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2. 왕권의 확립과정과 호족
  • 3) 광종과 경종의 왕권강화책
  • (1) 광종대의 왕권강화

(1) 광종대의 왕권강화

정종이 죽고 그의 內禪을 받아 왕위에 즉위한 이는 광종이었다. 광종의 원래 이름은 昭로 태조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는 요(정종)와 같이 왕규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임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는 서경 세력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광종의 재위기간 동안에 서경에 대한 배려를 거의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종대에 득세했던 서경 세력이 많은 화를 당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최승로는 그의 상서문에서 혜종·정종·광종의 3대가 왕위를 계승할 초기에 양경(개경과 서경)의 문·무관이 반이나 살상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정종의 즉위 과정에서 왕규를 비롯한 개경 세력이 피해를 봤다고 한다면 광종의 즉위 초에는 서경 세력이 화를 당한 사실을 얘기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왕위에 오른 광종은 26년간 집권하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재위 기간 동안의 그의 치적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성격상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즉위 후부터 광종 7년(956)까지의 시기이고, 둘째는 그 이후부터 광종 11년(960)까지이며, 셋째는 광종 11년 이후부터 그의 말년인 광종 26년(975)까지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다.167)河炫綱, 앞의 글(1981), 130쪽. 그러나 이 셋째 시기도 둘로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즉 광종 16년(965) 이후부터 호족세력이 재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로 설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金杜珍,<高麗 光宗代의 專制王權과 豪族>≪韓國學報≫15, 1979 ;≪均如華嚴思想硏究≫, 韓國硏究院, 1981, 98∼104쪽).

우선 그 첫째 시기에 대해 살펴 보자. 그는 즉위하자 마자 大匡 박수경으로 하여금 국초의 功役者를 정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4役者에게는 쌀 25석, 3역자에게는 20석, 2역자에게는 15석, 그리고 1역자에게는 12석을 주고 이를 例食으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국초의 공역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먼저 국초는 주로 태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꼭 태조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고려 건국 이후부터 자신의 즉위 이전까지를 뜻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즉 국초의 공역자란 태조에서부터 자신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왕실을 위해 공로를 세운 자들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자들을 중심으로 이를 선정하여 등급에 따라 포상을 한 조처라 생각된다. 그러기에 이 조처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곧 이어 그는 元甫 式會와 元尹 信康 등에게 명하여 주·현의 세공액을 정하게 하였다. 세공액이란 각 주·현에서 해마다 중앙에 바치는 공물의 액수를 말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공물의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뜻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나 다만 이 때에 와서 각 지역 호족들의 충성도나 세력의 크기를 고려하여 세공액을 다시 정한 것이라 하겠다. 당시에는 아직도 각 지역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공물을 바치는 책임이 호족들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공무를 가탁하여 백성들을 수탈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세공액을 정했다는 것은 이들이 수탈할 수 있는 한계를 정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이 조처는 지방의 호족들을 통제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하겠다.168)金甲童, 앞의 책, 225쪽.
金光洙,<高麗太祖의 三韓功臣>(≪史學志≫7, 檀國大史學科, 1973), 56쪽.

광종 원년(950) 정월에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는 사건이 일어나자 광종은 재앙을 물리치는 술책을 司天臺에 물었다. 그러자 사천대에서는 덕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에 광종은 그 뒤부터 항상≪貞觀政要≫를 읽었다 한다. 사천대는 天文·曆數·測候·刻漏를 관장했던 관청인데, 혜종대에 司天官으로서 왕규의 음모를 예견한 최지몽이 이 때에도 사천대에 속해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광종이 재앙을 물리치는 술책을 묻고 있는 것은 그의 즉위 과정도 그렇게 순탄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그가 항상 읽었다는≪貞觀政要≫는 唐의 吳兢이 편찬한 책이다. 그 내용은 당 태종이「貞觀의 治」라고까지 평가되는 선정을 행할 수 있었던 연유와 당 태종이 간직했던 제왕으로서의 자세 및 治者로서의 기본적 관념을 기술하고 있다.169)鄭秉學,<貞觀政要>(≪中國의 古典 100選≫, 東亞日報社, 1980), 129쪽. 광종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당 태종과 같은 선정을 꿈꾸었으며 제왕으로서의 품격을 갖추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후부터 광종 7년까지의 제1기에는 실로 볼 만한 정치가 이루어졌다.

또 광종 원년에는 光德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는 것은 고려가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주의식의 표현이다. 그것은 또한 왕권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조처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다음해인 광종 2년(951)에는 다시 중국 後周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쓴다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후 그의 정책은 주로 불교적인 활동이나 후주와의 외교관계로 일관하고 있다. 아마도 스스로를 반성하고 修德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광종 2년 大奉恩寺를 도성의 남쪽에 세워 태조의 願堂으로 삼았다. 또 어머니 劉氏의 원당으로 동쪽 교외에 佛日寺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광종 5년에는 崇善寺를 세워 어머니 유씨의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절의 창건도 백성들을 동원한 역사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원성을 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광종 2년 후주의 연호를 쓰면서 시작된 외교관계는 그 이후 계속되었다. 광종 3년에는 고려에서 廣評侍郎 徐逢을 후주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그러자 후주에서는 다음해인 광종 4년(953) 衛尉卿 王演과 將作少監 呂繼를 보내 와서 광종을 特進·檢校太保·使持節玄菟州都督·充大義軍使兼御史大夫·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광종 6년에는 大相 王融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광평시랑 荀質을 보내어 즉위를 축하하였다. 이에 후주에서는 광종 7년 將作監 薛文遇를 보내서 광종을 더 책봉하여 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로 삼고 백관의 의복을 중국 제도에 따라 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때 前節度巡官大理評事 雙冀가 설문우를 따라 왔다가 병으로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병이 낫자 광종이 불러 보니 그 대응하는 것이 뜻에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종은 후주에 표를 올려 쌍기를 신하로 삼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아마도 후주에서는 이것을 허락한 모양으로 광종은 쌍기를 한림학사로 삼아 文柄을 맡기게 되었다.170)≪高麗史≫권 93, 列傳 6, 雙冀. 이렇게 쌍기가 등용되면서 광종의 개혁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광종은 내치에 힘쓰면서 당 태종과 같이 칭송받는 군주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따라서 최승로도 광종이 즉위하여 광종 7년(955)까지 8년 동안의 치적을 중국의 삼대(夏·殷·周)와 견줄 수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광종은 정종의 유명을 받아 왕위에 올라서 아랫 사람을 예로써 접대하고 사람을 알아 보는 데 실수하지 않으며 친하고 귀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았다. 항상 豪强한 자를 누르고 소원하고 천한 자를 버리지 않고 홀아비와 과부들을 구휼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부터 8년만에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평하며 형벌과 은상이 지나침이 없었다(≪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최승로 뿐 아니라≪高麗史≫찬자 또한 다음과 같이 광종 초기의 정치를 매우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광종은 신하를 예로써 대우하고 송사를 결단하는 데 밝으며 빈민을 구휼하고 유학을 중히 여기며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거의 태평의 정치를 이루었다(≪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26년).

그러나 광종 7년부터는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먼저 그는 광종 7년(955)에는 奴婢按檢法을 실시하였다. 노비안검법이란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판별하여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을 말한다.

이 비슷한 정책은 이미 태조대에 실시된 바 있다. 태조는 왕위에 즉위한 2개월 뒤인 태조 원년(918) 8월에 백성들 중에서 토목공사와 기근으로 인하여 자신이나 아들을 팔아 노비가 된 자들 1,200여 명을 골라 內庫의 布帛으로써 贖還시켰던 것이다.171)≪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8월 신해. 태조는 이후에도 더 많은 노비를 방면시키려고 했던 모양이다. 최승로의 상서문에 의하면 태조는 신하들이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된 자들을 방면하려 하였으나 공신들의 뜻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들 공신 소유의 노비는 공신들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이루었다. 이들은 평시에는 공신들의 토지를 경작하였을 것이나 유사시에는 사병이 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172)洪承基,<高麗 前期의 奴婢政策-國王과 貴族의 政治的 利害와 이에 따른 奴婢에 대한 입장의 차이->(≪震檀學報≫51, 1981;≪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154∼158쪽). 따라서 노비안검법의 실시는 태조 이래의 많은 공신, 특히 호족 출신 공신들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그 만큼 왕권이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대다수의 호족과 공신들은 이 조치에 강력히 반발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의 부인인 大穆王后 皇甫氏까지 이를 중단하도록 요청하였으나 광종의 마음은 확고 부동하여 그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그것은 8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착실하게 왕권을 강화시킨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이 노비안검법은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천한 노예들이 때를 만난 것처럼 존귀한 이를 업신 여기며 허위의 사실을 다투어 얽어 본주인을 모함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오기도 하였다. 즉 노비안검법은 호족과 공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원인이 되어 신분질서가 문란해졌을 뿐만 아니라 정계의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시도는 광종 9년 科擧制의 실시로도 나타났다. 광종 9년 5월 한림학사 쌍기를 知貢擧에 임명하여 詩·賦·頌 및 時務策으로써 시험하여 진사를 뽑게 하고 광종이 威鳳樓에 친히 나가서 방을 발표하고 甲科에 崔暹 등 2명을 뽑는 한편 明經에 3명, 卜業의 2명에게도 급제를 주었던 것이다. 이 과거제는 다 아는 바와 같이 후주의 귀화인인 쌍기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과거제를 실시한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정치적 식견과 능력을 갖춘 새로운 관료층을 형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한 공신들은 대부분 武人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통일전쟁에는 필요한 존재들이었으나 통일 후 정치체제를 완성시켜 나가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무력은 가지고 있었으나 정책을 수행해 나갈 능력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적 학식으로 왕을 충실히 보필할 수 있는 신관료군을 육성하려 하였던 것이다.173)金龍德,<高麗 光宗朝의 科擧制度問題>(≪中央大論文集≫4, 1959), 147쪽. 과거제 실시 초기의 과거합격자들은 광종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吳星,<高麗 光宗代의 科擧合格者>≪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1, 39∼45쪽).

이어 광종 11년(959)에는 백관의 公服을 정하였다. 元尹이상은 紫衫으로, 中壇卿 이상은 丹衫으로, 都航卿 이상은 緋衫으로, 그리고 小主簿 이상은 綠衫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자삼을 입는 계층은 원윤이라는 관계가 기준이 되고 있는 반면 단삼·비삼·녹삼층은 관직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삼을 입는 계층은 관계만을 소유한 자들이 많았겠지만 관계와 관직을 동시에 소유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도 관직보다는 관계를 기준으로 하여 복색을 정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자삼층에는 중앙의 관료 집단과 더불어 일부 지방의 호족층들도 포함되었으리라 짐작된다.174)姜晋哲,<田柴科制度의 制定 및 그 內容>(≪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35∼36쪽.

반면 단삼 이하의 옷을 입는 계층은 관직 위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대체로 태조 이후 새롭게 등장한 관료층이라 하겠다. 이들 역시 관계를 가졌을 수도 있지만 복색의 기준은 관직이었다고 보여진다. 중단경은 그 확실한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제사와 관련된 太常府의 小卿에 비길 수 있는 관직이 아닌가 한다.175)朴天植,<高麗前期의 寺·監 沿革考>(≪全北史學≫5, 1981), 19∼21쪽. 도항경은 태조 즉위 직후의 인사 조처에서 보이는 都航司의 차관급이었다. 소주부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조처가 있기 전에는 공복이 제정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물론 이전에도 공복은 있었겠지만 서열에 따른 통일적인 제도는 없었던 모양이다. 즉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옷을 입어 관직이 비록 높아도 가난하면 공복을 갖출 수가 없었고 관직이 없어도 가정이 부유하면 비단옷을 입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때에 와서 공복이 제정됐다는 것은 왕을 중심으로 한 관료들의 서열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공복의 제정은 광종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176)申虎澈,<高麗 光宗代의 公服制定>(≪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1), 84쪽.

또 곧 이어 개경을 皇都라 하고 서경을 西都라 부르는 조치가 취해졌다. 뿐만 아니라 峻豊이라는 새로운 연호가 쓰여지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는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자주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개경을 황도라 한 것은 황제가 거주하는 서울이란 뜻으로 자신을 중국의 황제와 같은 존재로 부각시키고자 한 것 같다. 그리하여 어떤 세력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한 조처라고 하겠다.

또 이 때부터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그 발단은 評農書史 權信이 大相 俊弘과 佐丞 王同 등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참소하니 이들을 폄출시킨 데서 비롯되었다. 준홍은 혜종 원년(944)에 세워진 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陰記에 佐尹의 관계를 가진 인물로 나오고 있다. 또 준홍은 광종 9년(958)에서 광종 11년(960)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 충북 괴산에 남아있는 覺淵寺通一大師塔碑 陰記에 內奉省令으로 나오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준홍은 충주부근 출신으로 여겨지며 중앙정계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였음에 틀림없다.177)蔡尙植, 앞의 글, 52쪽. 그리고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음기에 유권설, 유신성 등 충주 유씨들과 같이 나오고 있어 본래는 광종의 지지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왕동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王氏 성을 가지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태조의 인척이거나 중요한 지역의 호족출신이 아닌가 한다.

한편 이들을 참소한 권신은 평농서사라는 관직을 갖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평농서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맡은 관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글자의 뜻으로 보아 농사와 관련된 관부의 하위관직자로 생각된다.178)≪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에 보면 書史는 衛尉寺·司僕寺·禮賓寺 등의 관청에 소속된 吏屬이었다. 그리하여 改定田柴科와 更定田柴科에서 각각 17科·16科에 편입되어 23결·22결의 토지를 받고 있는 계층이었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어쨌든 권신은 고위관직자는 아니고 관직에 진출한 지가 오래 되지 않은 신진관료군에 속하는 인물이라 하겠다. 이러한 위치에 있던 그가 유력 호족출신으로 생각되는 준홍·왕동을 참소하자 광종이 이들을 폄출시키고 있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잘 엿볼 수 있는 사건이라 하겠다.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참소하는 간신이 때를 만나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무고하게 모함하고 종은 그 주인을 고소하였다. 또 자식은 그 부모를 참소하여 옥이 항상 가득 찼으므로 임시감옥을 두었고 죄없이 죽음을 당하는 자도 잇따랐다. 그러자 광종은 그 시기함이 날로 심하여 왕실의 친족들도 몸을 보전하지 못하는 이가 많았으며 하나 뿐이었던 그의 아들 伷까지도 의심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이 되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잘 아는 두 사람끼리도 감히 서로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한다.179)≪高麗史節要≫권 2, 광종 11년. 이러한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권신의 준홍·왕동에 대한 참소 사건은 하급자가 상급자를 참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해(960)에는 군사에 관한 관부의 개혁도 이루어졌다. 徇軍部를 군부로 고치고 內軍을 掌衛部로 고쳤으며 物藏省을 寶泉으로 고쳤다. 이들 관부의 개명이 단순한 명칭 변경에 불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순군부를 군부로 개칭한 것은 내군을 장위부로 고친 조치와 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내군의 장위부로의 개칭은 필시 시위군의 강화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며, 순군부의 군부로의 개칭도 국왕의 병권 장악과 관련된 그 조직이나 기능의 강화로 여겨지는 것이다.180)邊太燮,<高麗初期의 政治制度>(≪韓㳓劤停年紀念論叢≫, 知識産業社, 1981), 178쪽.
鄭景鉉,<高麗 太祖代의 徇軍部에 대하여>(≪韓國學報≫48, 1987), 67쪽. 그러나 이 조치는 순군부 권한의 약화이며 호족들이 갖고 있던 군권의 박탈이라는 견해도 있다(李泰鎭,<高麗 宰府의 成立>≪歷史學報≫56, 1972, 13쪽).

광종은 이렇게 호족세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살해 내지 숙청하면서 자신의 신변에도 위협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앞서 본 바와 같이 자신의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광종은 지방의 각 주·현에서 풍채있는 자들을 뽑아 시위군에 충당하였다. 이러한 시위군에 대한 강화가 순군부와 내군의 개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물장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관장한 관부인지 확실치 않다. 그런데≪高麗史≫백관지 찬자는 이 물장성을 小府寺의 전신으로 보고 있다. 소부시는 工技寶藏을 관장한 관청으로 공양왕 2년(1390)에 혁파되면서 그 소관사항이 內府寺와 軍資寺로 분산되었다. 그런데 군자시는 공양왕 2년 轉輸都監으로부터 전곡과 문서에 관한 소관사항을 위임받아 결국 軍需儲積의 사무를 관장한 관청이다.181)≪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小府寺·軍資寺. 이것으로 미루어 소부시가 혁파되면서 工技에 대한 사무는 군자시로, 寶藏에 대한 사무는 내부시로 넘어갔다고 보여진다.182)한편 小府寺의 권한이 內府寺로 넘어갔다는 기록은 무슨 잘못일 것이고 軍資寺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옳다는 견해도 있다(李基白,<高麗 京軍考>≪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62쪽). 따라서 소부시의 전신인 물장성도 공기·보장을 관장하였다고 하겠다. 여기서 공기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이나 군사장비를 만드는 기구로 추측되는 반면, 보장은 국가나 왕실에서 보배롭게 여기는 물건 내지 그에 대한 보관사무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물장성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관청으로183)이 때에는 物藏典이라 하였는데 大史 4인, 史 2인이 속해 있었다(≪三國史記≫권 39, 職官志 中). 태봉을 거쳐 고려에까지 이어져 온 관청이다. 이러한 물장성을 보물이 숨겨져 있는 샘이라는 뜻의 보천으로 고친 것은 이에 관한 통제권을 왕실에서 장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일련의 개혁은 쌍기가 본국에 있을 때 모셨던 후주 황제들의 정책과 유사한 점이 많아 주목된다. 쌍기가 본국에서 관직생활을 할 당시의 후주 황제는 太祖(952∼954)와 世宗(954∼959)이었다. 그런데 이 때 고려의 상황이 후주의 상황과 비슷하여 쌍기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여러 가지 개혁책을 광종에게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고려와 후주의 공통적 상황이란 독립적 무력을 가진 군벌의 존재가 절대군주권의 확립에 큰 장애가 되었고, 필요한 수의 유교적 소양을 갖춘 자들이 사회의 상층 계층에 존재했으며 국가 수입을 증대시킬 수 있는 잠재적 부세자들이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권 밖에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광종의 개혁 중 노비안검법의 실시는 도망간 농민들을 전토의 환원을 조건으로 귀향케 한 후주 세종의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도망갔던 농민들이나 방량된 노비들에게 다시 토지를 경작케 함으로써 국가수입을 증대시키려 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제의 실시는 후주의 태조가 문신들을 대거 등용, 우대하고 세종이 그들의 질적 향상에 적극 노력한 것과 일련의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또한 광종의 시위군 강화책은 후주의 세종이 전국에서 장병들을 소집하여 그 중에서 무예에 능통한 자들을 가려 뽑아 친위군인 殿前軍으로 삼은 조치와 너무나 유사하였던 것이다.184)姜喜雄,<高麗初 科擧制度의 導入에 관한 小考>(≪韓國의 傳統과 變遷≫, 高麗大亞細亞問題硏究所, 1973), 261∼267쪽.

그렇다고 하여 쌍기 혼자의 힘에 의하여 개혁이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쌍기와 이해를 같이하는 무리들도 함께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개혁 추진세력은 누구였을까. 이에는 다음의 기록이 크게 참고된다.

쌍기가 귀화한 이후로부터 文士를 존중하여 은혜와 예가 너무 융숭하니 재주없는 자(非才)가 외람되이 진출하여 계급을 뛰어 갑자기 승진되어 한 해 안에 바로 卿相이 되었다. 혹은 밤마다 사람들을 접견하고 혹은 날마다 손님을 초대하여 이로써 즐거움을 삼아 정사에 게을리하고 연희와 놀음이 그치지 않았다. 멀리 중국 남방과 북방의 용렬한 사람들(南北庸人)까지도 특별한 예로써 접대하니 이 때문에 젊은 무리들(後生)이 다투어 진출하고 옛 덕망있는 사람들이 점차 쇠진하였다. 비록 중국의 풍속은 존중하였으나 중국의 좋은 법은 취하지 못하였으며 중국의 선비는 예로써 대접하였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는 얻지 못하였다. 또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膏血의 재물을 더욱 소모케 했으며 사방에 있어서는 헛된 명예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다시는 정무에 부지런하지 않고 賓僚를 접견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신하를 시기함이 날로 심하고 군신 사이의 의론이 날로 서로 막혀져서 정치의 잘되고 못된 점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위의 기록은 최승로가 時務28條의 서론 부분에서 광종에 대해 평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쌍기가 귀화한 후로부터「文士」를 존중하였고「非才」가 외람되이 진출하였다. 또「南北庸人」을 특수한 예로 대접하니「後生」들이 다투어 진출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개혁초기의 추진세력은「文士」와「南北庸人」이며 그후「非才」와「後生」들이 진출하여 혼란을 야기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당시 광종의 초기 개혁 추진세력이었던「文士」들은 누구였는가를 알아보자. 아마도 그들의 대부분은 학사라고 불리우던 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制撰과 詞命을 담당한 학사원이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여기에 속한 관리들을 한림학사라 하였다.185)≪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藝文館. 이들이 바로 광종 9년부터 시작된 개혁의 담당자들이었다. 이 때의 한림학사로는 쌍기를 비롯하여 金廷彦·趙翌·李夢游·王融·崔行歸 등이 있었다.186)李基東,<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中世的 側近政治의 志向->(≪歷史學報≫77, 1978;≪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郎徒≫, 韓國硏究院, 1980, 264∼273쪽).

쌍기는 후주 출신으로 광종대에 과거제의 실시를 건의한 인물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광종 9년의 과거시험을 비롯하여 광종 11년과 12년의 과거에 고시관인 知貢擧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김정언에 대해서는 그의 행적을 더듬어 볼 만한 기록이 별로 없다. 다만 광종 26년(975)과 경종 3년(978)에 元宗大師碑와 法印國師 坦文의 비문을 지은 바가 있다. 그 때까지 그는 한림학사의 직에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당시 학식이 풍부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조익은 광종 15년(964)에 실시된 과거의 지공거였다. 또한 광종의 右文政治를 예찬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몽유도 성종 2년(983)과 5년, 6년의 세 차례에 걸쳐 지공거를 역임했던 인물로 성종 6년 8월에는 왕명을 받들어 中外의 奏狀과 行移, 공문의 격식을 제정하기도 했다. 왕융은 광종 6년(955) 후주에 사신으로 다녀 온 바 있으며 광종 17년(966)부터 성종 13년(994)까지의 기간에 11차례나 과거를 주관한 인물이다. 경종 즉위년(975) 10월에는 경순왕(金傅)을 尙父로 책봉하는 조서를 제찬하기도 하였는데 성종이 죽기 직전까지도 관직생활을 계속한 기록이 있다. 그는 중국에서의 귀화인으로 추측되며 아마도 남중국의 吳越國 출신이 아닌가 한다.187)李基東, 위의 글, 271∼273쪽. 한편 고려 초에 王姓을 하사받은 유공자의 아들로「勳臣」벌족 출신인 것이 확실하다는 견해도 있다(姜喜雄, 앞의 글, 271쪽의 註 34). 또 최행귀는 최언위의 아들로 오월국에 유학하여 秘書郎까지 지냈으나 본국으로 돌아 와 광종의 倖臣이 되었다가 광종 말에 제거되었다.

이들 한림학사 이외에도 당시의 문사에 속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로는 최지몽과 최승로를 들 수 있다.188)全基雄,<高麗 光宗代의 文臣官僚層과「後生讒賊」>(≪釜大史學≫9, 1985), 143∼148쪽. 최지몽은 혜종대에 왕규의 변란을 예고한 자로 광종대에도 왕의 측근이 되어 활약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다가 광종 21년(970) 귀법사에 광종을 따라 갔다가 술에 취하여 실례를 하자 폄출된 인물이다. 최승로는 이미 태조대부터 왕건과 관련을 맺었던 인물로 경종 6년에 한림학사의 직에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광종대에도 한림학사의 직에 있으면서 당시의 개혁에 어느 정도 참여하였다고 보여진다. 그가 과거제의 실시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있지 않거나 관리와 서인의 의복을 정돈하여 존귀와 비천의 차이를 명백히 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 이를 말해 준다. 이러한 문사들이 광종대 개혁 초기의 핵심들이었다. 그들은 광종 말의 그 혼란한 정국 속에서도 대부분 살아 남아 경종이나 성종대의 개혁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사층 이외에도 광종에게 특별히 우대받은 인물들로는「南北庸人」들이 있었다. 남북용인은 주로 중국의 남북쪽에서 귀화해 온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189)河炫綱,<崔承老의 政治思想 硏究>(≪梨大史苑≫12, 1975;앞의 책, 1988), 159쪽과 李基東, 앞의 글, 271∼272쪽.
그러나 여기에 雙冀나 王融 같은 이를 포함시키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 이들이 등용된 후에 광종이 후대한 자들을 南北庸人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南北庸人」은 후백제와 발해 계통의 인물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李基白,<新羅 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儒敎的 政治理念>≪大東文化硏究≫6·7합집, 1969·1970, 155쪽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韓國硏究院, 1978 및 金塘澤,<崔承老의 上書文에 보이는 光宗代의「後生」과 景宗 元年 田柴科>≪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1, 53∼54쪽).
이들은 쌍기와 왕융 등의 귀화인들이 고려에서 중용되어 개혁의 핵심으로 등장하자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아닌가 한다. 雙哲도 자기의 아들인 쌍기가 고려에서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광종 10년(959) 사신을 따라 왔다가 그대로 고려에 머물렀는데 이 때 그는 佐丞이란 관계로 후대받았다. 아마 이러한 부류들이 남북용인으로 광종은 그들이 지식이나 재주가 있나 없나를 논하지 않고 후대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남북용인에는 발해 계통의 인물들도 포함되었으리라 여겨진다.

한편 최승로가 차례를 뛰어 넘어 한 해가 지나지 않아 卿相이 되었다고 한「非才」들도 문사층에 속하는 인물들이라 생각된다.190)이「非才」에 대해서는 이가 곧 雙冀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河炫綱, 앞의 책, 158쪽), 쌍기를 포함하여 광종이 崇重한 문사들이라는 견해도 있다(李基東, 앞의 글, 272쪽) 또 쌍기를 비롯한 중국의 귀화인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金塘澤, 앞의 글, 53쪽). 다만 이들은 재주와 학식이 부족한데도 개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거나 광종에게 잘 보여 고위직에 오른 자들이라 하겠다. 당시 경상에 오른 자들의 명단을 잘 알 수 없는 현 상황에서는 그 예를 구체적으로 들기는 어렵다. 물론 여기에는 남북 용인들의 일부도 포함되리라 생각한다.

다음「後生」들은 대체로 나이가 젊은 이들을 기리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주로 신진관료층이 포함된다고 생각된다. 이 신진관료층은 새로이 과거를 통해 진출한 무리들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광종대의 과거합격자로는 崔暹·晋兢·崔光範·徐熙·王擧·金策·崔居業·楊演·柳邦憲·白思柔·韓藺卿·崔亮·田拱之 등이 있었다. 이들이 대부분 후생으로서 광종대에 대거 관계에 진출하였다고 생각된다.191)吳 星,<高麗 光宗代의 科擧合格者>(≪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1), 39∼45쪽. 물론 여기에는「南北庸人」「非才」의 일부와 시위군 계통의「後生讒賊」들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金塘澤, 앞의 글, 48∼61쪽).

어쨌든 광종은 중국의 귀화인들을 후대하였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주기도 하고 여자를 골라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자 徐弼같은 이는 자진하여 집을 왕에게 바치면서 광종의 정책을 비판하기도 하였다.192)≪高麗史≫권 93, 列傳 6, 徐弼.

한편 광종의 이러한 개혁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해 준 것이 均如의 性相融會사상이었다. 균여는 黃州 출신으로 그 지역의 소토호였던 것 같다. 따라서 같은 지역 출신인 광종의 왕비 大穆王后 황보씨와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균여가 광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광종 4년(953) 후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광종을 책봉할 때였다. 이 때 장마가 계속되어 책봉의식을 행할 수 없었는데 균여가 祈晴祭를 행하자 雷電이 없어지고 풍운이 걷히어서 무사히 책봉의례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193)金杜珍,<均如의 生涯와 著述>(≪歷史學報≫75·76 합집, 1977;앞의 책, 1981, 11∼16쪽).

이렇게 하여 광종과 인연을 맺게 된 균여는 그 자신이 소호족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상융회 사상을 주장함으로써 광종의 전제왕권 확립에 기여하게 되었다. 광종은 대호족세력을 억압하는 대신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지방의 중소호족세력을 등용하려 했는데 균여의 성상융회 사상 역시 지방의 중소호족을 인정하여 그들을 융합할 수 있는 사상체계였기 때문이다.

性相融會 사상이란 敎宗 중에서 性宗에 속하는 華嚴宗과 相宗에 속하는 法相宗이 서로 융합된 사상체계를 말한다. 균여는 원래 화엄종 승려였는데 화엄종은 전제왕권을 뒷받침해 주는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이미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부터 화엄종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태조가 신검의 군대를 충남 연산에서 격파한 후 여기에 開泰寺를 세우고 화엄법회를 열면서 자신이 직접 그 疏文을 지은 것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화엄종은 그 뒤에도 꾸준히 성장하여 광종 4년에는 화엄종 승려인 謙信이 國師로 봉해질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런데 화엄교학은 융회적이어서 이질집단에 대한 통합사상이 될 수 있었다.194)金杜珍, 위의 책, 144∼159쪽.

법상종은 원래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하여 귀일점을 찾으려 하지 않고 현상계의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사상이다. 개인이나 개체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여 각각의 차이에 맞는 설법이나 수행을 통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원래 법상종은 융회적인 성격이 적었으나 ‘三性이 곧 眞空’이라는 新法相 사상이 등장하여 융회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 법상종은 고려 초기 이래로 주로 지방의 중소호족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이 때문에 지방의 대호족들을 억압하고 중소호족들을 등용하여 전제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광종에게 균여의 성상융회 사상이 환영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195)金杜珍, 위의 책 참조.

광종 11년(960)부터 그 말년까지는 이러한 개혁과 숙청, 그리고 혼란이 계속되면서 일부 호족공신 세력들이 재등장하는 시기라 하겠다. 광종 12년 4월에는 이러한 피의 숙청에 대한 하늘의 견책으로서 홍수가 나서 많은 인가가 떠내려 갔으며 물의 빛깔이 빨간색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또 이 해에 宮闕修營都監을 설치하여 궁궐을 확장, 수리케 하고 광종 자신은 正匡 王育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같은 조치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궁궐을 더욱 호화롭게 수리하여 왕실의 위엄을 높히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거처를 왕육의 집으로 옮겨 신변의 위협을 제거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행한 그의 정사를 정리해 보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광종 14년 6월, 2년만에 궁궐로 돌아 와 내린 다음의 조서에서 엿볼 수 있다.

내가 요즈음 궁궐을 수리하기 위하여 오랫 동안 이궁에 있었으나 마음은 경비에 있고 일은 심상치 않았다. 백관이 아뢰는 일도 친히 듣지 못한 것이 많아 여러 사람이 혹 의심을 품을까 염려하였는데 그것이 내 마음 속에 있어 잠잘 때나 밥먹을 때나 잊기 어려웠다. 이제 궁궐을 수리하는 공사가 끝났으므로 정사를 들을 곳이 있게 되었다. 무릇 너희 백관들은 너희들의 일을 공경하여 예전대로 나와 아뢰고 머뭇거림이 없게 하라. 고기가 물을 만나 같이 기뻐하는 것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막힘에 이르지 않기를 바란다(≪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14년 6월).

이후 광종의 치적은 대략 세 갈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먼저 광종의 불교에 대한 혹신을 들 수 있다. 그는 광종 14년(963) 歸法寺를 창건한 것을 비롯하여 광종 19년에는 弘化寺·遊巖寺·三歸寺 등의 사원을 건립함과 더불어 많은 불교행사를 벌였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광종은 사원을 건립하여 태조와 어머니 劉氏의 원당을 삼는 등 많은 배려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오면 불교를 지나치게 혹신한 결과 극심한 폐단을 노출시키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광종은 귀법사를 창건하고 濟危寶를 설치함과 더불어 균여를 귀법사에 주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제위보는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재단이다. 제위보가 귀법사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전곡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귀법사의 경제적 위치가 중요했음을 알 수 있으며 광종의 전제왕권을 뒷받침해 주었던 균여가 주지로 있었음을 감안하면 그 정치적 위치도 가늠할 수 있다. 그리하여 광종 21년(970)에는 왕 자신이 직접 귀법사에 행차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귀법사에 주지하게 된 균여는 광종 24년에 사망할 때까지 여기서 베풀어지는 각종 齋會를 주관하면서 광종의 개혁을 후원해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광종 19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참소사건이 일어나면서 균여와 광종과의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균여가 異情을 수행한다고 같은 귀법사의 승려인 正秀가 참소하였던 것이다. 처음 균여를 해치려 했던 광종은 꿈속에서 神人의 압력을 받고 오히려 정수를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광종과 균여는 멀어지게 되고 대신 坦文이 광종과 밀착되는 것이다.

탄문은 일찍이 광종이 태어날 때부터 그와 인연을 맺게 된 인물이었다. 광종의 어머니 유씨가 임신하자 태조는 탄문을 청하여 기도케 하고 마침내 그 법력으로 광종을 낳게 되었다. 이렇듯 그는 일찍부터 왕실과 관련되어 있었고 불교행사에 적극적이었으며, 화엄종의 입장에서 敎禪 일치의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광종의 개혁에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소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광종 19년 이후 균여가 광종과 멀어지는 대신 그가 광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광종 19년(968) 탄문의 王師 책봉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196)이러한 불교계의 변화는 광종 16년(965) 皇甫氏系 세력의 도움으로 태자에 책봉되어 內史·諸軍事·內議令職 수행을 통해 자신의 실권을 구축해 나가던 伷(후의 경종)의 영향력이 개입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盧鏞弼,<光宗 末年 太子 伷의 政治的 役割>≪震檀學報≫68, 1989, 13∼18쪽).

왕사로 책봉된 이후 탄문은 계속 귀법사에 거주하면서 광종 23년 태자를 위해 千佛道場을 개설한 것을 비롯하여 五百羅漢齋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광종의 개혁을 후원해 주었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하여 탄문은 광종 25년 國師로 책봉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광종 26년에 탄문은 광종의 곁을 떠나 普願寺로 갔다가 거기서 바로 죽게 되었다. 개혁의 동반자를 잃게 된 광종은 탄문이 죽은 2개월 뒤에 역시 세상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귀법사는 광종의 개혁에 대한 지지 기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197)金龍善,<光宗의 改革과 歸法寺>(≪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1) 참조.

한편 광종은 많은 불사를 행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빈번한 齋會를 베풀자 무뢰배들이 거짓으로 중이 되어 배불리 먹기를 구하고 구걸하는 자가 몰려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광종이 얼마나 불교를 혹신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은 다음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광종은 참소와 奸邪를 믿어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미혹되어 죄업을 제거하려고 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佛事를 많이 일으켰다. 그리하여 혹은 毘盧遮那의 懺悔法을 베풀기도 하고 혹은 중을 毬庭에 모아 공양하기도 하고 혹은 無遮水陸會를 귀법사에서 베풀었다. 매양 부처에게 재 올리는 날을 당하면 반드시 걸식하는 중에게 밥을 먹이기도 하고 혹은 內道場의 떡과 과일을 걸인에게 내어 주기도 하였다. 혹은 新池·穴口·摩利山 등의 魚梁을 放生所로 삼아 한 해 동안에 네 번이나 사자를 보내어 그 지방의 사원에 나가서 불경을 강연하였다. 또 살생을 금하여 御廚의 肉膳은 宰夫를 시켜 짐승을 도살하지 않고 시장에서 사서 바치게 하였으며, 대소 신민으로 하여금 모두 다 참여케 하여 米穀·柴炭·馬料를 운반하여 서울과 지방의 길가는 사람에게 보시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참소를 믿은 때문에 사람을 초개처럼 여겨 베어 죽인 사람이 산더미같이 쌓였으며 항상 백성의 고혈을 다 짜내어 재를 올리는 데 이바지했으니 부처가 영험이 있다면 어찌 즐거이 공양을 받겠는가. 이 때에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고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며 모든 범죄자가 모양을 변장하여 중이 되고 돌아 다니면서 구걸하는 무리들이 와서 여러 중들과 서로 섞여서 재에 가는 자가 많았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또 승려 善會를 시켜 그 보시를 주관케 하니 떡과 쌀을 함부로 다른 데에 허비했다. 이로 인하여 선회가 수명대로 살지 못하였고 길가의 송장이 되었으니 당시의 의론이 이를 기롱했다(≪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이처럼 광종은 불교를 혹신하여 많은 전곡을 탕진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결국은 광종의 개혁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 한 요인이었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광종은 후주의 뒤를 이어 송이 건국하자 광종 13년(962) 광평시랑 李興祐를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그리고 광종 14년 12월부터는 송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광종은 일찍이 원년(950)과 11년에 각각 光德·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바 있다. 그런데 그 독자적인 연호를 버리고 송의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의 독자적인 개혁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태도에 대해 송은 冊命使로 時贊을 고려에 보내 왔다. 이 때 시찬 등은 오다가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90여 명이나 빠져 죽고 시찬만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광종이 특별히 이를 후대하고 위로하였다. 광종 23년에는 고려에서 內議侍郎 徐熙를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기도 하였다. 이에 송나라 황제는 詔勅으로 광종에게 식읍을 더하여 주고 서희는 물론 같이 갔던 崔業과 康禮·劉隱 등에게 관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광종의 친송 정책은 태조 이래로 지속되어 온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개혁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 그는 북방에 많은 성을 쌓기도 하였다. 그것은 거란에 대한 대책이었던 것 같다. 일찍이 정종 때에도 거란이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 때문에 광군 30만을 조직하는가 하면 북방에 성을 쌓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을 계승하여 광종은 樂陵郡(광종 18년)·威化鎭(동 19년)·寧朔鎭(동 20년)·安朔鎭(동 21년) 등에 성을 쌓았다. 광종 24년(973)에도 長平鎭·博平鎭의 2진과 高州에 성을 쌓고 信都城을 수축하는 조치를 취하였는데,198)≪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城堡. 이는 물론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도적이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개혁의 부작용으로 이반된 민심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해소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거란이 침입할 것이라는 위기감으로 백성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성을 쌓는 일에 동원하여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한 조치가 아닌가 한다.

광종 11년부터 광종 26년 그가 죽을 때까지의 개혁과 그 부작용에 대해 최승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경신년(광종 11:960)에서 을해년(광종 26:975)까지의 16년간은 간흉이 다투어 진출하여 참소가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용납할 데가 없고 소인만이 제 뜻대로 되었다. 드디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기까지 하여 상하가 마음을 합치지 못하고 여러 신하들이 실망하여 舊臣宿將이 차례로 죽음을 당하고 골육이나 인척도 또한 모두 멸하였다. 하물며 혜종이 능히 형제를 보전한 일과 정종이 능히 국가를 보존한 일은 은혜와 의리를 논한다면 중하다고 이를 수 있는데 두 왕의 뒤에 모두 다만 아들 하나만이 있었는데도 또한 그 생명까지 보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한 아들까지도 의심하고 꺼렸다. 그런 까닭에 경종이 그 때 동궁에 있으면서 매양 스스로 불안했는데 다행이 그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 어찌 그 처음에는 잘하여 일찍이 좋은 명예를 얻었는데도 뒤에 잘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매우 원통한 일이다(≪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여기서 보는 것처럼 광종은 처음에는≪貞觀政要≫를 읽으면서 좋은 정치를 하였으나 광종 11년부터 많은 비난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광종은 즉위 후 8년 동안은≪貞觀政要≫를 읽으면서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마음과 태도를 닦았다. 그리하여 정치는 물론 의례나 제도면에서도 자못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광종 9년 雙冀가 등용되면서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에 착수하였다. 노비안검법이나 과거제도의 실시, 그리고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호족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 때 개혁을 주도한 세력은 주로「文士」층과 중국에서 귀화한「南北庸人」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과정에서「非才」들과 신진관료층인「後生」들이 함부로 진출하여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광종 11년(960) 참소사건이 일어난 후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계속되면서 구신숙장들이 많은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광종대에는 문신 관료층을 중심으로 한 개혁을 통하여 호족공신 세력의 약화와 왕권의 강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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