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2. 왕권의 확립과정과 호족
  • 4) 호족 연합정권설의 문제
  • (3) 고려 초기의 정치형태

(3) 고려 초기의 정치형태

그렇다면 고려 초기의 정치적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종래 주장되어 온 대로 호족 연합정권이라 할 수 있을까. 이제 호족 연합정권이란 정치학적인 개념이 도출된 이상 그에 합당한가를 검증해 보자. 우선 신라 말에 호족들의 독자성이 얼마나 유지되었는가에 대해 살펴 보자. 당시 그들은 성주·장군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출신 기반은 대개 낙향한 중앙귀족이나 吏職者, 그리고 촌주였다. 이들은 진성여왕 3년(889)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농민반란의 와중에서 지역민들을 무장시켜 스스로 지켰다. 그같은 예는 李총言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신라 말에 벽진군을 지키고 있었는데 뭇도둑들이 날뛰게 되자 성을 견고히 하여 그 지역을 고수하니 이에 백성들이 의뢰하여 편안하게 되었던 것이다.267)≪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附 李총言.≪掾曹龜鑑≫에서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나말에 여러 고을의 토착민은 능히 읍을 호령하여 다스리는 자였다”라든가 “나말에 귀족의 후예가 다투어 豪武로써 州郡을 제패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268)≪掾曹龜鑑≫권 1, 興陽李氏譜 및 安東金氏譜. 따라서 신라 말의 지방세력인 호족들은 거의 독자적으로 자신의 관할 구역을 통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관할 구역은 하나의 독립국처럼 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그들이 신라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고려왕조에 마음대로 귀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정권은 호족들의 계약 내지 합의에 의해 성립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왕건을 왕으로 추대한 자들부터가 호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태조를 왕으로 직접 추대한 것은 洪儒·裵玄慶·申崇謙·卜智謙 등이었다. 신숭겸의 경우 출신지는 전라도 谷城縣이었지만 그 지역의 호족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의 희망에 따라 平山으로 본관이 정해졌지만 실제 살았던 곳은 光海州(지금의 춘천)로 무덤도 거기에 있다. 복지겸도 그의 선대가 당나라에서 건너 왔기 때문에≪世宗實錄地理志≫에는 土姓으로 기재되어 있지도 않다. 홍유의 홍씨도≪世宗實錄地理志≫토성조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배현경도 본래의 慶州 裵氏와는 계열을 달리하는 것 같다. 또한 그들의 원래 이름이 術·白玉衫·能山·砂塊 등의 漢式이 아닌 점으로도 그들을 호족이라 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그들에 의한 왕건의 추대가 계약이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269)金甲童, 앞의 책, 281∼282쪽.

이제 고려왕조 성립 후에 고려정부와 호족들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를 살펴 보자. 태조는 왕위에 오른 후 其人制나 군현의 陞降을 통해 지방의 호족세력을 통제하려 하였다. 또 때때로 巡官이나 轉運使를 지방에 파견하여 정치·경제적인 면에서 감시, 통제하였으나 호족들의 독자성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비록 중앙의 통제에 의해 군·현의 내속관계가 조정되기는 했지만 속군·현의 행정·조세 업무를 관장한 今有(檢務)·租藏에 토착 호족들이 임명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말해 준다. 물론 속군·현에서는 호족들이 정치·행정·조세 업무 모두를 관장하였다. 또 호족 출신의 공신들이 중앙으로 진출할 경우 외관과는 별도로 자신들의 출신지를 통제할 수 있었던 事審官制도 독자성의 한 근거이다.

그리고 웬만한 행정사무는 호족들이 알아서 처리하였다.≪高麗圖經≫에는 “民長의 명칭은 중국의 鄕兵이나 保伍의 長과 같다. 즉 백성 가운데 富足한 자를 뽑아 시켰는데 그 마을의 큰 일이면 관부에 가되 작은 일이면 곧 민장에게 속하므로 거기 사는 細民들이 자못 존중하고 섬긴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270)≪高麗圖經≫권 19, 民庶 民長. 여기서의 민장이 고려 초기에는 각 지역의 호족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려 인종 때의 상황이 이럴진대 외관이 거의 파견되지 못했던 태조대의 실정은 가히 알만 하다 하겠다. 또 성종 7년(988)에 백성들의 고소를 처결하지 않는 長吏는 처벌하겠다는 判文이 나오게 된 것은271)≪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호족의 후신인 장리들이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 본 바와 같이 고려 초기의 호족들은 행정·징세 및 사법권 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한 국가였기 때문에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권은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호족들과 중앙정부 사이에는 사심관제와 기인제를 통한 연락관계가 지속되었다. 따라서 고려 초기의 정권은 연합체제적인 성격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정권의 성립 자체가 호족들 간의 조약이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호족 연합정권이라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호족들의 세력이나 독자성이 다른 어느 시기보다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고려 초기의 정권을「호족연합적 성격을 가진 정권」이라든가 이 시기를「호족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金甲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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