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3. 고려 귀족사회의 성립
  • 1) 성종대 지배체제의 정비

1) 성종대 지배체제의 정비

경종이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그 뒤를 이어 成宗이 즉위하였다. 성종은 戴宗 旭의 아들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의 일대에 고려의 많은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諡號에서도 엿볼 수 있다.≪高麗史節要≫찬자는 성종의 “성품이 엄정하고 도량이 넓어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데 節義를 숭상하였으며 賢士를 구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여 정치가 볼 만한 것이 있었다”272)≪高麗史節要≫권 2, 성종 評.라고 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정치는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유교적인 중앙집권 체제의 완비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는 즉위하자 마자 八關會의 雜技들이 떳떳치 못하고 번잡스럽다 하여 이를 폐지했는가 하면 성종 3년(984) 10월에는 사람들이 자기 집을 희사하여 사원으로 만드는 폐단을 금지케 하기도 하였다. 또 6년 10월에는 兩京(개경과 서경)의 팔관회 자체를 아예 폐지하기까지 하였다. 팔관회는 이미 신라시대 때부터 성대하게 치러졌던 불교행사였지만 상당 부분 토착적인 민속신앙과 혼합되어 있었다. 고려 태조의 訓要 10條에 의하면 당시의 팔관회는 天靈과 五嶽·名山·大川·龍神을 섬기는 것이라 하면서 이를 잘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273)≪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 그러한 팔관회를 성종은 폐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종도 불교 자체를 배척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성종 7년(988) 12월에는 불교의 교법에 의해 1월·5월·9월을 3長月로 하여 짐승에 대한 도살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성종 8년에는 “태조의 忌齋와 先考의 기재에는 5일 동안을, 先妣의 기재에는 3일 동안 향불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며 짐승의 도살을 금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敎書를 반포하고 이를 실천하기도 했다.274)≪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8년 12월 병인. 성종 10년에는 韓彦恭이 宋에서 대장경을 가져 오자 왕이 내전으로 맞아 들이고 승려를 초청하여 대장경을 읽게 하고 죄수들을 석방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임종시에도 內天王寺라는 절로 옮겨 가서 죽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폐단 시정과 함께 성종이 가장 주력한 것은 유교적인 제도와 문물의 정비였다. 성종 2년(983) 圓丘壇을 설치하여 풍년을 빌었으며 거기에 태조의 신위를 모시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 같은 해에 친히 籍田을 갈고 神農氏를 제사하였으며 后稷의 神位를 함께 모시기도 하였다. 이 때부터 풍년을 빌고 적전을 가는 예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성종 4년에는 五服에 휴가를 주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에 의하면 斬衰와 齋衰 3년에는 100일의 휴가를 주고 齋衰 朞年에는 30일의 휴가를 주며 大功 9월에는 20일, 小功 5월에는 15일, 그리고 緦麻 3월에는 7일의 휴가를 주도록 되어 있었다. 성종 8년에는 太廟를 지으면서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자재를 운반하였다. 동왕 13년에 이르러서는 태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태조·혜종·정종·광종·대종·경종의 神主를 모시기도 하였고, 이에 앞서 동 12년에는 昭穆에 따른 五廟制를 실시하였다. 또 성종 15년에는 조정의 관리들이 부모상을 당하였을 때 휴가를 주는 제도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忌日에는 3일, 매달 초하루와 보름은 1일, 大·小祥의 제삿날에는 7일, 대상 후 60일을 지나서 禫祭를 지낼 때에는 5일 동안의 휴가를 주도록 하였던 것이다.

성종은 또한 유교적인 애민사상을 직접 실천하려 노력하였으며 충효의 윤리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성종 5년(986) 태조대의 黑倉을 보완 개편하여 義倉 제도를 마련하였다. 의창은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대여해 주었다가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기도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기도 했던 기관이었다.275)林基形,<義倉攷-高句麗 及 高麗時代를 中心으로->(≪歷史學硏究≫2, 全南大, 1964) 참조. 이와 같은 의창 설치의 동기에 대해서는 그의 교서를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즉 “내가 듣건대 오직 덕으로 정치를 잘 할 수 있고 정치는 백성을 기르는 데 있다고 하며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사람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것이다. 우리 태조께서 흑창을 설치하여 가난한 백성에게 대여하는 것을 法式으로 삼으셨다. 지금 백성은 점점 늘어가는 데도 저축은 많지 못하니 쌀 1만 석을 더 보태고 이름을 의창이라 고치겠다. 또 여러 州·府에도 각기 의창을 설치하고자 하니 맡은 관원은 그 지역 인구와 호구의 많고 적음과 창고에 있는 곡식의 수량을 조사하여 아뢰어라”276)≪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하였다. 또 성종 12년에는 兩京과 12牧에 常平倉을 설치하였다. 상평창은 말 그대로 곡식의 가격을 조절하여 항상 고르게 하는 기관이었다. 흉년이 들어 곡식의 가격이 비싸지면 비축해 놓은 곡식을 방출하여 가격을 떨어뜨리고 풍년이 들어 가격이 싸지면 이를 사들여 가격을 조절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성종 9년(990)에는 孝子·順孫·義夫·節婦들을 전국에서 찾아 포상을 내렸다. 아버지가 독사에게 물려 죽자 침실에 빈소를 설치하고 5개월 동안이나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음식을 드렸던 南海 狼山島의 백성 能宣의 딸 咸富 및 어머니를 자기 집 후원에 장사지내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던 折衝府別將 趙英 등 7인에게 다 旌門을 세우고 국가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 때 내린 교서를 보면 성종이 얼마나 효를 중시했는가 하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거기에 의하면 “대체로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먼저 근본을 힘써야 한다. 근본을 힘쓰는 데에는 효도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효도는 三皇五帝의 기본사업으로써 만사의 강령이요 모든 善의 주체이다…아아 임금은 만 백성의 우두머리요 만 백성은 임금의 심복이다. 백성들이 착한 일을 하면 그것은 동시에 나의 복이요 악한 일을 하면 그것은 역시 나의 근심이다. 부모 봉양을 잘하는 자를 표창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뜻을 표시하는 바이다. 시골의 우매한 백성들까지도 오히려 꾸준히 효도를 하려 하는데 벼슬하는 신하들이야 자기 조상을 받드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능히 자기 집에서 효자가 된다면 반드시 국가의 충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관료와 백성들은 나의 말을 명심할지어다”277)≪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9년 9월.라고 하였다. 이것은 성종이 효의 윤리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관리들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종이 가장 치중한 것은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이었다. 우선 그는 중앙의 관제를 정비하였다. 그때까지 내려 오던 廣評省·內奉省·內議省·內史省 체제를 唐의 三省 체제를 모방하여 정비하였다.≪高麗史≫百官志, 門下府·尙書省條에 보면 국초의 내의성이 성종 원년에 內史門下省으로 고쳐졌으며 고려 초기의 광평성은 성종 원년에 御事都省이 되었다가 성종 14년에 이르러 尙書都省이 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고찰로 내사문하성은 광평성·내사성·내의성의 기능이 혼합되어 탄생된 것이며 상서도성의 전신은 오히려 광평성이 아닌 내봉성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278)李泰鎭,<高麗 宰府의 成立-그 制度史的 考察->(≪歷史學報≫56, 1972), 34∼39쪽. 또 성종 원년에서 2년 사이에 최승로가 選官御事가 되고 徐熙·鄭兼儒·薛神祐 등이 각각 병관어사, 공관어사, 형관어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성종 2년(983)에는≪高麗史≫성종 세가의 표현과 같이 대체로 3省 6曹의 체제가 갖추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당의 3성 체제를 모방했다 하더라도 그 실상은 당과 달랐다. 고려의 내사문하성은 내사성과 문하성의 2성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의 관부였던 것이다.279)邊太燮,<高麗의 中書門下省에 대하여>(≪歷史敎育≫10, 1967;≪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43∼47쪽. 물론 이들 관부의 기능이나 역할도 정확하게 분리되었다. 내사문하성은 정사를 논의하여 처리하거나 諫諍·封駁의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상서도성과 그 휘하의 6부는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여 집행하는 기구였다.

또한 관리들의 서열 체계도 당의 文散階·武散階의 도입을 통하여 새롭게 정비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관리들의 서열 체계는 있었다. 그것은 官階라 하였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토착적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성종 2년부터 중국식 문산계가 채용되면서 관계는 서서히 그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성종 14년에 가서는 鄕職으로 전락하여 버렸다.280)金甲童,<高麗初期 官階의 成立과 그 意義>(≪歷史學報≫117, 1988;≪羅末麗初의 豪族과 社會變動硏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90, 181∼189쪽). 그러나 이미 光宗代부터 문산계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견해도 있다(武田幸男,<高麗初期의 官階-高麗王朝 成立過程의 一考察->≪朝鮮學報≫41, 1966, 7∼14쪽). 한편 성종 14년(995)에는 무산계 29등급이 도입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문·무산계의 기능은 중국과는 다른 고려의 독자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즉 중국에서의 문산계는 문신들만이 받은 것이었으나 고려에서는 문신들 뿐 아니라 무신들도 문산계를 받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고려 초기의 관계가 문·무신 모두에게 주어졌던 전례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무산계의 성격도 중국과 달랐다. 고려의 무산계는 무신들만 받은 것이 아니라 鄕吏·耽羅의 王族·女眞 酋長·老兵·工匠·樂人 등도 받았던 것이다.281)旗田巍,<高麗의 武散階>(≪朝鮮學報≫21·22, 1961;≪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385∼402쪽). 이처럼 성종이 중앙의 관제나 관계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이를 지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성장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성종의 이러한 유교적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책은 郡縣制의 정비로도 나타났다. 성종은 동왕 2년 전국의 12개 주에 州牧이라는 외관을 파견하였다.282)당시의 州牧은 지방행정구역명이 아니라 지방관의 명칭이었다. 그것은 성종이 舜임금의 12州牧 파견을 본받았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으며 중국 漢代의 주목도 지방관명이었기 때문이다. 또 金審言이나 柳伸과 같이 주목에 임명된 인물들이 찾아지고 있는 것이다(≪高麗史≫권 93, 列傳 6, 金審言 및 권 95, 列傳 8, 柳伸). 물론 나중에는 이것이 행정 구역명으로 변화함으로써 그 장관도 牧使라 칭하게 된다. 외관이 파견된 12개 주는 楊州·廣州·忠州·淸州·公州·海州·晋州·尙州·全州·羅州·昇州·黃州 등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그 전해에 올린 최승로의 건의에 의한 것인데283)≪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이로써 성종은 지방의 鄕豪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의 명령을 지방에까지 효과적으로 침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외관이 파견된 지 4개월 뒤에는 각 지역의 지방관청에 公廨田이 지급되었다. 지방의 州·府·郡·縣·鄕·所·部曲·館·驛 등에 丁數에 따라 公須田·紙田·長田이 지급되었던 것이다. 이 때의 공해전 지급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지방관의 유무와 관계없이 官衙를 대상으로 지급되었다. 그것은 지방관이 없고 향리들만이 있는 지역에도 공해전이 지급되었음을 뜻한다. 특히 군현의 戶長과 향·부곡의 長에게 지급된 것으로 여겨지는284)姜晋哲,≪改訂 高麗土地制度史硏究≫(一潮閣, 1991), 199쪽. 長田의 존재가 주목된다. 따라서 그 지역 향리들에 대한 우대책으로 볼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어떤 형태로든 관청을 운영했겠지만 새로이 공해전을 지급해 준 것은 향리들이 관청 운영의 경비 조달을 명목으로 한 수탈을 방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 않나 한다. 둘째 향·부곡·관·역과 같은 특수 행정구역에도 공해전이 지급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급액수는 일반 군현보다 적었지만 이들 지역에도 토착세력과 지방관청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특징은 공해전 지급의 기준이 주·부·군·현 등 명칭상의 읍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丁數에 있었다는 점이다.285)安秉佑,<高麗前期 地方官衙 公廨田의 설치와 운영>(≪李載龒博士還曆紀念論文集≫, 175∼176쪽). 결국 공해전 지급은 각 지역의 토착세력에 대한 회유책이면서 한편으로는 이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책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성종 2년 공해전 지급이 완료된 뒤에는 주·부·군·현의 吏職을 개편하였다. 堂大等·大等을 호장·부호장으로, 그리고 兵部·倉部를 司兵·司倉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명칭 개정이 아니었다. 고려의 중앙정부에도 있었던 병부·창부의 명칭을 고친 것은 중앙과의 차별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명칭의 개정으로 지방의 토착세력은 그 독자성이 약화되어 중앙의 통제를 받는 존재로 전락해 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 조치는 앞서의 12주목의 설치, 공해전의 지급 조치와 더불어 지방세력의 통제와 중앙집권책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일련의 명맥이 통하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성종 10년(991) 각 지방의 주요한 곳에 別號를 제정하기도 하였다. 물론≪高麗史≫나≪高麗史節要≫에는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世宗實錄地理志≫경기도 廣州條에 보면 “성종 10년 辛卯年에 州郡의 別號를 정했다”고 되어 있다. 또≪慶尙道地理志≫蔚山郡條와≪世宗實錄地理志≫전라도 務安縣條에는 이 지역의 별호가 宋 太宗 淳化 2년에 제정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순화 2년이 바로 성종 10년으로 별호의 제정이 사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高麗史≫地理志에도 각 지역의 별호를 기록하면서 ‘成廟所定’이라 표현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淳化別號의 제정은 당시 성종의 유교적 중앙집권책과 慕華思想을 잘 보여 주는데, 그것은 실제 그 명칭이 중국의 그것과 같은 것이 많았다는 점 뿐만 아니라 그 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이 순화 별호는 왕실의 종친이나 공신들에게 封爵을 할 때에 많이 쓰였는데 그것은 중국의 천자가 각 지역의 제후들을 책봉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 순화 별호의 지역적 특징을 보면 태조 왕건의 后妃 출신지역이나 태조공신 세력의 근거지, 그리고 주로 태조대에 州가 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당연한 결과로서 순화 별호는 지금의 경상도·황해도·경기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전라도 지역에는 거의 없는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순화 별호가 지방 토호세력이 강하면서도 고려 왕실에 많은 기여를 한 지역에 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순화 별호의 제정은 성종의 일방적인 지방세력 억제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성종대 중앙관료로 진출한 국가유공자의 후예들이 그들 가문의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하던 열망과 성종의 지방세력 억제책이 부응하여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문벌의 급속한 세력 확대나 공신가문 출신의 지위 불안정에 따른 결과이며 국가권력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이에 부응하는 회유정책 속에서 순화 별호가 제정되었던 것이다.286)禹太連,<地方別號의 制定과 그 運用>上·中·下, (≪慶北史學≫10·11·12, 1987·1988·1989).

이후 성종 11년(992) 주·부·군·현 및 관·역·강·포의 名號를 개정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287)≪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1년 11월 및 권 56, 志 10, 地理 1, 序文.
≪高麗史節要≫권 2, 성종 11년.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다가 군현제 개편의 또 다른 전기는 성종 14년에 이루어졌는데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10道制의 실시였다.

즉 전국을 關內道·中原道·河南道·江南道·嶺南道·山南道·嶺東道·海陽道·朔方道·浿西道 등 10道로 나눈 것이었다. 물론 이 때의 도는 지방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보기는 어렵고 감찰 내지 순찰구획이었다고 볼 수 있다.288)河炫綱,≪高麗地方制度의 硏究≫(韓國硏究院, 1977), 42쪽.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州縣制의 실시였다. 군 단위의 행정구역 명칭을 없애고 州·縣(鎭) 단위의 행정구역만 존재케 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高麗初」에 州로 승격된 지역을 다시 강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때 새로이 주로 승격된 지역이 26개나 되었다.289)金甲童, 앞의 책, 160쪽. 또 성종은 이 해에 많은 外官을 파견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 때 파견된 외관의 수는 留守 2·都護府使 4·節度使 12·都團練使 7·團練使 11·防禦使 15·刺史 15 등 66인이었다.

이러한 성종 14년의 군현제 개혁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성종의 개혁은 대체로 唐制를 모방한 것이 많았다는 점이다. 10도제의 실시가 바로 당 太宗의 정착을 모방한 것이며 주현제의 실시도 당 高祖의 정책을 모방한 것이었다. 또한 이 때 파견된 외관의 명칭도 대부분 당에서 빌어 온 것으로 절도사·방어사·단련사·자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당시의 군현제는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편제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북방 지역에는 군사적 성격이 강한 방어사가 파견되고 중부 지역에는 도단련사·단련사가, 그리고 남방 지역에는 행정적 성격이 강한 자사가 파견되고 있는 상황에서 엿볼 수 있다. 셋째, 당시의 군현제 개편은 성종의 과거제·교육제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國學에 이름만 걸어 놓고 공부를 게을리 하는 자들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박식한 선비를 뽑겠다는 성종 8년의 교서에 따라 과거 급제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데에서 엿볼 수 있다. 이 때 급제한 자들이 많이 외관으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290)金甲童, 위의 책, 168∼176쪽. 결국 성종 14년의 군현제 개혁도 대체적으로 당제를 모방한 유교적 중앙집권책의 일환이었다고 하겠다.

이리하여 성종은 나름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지방의 향호 세력은 건재하여 이들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성종 15년(996) 사심관의 정원 조정이었다. 즉 지방의 각 주에 丁의 수에 따라 2·3·4인의 사심관을 두도록 하였다.29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事審官. 이것은 사심관의 증가로 인한 인원 수의 제한 조치로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지방출신의 관료가 증가함에 따른 사심관 정원의 증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해 많은 외관 파견에 대한 지방 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성종의 또 다른 업적인 科擧·敎育制는 그의 지대한 관심에서 이루어졌다. 과거제에 대해 보면 성종 2년 처음으로 최종 고시인 禮部試 합격자들을 왕이 다시 친히 시험하는 覆試를 실시하였다. 또 과거를 거의 매년 실시하였다. 물론 성종 1년·9년·11년에는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종 2년에 두번 실시하였으며 광종 때만 하더라도 광종 9년에서 26년사이에 8번밖에 실시하지 않은 것에 비하면 급격한 횟수의 증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인원수도 성종 8년 이후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 이전에는 가장 많이 뽑은 것이 8명이었지만 성종 8년에는 19명, 13년에는 17명의 급제자를 뽑았던 것이다.292)≪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凡選場.

교육제도는 과거제와도 깊은 관련을 가진다. 물론 유교사상에 심취했던 성종이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주·군·현으로 하여금 자제들을 뽑아 서울에 나아가 학습을 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가 취해진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성종 2년 12목의 설치와 관련시켜 생각해 볼 때 성종 2년의 사실이 아닌가 한다.293)李基白,<高麗 貴族社會의 成立>(≪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81), 185쪽. 그러나 이 조치에 따라 개경에 올라 온 학생들 중 고향으로 돌아 가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게 되자 성종은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성종 5년에 고향으로 돌아 가고자 하는 학생 207명에게는 베 1,400필을 주어 가게 하고 그대로 머무르는 학생 53명에게는 幞頭 106매와 쌀 265석을 주었던 것이다.294)≪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이와 함께 이듬해에는 고향으로 돌아 간 학생들을 가르칠 스승이 없다 하여 經學博士·醫學博士 각 1인을 12목에 파견하여 이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열심히 經書를 공부하고 孝悌로 소문이 있거나 의술이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지방의 관원들로 하여금 중앙에 천거케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자 성종 8년(989)에는 문신들과 지방의 경학박사들에게 교육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하고 이를 인사행정에 반영할 것을 밝히고 있다. 太學助敎 宋承演과 羅州牧의 경학박사 全輔仁을 교육에 힘쓴 공로로 표창하는 한편, 제자 10명 이하를 가진 문신은 전근할 때에 그 교육상황에 따라 인사행정에 반영할 것이고 12목의 경학박사로서 과거에 응시할 만한 제자가 없는 경우에는 만기가 되어도 다시 유임시킬 것을 교서로써 반포하였던 것이다. 또 같은 해에 12목과 모든 州·府의 경학박사·의학박사들을 장려하고 술과 음식을 하사하기도 하였다.295)≪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학교의 건립으로도 나타났다. 성종 11년에 교서를 내려 “경치 좋은 곳을 택하여 학교를 크게 세우고 적당한 토지를 주어서 학교의 식량을 해결하며 國子監을 창설하라”296)≪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 11년 12월.고 하였다. 그런데 이 기록에 의거하여 처음 국자감이 창건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국자감은 이전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고, 이 기록은 종래의 국학이 국자감으로 개편 정비되었거나 단순한 국자감 건물의 창건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297)閔丙河,<高麗時代 成均館의 成立과 發展>(≪大東文化硏究≫6, 1969), 5∼6쪽.
朴性鳳,<國子監과 私學>(≪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75), 175∼179쪽.
申千湜,<高麗前期 學制 成立과 敎育理念>(≪高麗敎育制度史硏究≫, 螢雪出版社, 1983), 27∼30쪽.

이렇듯 성종이 교육에 대해 신경을 쓴 것은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유교를 숭상하여 周孔(周公과 孔子)의 風敎를 일으키며 唐虞(堯임금과 舜임금)의 정치를 본받고자”298)≪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성종 5년 7월. 하였던 것이다. 특히 지방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려고 했던 것은 이들을 관료화시킴으로써 향리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 강화를 꾀하려는 중앙집권책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성종은 그 집권 초기에는 전통적인 西京 우대책을 취하지 않았다. 성종 9년(990)까지 서경에 대한 아무런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반면 東京(慶州)에 대한 우대 조치를 취한 것 같다. 동경에 대한 유수관의 설치가 서경보다 8년이나 빠른 성종 6년에 이루어지고 있다.299)≪高麗史≫권 57, 志 11, 地理 2, 慶尙道 東京留守官 慶州.
≪高麗史節要≫권 2, 성종 6년 11월.
이와 같은 서경의 경시와 동경의 우대는 경종의 정책을 이어 받은 탓도 있겠지만 최승로를 비롯한 경주 출신 유신들의 건의와 동향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최승로의 時務 28條를 보면 定宗이 지나치게 서경천도 계획에 치중한 것을 가장 큰 실책으로 비판하고 있다.300)≪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그러다가 서경에 대한 관심은 성종 9년에 와서야 표명되고 있다. 그 해 9월 기묘일에 선왕들의 제도를 이어 받아 서경에 행차하겠다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곧 이어 10월 서경에 가서 다시 교서를 반포하였던 것이다. 그 내용은 舜임금이 泰山을 순행하고 당 황제가 洛陽에 갔던 예를 본받아 서경에 행차해보니 농사는 풍년이요 백성들은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는 죄수들을 사면하고 이웃 주현의 백성들과 노인들에게 포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해는 최승로가 죽은 지 1년 되는 해였다. 성종의 서경 행차는 다음해인 성종 10년에도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성종의 서경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은 최승로의 죽음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즉 경주 세력의 부상과 함께 동경이 중시되다가 최승로의 죽음과 더불어 서경 세력이 등장하면서 이와 같은 성종의 정책이 취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301)河炫綱,<高麗 西京考>(≪歷史學報≫35·36, 1967;≪韓國中世史硏究≫, 一潮閣, 1988), 333쪽.

성종대는 대외적인 문제도 복잡한 시기였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중국과 친선관계를 가져 온 반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서는 적대관계를 취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고려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이럴 즈음 성종 4년 宋에서 韓國華를 보내 이전에 잃었던 燕雲 16州를 되찾는데 고려가 도와 줄 것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성종은 시일을 끌면서 출병하지 않다가 한국화의 위협과 회유에 따라 마지 못해 출병을 약속하였다. 이러한 한국화의 요구는 고려와 거란이 결탁하여 여진인들을 납치해 갔다는 女眞의 誣告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과 거란의 전쟁에서 송이 패하자 거란(요)은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송을 도와준 고려도 위협을 당하게 되었고 성종 12년 결국에는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성종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따라 북방의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성종 14년에 군현제를 군사적인 편제로 개편하였다. 이러한 북방 민족의 위협이 한편으로는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었다고 하겠다.

요컨대 성종은 국가체제를 유교사상에 입각한 중앙집권 체제로 구축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상당한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면서 유교적인 제도와 문물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五廟制나 籍田禮의 정립, 五服制度와 그에 따른 휴가제의 제정, 그리고 효자와 절부 표창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제를 정비하고 향호 세력의 통제에도 힘을 기울였다. 내사문하성이나 상서 6부의 성립, 문·무산계의 정비, 그리고 지방향리직의 개편과 지방관의 파견 등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과거제도나 교육제도의 강화를 통한 인재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동경이나 서경의 경영을 통하여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 하였으며 북방 민족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도 하였다. 성종은 이러한 정책을 통하여 지방의 향호 세력을 억제하고 어느 정도의 중앙집권 체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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