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2. 왕권의 확립과정과 호족
  • 4) 호족 연합정권설의 문제
  • (2) 호족 연합정권의 개념

(2) 호족 연합정권의 개념

무엇을 호족이라고 하는가 하는「豪族」의 개념부터 알아 보자. 호족이란 용어의 사용은 일찍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後漢書≫의 곳곳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豪」는 원래 모양은 돼지 같으나 붓대와 같이 억센 털을 가진 짐승의 이름이었다. 그러다가「豪」는 길고 질좋은 짐승의 털을 의미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우수한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런 의미의「豪」에 친족집단을 뜻하는「族」이 붙어 豪族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호족은 뛰어나고 우수한 친족집단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역사 용어로서의 호족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의미로서 쓰이고 있다. 中國史에 있어서의 호족은 주로 漢代와 魏晋南北朝時代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앙의 귀족과 대비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호족은 지방의 토착세력으로서 그 지역의 실력자나 그 친족집단을 지칭하는 의미로 보통 사용되었던 것이다.252)金甲童, 앞의 책, 248∼253쪽.

당시의 호족은 대토지 소유자로서 토지 경영을 위하여 다수의 노비와 소작인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노비에 의한 노동의 비중은 크지 않았고 대부분 소작인에 의한 생산이 주류를 이루었고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호족들은 舍人·賓客이라 일컬어지는 비혈연자들도 기식시켰다. 그런데 이 빈객들의 대부분은 遊俠의 무리들로 군사력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또 각 군현의 관리가 되어 때때로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호족들은 문화의 독점적 향수자이기도 하였다. 특히 그들 사이에 애호되었던 유학은 호족생활의 윤리적 체계화 뿐 아니라 정치의 원리로서 중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사에 나타난 호족은 대토지 소유자라는 재력을 기본으로 하고 吏員이나 관직자로서의 권력, 그리고 族人이나 빈객으로 형성된 무력까지 갖춘 지방의 친족집단이거나 세력가였다. 또 그들은 문화적인 독점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호족은 한대의 왕조 말기부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위진남북조는 물론 수·당시대에 이른바 문벌귀족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계층이었다.253)宇都宮淸吉,<漢代の豪族>(≪歷史敎育≫94, 1961;≪中國古代中世史硏究≫, 東京, 創文社, 1977, 381∼384쪽).

그렇다면 韓國史에 있어서의 호족은 어떻게 규정되어 왔는가. 신라 말에 흥기한 호족도 대토지 소유라는 재력을 갖고 있었다. 寺田 및 屯田의 私領化, 丁田의 私田化 등의 추세에 의하여 그 지반을 마련하게 되었다.254)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改造社, 1937), 13∼16쪽. 그리고 귀족·관료들에게 지급되었던 食邑·祿邑도 수취체제의 혼란으로 호족들의 田莊으로 되었으며, 그들은 莊頭라는 관리인까지 파견하기도 했던 것이다.255)姜晋哲,<豪族의 土地支配>(≪高麗土地制度史 硏究≫, 高大出版部, 1980), 20쪽.

호족들은 私兵을 중심으로 한 무력도 가지고 있었다. 지방호족들의 사병은 같은 친족들도 있었겠지만 주로 유민이나 일정한 지역의 주민이 모집 내지 징집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 사병과는 擬制家族的인 관계가 유지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기록에 보면「族」「黨」등으로 표현된 자들이 사병에 해당된다고 하겠다.256)李基白,<新羅 私兵考>(≪歷史學報≫9, 1957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한편 그들은 중앙과 비슷한 관부 조직을 가지고 지역민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堂大等·大等이란 직함을 가지고 兵部·倉部와 같이 중앙과 동일한 명칭의 부서까지 갖추고 있었다.257)李基白, 위의 글, 266∼267쪽. 이와 같은 통치기구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을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의 州治나 小京의 일부에는「學院」이 설치 운영되고 있었다.258)金光洙,<羅末麗初의 地方學校問題>(≪韓國史硏究≫7, 1972). 따라서 이들 지역에 유력한 호족들이 많이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와 같이 나말려초의 호족도 경제력은 물론 권력·무력을 갖추고 문화의 독점력까지 누리고 있는 존재였다. 즉 지방의 유력한 族團이거나 실력자였다.

이러한 호족은 나말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여 고려왕조를 성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왕조 성립 후 호족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하나는 중앙으로 진출하여 문벌귀족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 남아 있으면서 왕권 강화와 더불어 향리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지방에 남아있던 향리들도 과거나 천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중앙에서 고위 관직에 오르는 데에도 별다른 제약은 없었다. 고려시대 문벌귀족의 저변에도 호족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향리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호족의 역사적 성격도 중국의 경우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중국사나 한국사를 막론하고 호족은 대토지 소유라는 경제력을 근간으로하여 권력이나 무력, 그리고 문화의 독점력까지 갖춘 지방의 유력한 족단이나 그 일원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하겠다. 한편 호족은 고대사회 속에서 왕권과 대립하는 일면 타협하기도 하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새롭게 재편된 왕조체제 속에서도 문벌귀족의 저변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호족의 개념과 성격이 대략 이렇다고 할 때 나말려초의 사회상황을 논하는데 호족이란 용어의 사용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 용어의 사용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호족이란 존재는 주로 고대사회를 설명할 때 언급되는 것이므로 고려시대에 호족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는 것이다.259)李純根,<羅末麗初「豪族」용어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聖心女大論文集≫19, 1987). 또 나말려초 사회 변동의 담당자층을 호족 대신에「豪富層」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호족에 대한 종래의 내용 규정들이 소위 족단이라는 혈연적인 기반, 정치적으로는 낙향한 귀족이나 촌주 등 과거 수장층과의 계보적 연결,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공동체원에 대한 공납제적 지배라는 면에 중점을 두어 사용해 옴으로써 새 시대를 향한 변혁세력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구시대적인 성격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족이라는 일종의 단체 개념보다는 豪富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개별적인 존재로 수렴되고 다양한 사회경제적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라 하고 있다.260)蔡雄錫,<高麗前期 社會構造와 本貫制>(≪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341쪽의 註 20 참조. 그밖에도 당시의 지방분권세력은 호족이라 하는 것 보다는「鄕豪」라 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 용어는 태조의 아들로서 왕위에 즉위한 광종대의 명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 지방분권적 성향을 가진 재지 향촌세력을 「鄕豪」라 하고 이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집권층을 형성한 중앙 권세가를「權豪」「豪强」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261)文暻鉉,<豪族論>(≪高麗太祖의 後三國統一 硏究≫, 螢雪出版社, 1987), 165∼168쪽.

이러한 견해는 일면 타당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호족이란 용어의 사용이 아주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호족이란 용어가 사용된 예가 있기 때문이다.262)≪祖堂集≫권 17, 雙峰和尙 道允條에 ‘累葉豪族’이란 용어가 보이며≪高麗史≫권 21, 世家 21, 신종 및≪高麗史節要≫권 14, 신종 3년 8월에「豪族」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호족이란 용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별문제지만 그렇지 않은 한에 있어서는 호족 용어의 사용이 부적당한 것은 아니라 하겠다. 더욱이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사용해 온 용어를 정당한 이유없이 임의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은 혼란만을 초래할 뿐이라 생각한다. 또 호족이란 용어는 중국사와 일본사에도 사용되고 있어 비교사학적인 측면에서도 유용한 일이라 하겠다. 다만 호족의 개념과 비슷한 용어가 다수 쓰이고 있음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冠族·大族·右族·望族·大家·豪家·大姓·著姓·鄕豪·土豪·豪右·豪黨·豪强 등은 표현 방식에 따라 조금씩 상이한 느낌을 주지만 대체로 호족과 비슷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263)金甲童, 앞의 책, 258∼261쪽.

그러면 이제「「聯合政權」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연합이란 일정한 목적 아래 둘 이상의 개별적인 조직체가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서로 어울려 하나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연합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고 이것이 정치학 용어로 쓰일 때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즉 연합정권 또는 연합정부는 이미 정치학에서는 개념 정립이 이루어진 용어라는 것이다.

현대의 정치적 용법에 있어「Confederation」(국가연합이라 번역할 수 있다)은 국가결합의 한 형태로 외부와 관련된 공통의 행동을 위한 몇몇 독립국(주권국)들의 영구적인 결합을 뜻한다. 다시 말해 국가연합은 조약에 기반을 둔 여러 국가 간의 평등한 결합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결합관계가 더욱 강화되면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력으로 인해 구성국은 국제법상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Federation」(國家聯邦)이 되는 것이다. 현재의 미국이나 소련(독립국가연합 이전)이 그 예이다.

독립국(주권국)들의 연합체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본적인 특징과 공통적인 운영 원리를 갖는다. 첫째, 연합관계는 성문법 즉 영속적인 계약에 의해서 성립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권력의 분산과 정치적 체계의 분산 등을 규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둘째는 철저한 지방분권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지방정부들은 중앙의 통치행위에 동등한 상대자로서 참여할 수 있고 연합정부의 헌법에 보장된 대로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셋째, 권력에 대한 지역적인 분배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하여 영역적 민주주의라고도 불리우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가 마련된다. 먼저 성문법에 규정된 연대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시민들과 지방정부·중앙정부 사이에 연락체계를 둔다.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봉사할 대표를 뽑아 지방정부나 중앙정부에 보내는 것이다. 반면 지방분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지방정부의 지배 영역이 거의 영속적으로 보장된다. 만약 변경될 때에는 각 지방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각 지방정부의 독자적인 행정·입법·사법제도의 설치가 보장된다. 또 지방분권적인 정당체계의 존재가 인정된다.264)金甲童, 위의 책, 263∼265쪽.

위와 같은 특징과 제도를 가진 국가결합의 한 양태를 국가연합(Confederation)이라 하고 이렇게 탄생된 국가를 연합국가 내지 연합정권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래의 호족 연합정권설이 이러한 정치학적 개념 검토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중국 후한시대에 적용되었던 용어를 별 비판없이 빌려 쓴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의 호족 연합정권설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

후한의 호족 연합정권설에 대한 핵심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후한을 세운 光武帝 劉秀가 처음 거병했을 때의 군대가 종래 豪族內婚制를 통해 결합되어 있던 南陽豪族의 연합군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상황이 유수의 황제 즉위 이후에도 계속되어 연합적 성격을 띤 남양 호족들이 정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265)宇都宮淸吉,<劉秀と南陽>(≪漢代社會經濟史硏究≫, 弘文堂, 1954), 393∼394쪽.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상당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근본적인 사실 파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유수가 처음 거병했을 때 남양 호족은 물론 다른 지역의 호족들도 거의 참여치 않았다는 것이다. 호족들이 유수 집단에 참여한 것은 유수가 河北 지방의 王郎 집단을 토벌하여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이후라는 것이다. 유수가 황제의 지위에 오른 후 정권을 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32공신 중 남양 출신은 13명에 불과한 반면 다른 지역 출신이 19명이나 된다. 이같은 상황은 유수의 초기 군사집단이 남양의 호족 연합군이었으며 후한제국 성립 이후에 남양 호족이 정계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호족 연합정권설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266)矢野主稅,<後漢光武帝集團の性格>(≪門閥社會成立史≫, 國書刊行會, 1976), 424∼440쪽. 따라서 후한에 적용되었던 호족 연합정권의 개념을 가지고 고려 초기의 상황을 논하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라 하겠다.

또 한편으로는 정치학에서 정의된 연합정권의 개념을 굳이 역사학에도 그대로 적용시켜야 하느냐 하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역사학 나름대로의 개념을 정립하여 사용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언어는 약속이기 때문에 그러한 말에도 일리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학이라고 해서 그것이 역사학자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모든 인간들의 공유물인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물론이고 정치학자가 역사를 읽을 때에도 그것을 이해하도록 써야 한다. 정치학자가 역사를 읽으면서 호족 연합정권이란 용어를 접할 때는 이미 정립된 정치학적 개념을 가지고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개념이 맞지 않으면 혼란만을 초래할 것이다. 요즈음처럼 학문 간의 연계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하겠다. 결국 우리는 정치학적으로 개념이 정립된 연합정권이란 용어에 유의하면서 호족 연합정권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豪族聯合政權」이란 개념을 정치학적으로 살펴 본다면 독자성을 가진 호족들이 상호간의 조약이나 합의를 통해 창출한 정권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호족들의 지배 영역이 하나의 독립국처럼 되어 있고 지방과 중앙과의 관계가 거의 평등하여야 한다. 그리고 지방과 중앙과의 사이에 연락체계가 존재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학적인 호족 연합정권의 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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