책이었다.155)崔柄憲,<高麗時代의 五行的 歷史觀>(≪韓國學報≫13, 1978) 참조. 이러한 자연재해에 대해 정종은 회개하는 의미에서 죄수를 사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마음은 불교에 대한 더욱 독실한 믿음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즉 그는 儀杖을 갖추어 佛舍利를 받들고 10리나 되는 開國寺까지 걸어 가서 이를 모시기도 하였다. 또 곡식 7만 석을 여러 큰 사원에 바쳐 각기 佛名經寶와 廣學寶를 설치하여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을 권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종의 행위는 그가 불교신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즉위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살상한 것이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이제현은 정종의 이러한 행위를 유교적 안목에서 비판하고 있다. ‘군자는 邪曲한 짓으로 복을 구하지 않는다’는 옛글에 위배되는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156)≪高麗史≫권 2, 世家 2, 定宗, 李齊賢 贊.

그러나 정종은 즉위 초기에 나름대로 좋은 정치를 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당시의 상황을 최승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정종은 왕위를 계승하자 밤낮으로 부지런하고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을 썼다. 혹은 촛불을 켜고서 朝士들을 불러 보기도 하고 혹은 밥먹는 시간까지 늦추어 가면서 정무를 척결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사람들이 모두 서로 경하했다(≪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한편 정종은 西京遷都를 계획하였다. 그것은 물론 그의 즉위가 왕식렴을 비롯한 서경 세력의 협조 덕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정종은 즉위 직후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왕식렴을 포상하였다.

왕식렴은 조정의 기강이 떨어지려고 하였으나 부흥시켰고 종묘사직이 장차 기우는 듯하였으나 다시 정비하였으니 그대의 죽음을 다한 노력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겠는가(≪高麗史≫권 92, 列傳 5, 王式廉).

위에서 보다시피 왕식렴의 군사력이 정종의 즉위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평산 박씨의 공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정종이 즉위한 초기에 내란을 평정하는데 박수경의 공이 컸으므로 얼마 후에 大匡이라는 관계에 올랐다고 한다. 대광은 당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수여한 관계로서는 최고의 관계였다. 그 위에 三重大匡·重大匡이라는 관계가 더 있었지만 그것은 죽은 사람에게 추증된 관계였던 것이다.157)金甲童, 앞의 책, 201쪽의 註 73. 이 때문에 정종 2년부터 추진된 서경천도 작업에 박수경의 형인 박수문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는 정종 2년 봄에 德昌鎭에 성을 쌓기도 했지만 서경의 왕성을 축조하기도 했던 것이다.158)≪高麗史節要≫권 2, 정종 2년. 이 서경 왕성의 축조는 이보다 앞서 태조 5년(922)부터 6년 간에 걸쳐 쌓은 西京在城에 대한 수축으로 생각되거니와 이는 서경천도의 계획이 정종 2년(947)부터 실행에 옮겨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경천도는 또한 風水圖讖說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이 풍수도참설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측컨대 개경·서경의 地脈衰旺, 혹은 水德順逆의 설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개경의 땅은 수덕이 불순하고 지맥이 열세한 때문에 왕업이 쇠퇴하기 쉬운 반면, 서경은 수덕이 순조롭고 지맥이 왕성한 소위「大業萬代」의 지형이라는 풍수도참설이 대두하여 정종의 심리를 움직이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159)李丙燾,<初期 諸嗣王과 西京과의 關係>(≪高麗時代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 ; 亞細亞文化社, 1980, 111쪽).

좀 더 생각해 보면 정종은 자신의 즉위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상된 개경을 떠나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서경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정치를 하고자 원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마음이 서경천도를 더욱 부채질했으리라 여겨진다.160)따라서 정종은 開京勢力에 대한 제거작업의 결과 생겨난 개경세력의 반발과 원한이 두려워 西京遷都를 강행하려 했는지도 모른다(河炫綱,<高麗西京考>≪歷史學報≫35·36합집, 1967;앞의 책, 1988, 326∼327쪽).

어쨌든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행해진 서경천도 계획에 대해 개경 세력이 크게 반발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개경 세력 뿐 아니라 서경천도의 역사에 동원된 많은 백성들도 원성이 자자하였다. 정종은 서경에 왕성을 쌓음과 더불어 시중 權直에게 명하여 궁궐을 경영케 하였다. 그러므로 노역이 그칠 날이 없었다. 또 개경의 민호를 뽑아 서경에 채우니 여러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며 원망하였다. 그러다가 왕이 세상을 떠나니 역부들이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161)≪高麗史≫권 2, 世家 2, 定宗 評.

이러한 반대와 원망에도 불구하고 서경천도 계획을 강행한 것은 그의 천성이 굳세어 굴하지 않고 고집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왕권이 개경의 호족세력을 압도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상황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경천도 계획과 더불어 정종은 전국에 걸쳐 光軍 30만을 조직하고 光軍司를 두어 이를 관할케 하였다. 이같은 조치는 崔光胤의 보고에 따른 것이었다. 최광윤은 崔彦撝의 아들로 賓貢進士로서 後晋에 유학하고 있다가 거란에게 사로잡혀 갔으나 재주가 있다 하여 거기서 관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거란의 사신으로 龜城에 왔는데 거란이 장차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이 보고가 사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이에 대한 조치로써 북방의 여러 지역에 성을 쌓음과 더불어 광군이 조직되었다.162)≪高麗史≫권 92, 列傳 5, 崔彦撝. 즉 정종 2년(947) 앞서 본 서경 왕성을 비롯하여 德昌鎭과 鐵甕·博陵·三陟·通德 등지에 박수문이 성을 쌓고 있다. 또 그 해 가을에는 박수경이 德成鎭에 성을 쌓았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되며 광군의 창설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 광군은 어떠한 성격의 군대였을까. 우선 이 때 조직된 광군이 30만이나 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숫자로 보아 광군은 중앙군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또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비군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다. 그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숫자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따라서 광군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조직한 예비군적인 존재가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때 광군은 중앙군이 아니라 지방군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163)李基白,<高麗 光軍考>(≪歷史學報≫27, 1965;≪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163∼164쪽).

물론 이렇게 해서 조직된 광군이 모두 중앙의 통제 속에 들어 왔다고는 볼 수 없다. 아직도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호족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광군은 각 지역 호족들의 협조 하에 이루어진 호족연합군의 형태를 띠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당시 정종은 이 광군 조직을 통하여 지방의 호족들을 통제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호족들을 광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중앙에 설치된 광군사의 통제를 받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광군 조직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해 보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광군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왕권의 강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이 광군의 실체에 대해서는 현종 2년(1011)에 완성되었다고 여겨지는 경북 醴泉의 開心寺 石塔記를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164)李基白, 위의 책, 166쪽. 거기에 보면 개심사 석탑을 조성하는 데 수레 18대, 소 1,000마리와 더불어 광군 46隊가 참여하고 있다. 이밖에도 彌勒香徒나 椎香徒 등의 존재가 보이고 있어 주목되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어쨌든 이 기록을 통해 광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46대이면 1대가 25명이므로 1,150명이 된다. 물론 이 대의 지휘관은 隊正이었다. 여기에도 대정 邦祐의 존재가 보이고 있다.

한편 같은 금석문에는 이 석탑을 조성하는 데 棟梁이 된 인물로서 호장 陪戎校尉 林長富의 母主가 있고 副棟梁으로 방우가 보이고 있다. 방우는 그의 직책이 대정으로 나오고 있어 광군의 한 지휘관으로 추정되지만 임장부와 광군과의 관계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그 지역의 토착세력인 호장이고 배융교위란 武散階를 갖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배융교위는 무산계 중의 종9품으로 임장부가 장군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무산계가 수여된 것이 아닌가 한다.165)원래 중국의 武散階는 무인들에게 수여된 관계였다. 그러나 이 무산계가 고려에 도입된 후에는 향리나 耽羅王族·女眞酋長·老兵·工匠·樂人들에게 수여되었다(旗田巍,<高麗の「武散階」>≪朝鮮學報≫21·22합집, 1961;≪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참조). 그 지역의 토착세력으로서 호장인 임장부는 광군의 상급 지휘관이었고 방우는 그 밑의 하급 지휘관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또 이 금석문을 통하여 광군이 토목 공사에도 동원되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자료는 후대의 것이긴 하지만 정종대에도 광군의 성격은 대략 비슷했으리라 여겨진다. 광군사의 통제를 받는 지방호족들이 그 휘하에 토착민들을 예속시켜 조직된 지방 예비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렇듯 서경천도와 광군의 조직 등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해 보려고 애썼던 정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정종 3년(948) 병이 들고 말았다. 정종 3년 9월 동여진의 蘇無蓋 등이 와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쳤다. 이 때 정종이 天德殿에 나와서 이것을 받는데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물건 가지고 온 사람을 치고 또 천덕전의 서쪽 모퉁이를 쳤다. 정종이 크게 놀라니 近臣이 그를 부축하여 重光殿으로 들어 갔으나 드디어 병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 정종은 서경천도나 광군을 조직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원망과 반발을 샀으나 강제로 이를 밀고 나가면서도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한 번 벼락이 치자 자신의 잘못이 하늘을 노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고 크게 놀랐던 것이다.

그러자 정종은 죄수들을 사면하여 하늘의 견책을 면해 보고자 하였으나 그의 병은 낫지 않았다. 게다가 정종 4년(949) 정월에는 정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왕식렴이 죽고 말았다. 이것은 정종의 핵심적인 지지 기반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2개월 뒤인 3월에 정종은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자신의 동복동생 昭를 불러 왕위를 전위하고 帝釋院으로 옮겨 가서 죽었다.

정종의 재위는 겨우 4년 동안이었으나 그의 치적에 대한 후세 史家들의 평가는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최승로는 그의 초기 정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지만 서경천도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람들을 징발하여 역사를 시켜 인부를 괴롭히니 원망이 이로 인하여 일어났고 모든 재변의 징험이 아주 빨랐다. 미처 서경으로 천도하지 못하고 왕위를 아주 떠났으니 진실로 원통한 일이다(≪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반면 이제현은 유학자의 입장에서 정종이 10리나 되는 곳까지 가서 불사리를 봉안한 일이라든가 1만 석의 곡식을 하루 동안에 승려들에게 나누어 준 일 등을 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정종이 종사를 친아우에게 맡겨 왕규와 같은 자가 틈을 엿보지 못하게 한 것은 잘한 일이라 평하고 있다.166)≪高麗史≫권 2, 世家 2, 定宗 李齊賢 贊. 이 점에 대해서는 최승로도 마찬가지여서 정종이 왕규의 난을 미리 알고 난을 평정하여 종사를 안정시켜 왕위를 동생에게 전위한 것은 후세의 왕들이 취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정종은 박수경·박수문 등의 패강진 세력과 서경 세력의 협조로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서경으로 천도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그의 서경천도 계획은 북진정책의 일환이거나 도참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지만 호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개경을 떠나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서경에 구축하기 위한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다. 또 그는 거란이 침입해 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고 광군 30만을 조직하였다. 이것은 물론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를 통하여 지방의 호족들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 하였다. 호족들을 광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그 존재를 인정해 주는 한편 호족들은 중앙에 설치된 광군사의 통제를 받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계획은 많은 사람들의 반발과 원망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번 하늘의 견책이 있자 병이 들어 죽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종대의 왕권 강화책도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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