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3. 고려 귀족사회의 성립
  • 2)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이념과 최승로의 시무책

2)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이념과 최승로의 시무책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은 지배체제의 정비는 성종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지만 최승로나 李陽·金審言과 같은 儒臣들의 건의와 보좌에 힘입은 바도 컸다. 따라서 여기서는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중심으로 하고 이양이나 김심언의 封事, 그리고 성종의 교서를 통하여 당시의 정치 이념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성종은 즉위한 다음 해인 원년(982) 6월에 5품 이상의 중앙관리로 하여금 봉사를 올려 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최승로가 글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高麗史≫崔承老傳과≪高麗史節要≫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가 올린 봉사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그가 봉사를 올리게 된 배경과 의미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가 봉사를 올리게 된 것은 당의 史臣 吳兢이≪貞觀政要≫를 편찬하여 玄宗에게 올린 것처럼 훌륭한 정치를 본받아 국가를 발전시키겠다는 일편단심에서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둘째 부분은 太祖로부터 景宗에 이르는 다섯 왕의 치적에 대한 평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은 대개「五朝政績評」이라 부르고 있다. 그는 태조에 대해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후한 덕과 넓은 도량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즉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귀순해 왔을 때 그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두 번 세 번 사양한 끝에 할 수 없이 수용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덕에 감복하여 溟州로부터 興禮府에 이르는 110여 성이 귀부하였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견훤이 자식들의 반역으로 고려에 도망하여 오자 이를 받아들이고 후한 예로 대접한 것도 도덕과 의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통교하지 않고 고려를 괴롭히던 여진도 庾黔弼과 같은 훌륭한 장수를 보내 싸우지 않고도 귀순시켰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발해의 세자인 大光顯과 그 무리들이 귀순해 오자 그들을 편안히 살게 해 준 것도 불쌍한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그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있다. 후백제 신검과의 마지막 전투도 이를 피하고자 하였으나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최승로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을 무력에서 찾지 않고 유교적인 德治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태조는 禮로써 큰 나라를 섬겼으며 도의로써 인접 국가와 사귀고 아랫 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하게 대하였다.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궁궐이나 의복이 도를 넘지 않았고 상벌을 공평하게 하였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그가 생각하고 있는 君主像은 위엄 있고 권위적이 아니라 검소하고 신하들에게 공손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건국 초기인 만큼 종묘와 사직이 아직도 빛나지 못하고 예악과 문물이 결핍된 것이 많았으며 백관의 품계와 격식, 그리고 대외적인 규정과 의식이 미처 제정되지 못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태조의 단점이라기보다 창업한 초기라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하였다.

惠宗은 태자 시절에는 스승을 존경하고 賓客과 관리들을 잘 대우하였다. 왕위에 오른 처음에는 정종 형제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참소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를 묻지 않고 더욱 은총과 대우를 두텁게 할 만큼 큰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의심이 많아져 좌우에 항상 호위병을 데리고 다녔으며 장졸들에게 상벌을 균등히 하지 못하여 조정에 원망이 생겼고 인심이 떠나가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定宗은 王規 등이 왕위를 엿보고 있을 때 서경의 王式廉과 결탁하여 이를 방지하였으니, 왕실을 보존하게 된 것은 바로 정종의 공이었다. 다만 도참설 을 혹신하여 서울을 서경으로 옮기려 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부역에 동원되어 민심이 떠나게 된 점은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서경천도 계획은 정종의 굽힐 줄 모르는 고집 때문이었다고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군왕은 자신의 독자적인 고집보다도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光宗은 즉위 후 8년 동안에는 아랫 사람을 예로써 대접하고 항상 豪富者와 억센 자들을 억제하였으며 백성들에게도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자 못 볼 만한 정치를 이룩하였다. 雙冀를 등용한 후로부터 재주없는 자들이 부당하게 등용되어 갑자기 재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의탁해 온 남북의 용렬한 자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주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교화는 존중했으나 중화의 좋은 법은 섭취하지 못하였으며 중국의 선비들은 대우하였어도 중국의 현명한 인재는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또 불교를 혹신하여 국고를 낭비하였으며 말년에는 많은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외아들까지도 의심을 품어 잘못하면 경종도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광종의 가장 큰 실책은 중국계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중용하여 전제정치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景宗은 즉위 초에 참소와 중상의 문서를 불태우고 옥에 갇혔던 죄없는 사람들을 석방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찬양하고 경축하였다. 다만 정치의 원칙을 알지 못하여 몇몇 권신에게 정사를 맡기니 그 폐해가 종친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 때부터 간사함과 정직함이 구별되지 못하였고 상벌이 고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 자신도 음악과 여색에 빠짐으로써 군자의 말은 듣지 못하고 소인의 말만 듣게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최승로는 이렇듯 5왕의 행적을 평가하면서 성종으로 하여금 이를 취사선택하라고 말하고 있다. 즉 태조의 유풍을 깊이 따르고 혜종이 형제의 우의를 잘 지킨 것과 정종이 왕실의 계통을 보전한 일, 광종이 즉위 후 8년 간에 한 모범적인 정치, 경종이 죄수를 석방하고 참소의 문서를 불태운 일은 잘한 일들로 본받아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시작할 때의 착한 마음으로 끝까지 할 것이며 교만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어 백성들을 구제한다면 복이 스스로 올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최승로가 5조정적평에서 말하고 있는 요체는 군주가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신하를 대하며 넓은 도량으로 만백성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군주는 仁과 禮를 갖추고 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의 내용이 시무 28조이다. 현재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22조뿐이고 나머지 6조는 유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 22조의 내용을 간략하게 표로 만들어 보면<표 1>(159쪽)과 같다.

조항 내 용
1조 서북 변경의 수비 강조
2조 불교의 功德齋 등 폐단에 대한 시정을 건의
3조 侍衛軍의 감소를 건의
4조 사소한 布施 행위의 금지와 공평한 상벌과 권선징악을 통한 정치를 강조
5조 중국에 대한 사신의 감축을 주장
6조 佛寶의 錢穀에 대한 엄중한 관리를 주장
7조 주요 지역에 대한 외관 파견을 주장
8조 堀山의 승려 如鐵에 대한 지나친 환대를 비판
9조 의복제도의 정비를 통한 사회 신분질서의 확립을 강조
10조 승려들의 客館·驛舍에의 유숙 금지 건의
11조 고려 고유의 土風을 준수하자고 건의
12조 섬 주민들에 대한 貢役의 균등화를 주장
13조 연등회·팔관회와 偶人의 조성에 따른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 주자고 건의
14조 군주는 신하를 예우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
15조 궁중의 노비와 廐馬의 수를 감소하자고 건의
16조 佛宇의 濫設을 비판
17조 家舍제도의 확립을 통한 신분질서의 수립을 강조
18조 금·은·동·철을 사용한 불상 제작과 寫經의 금지를 건의
19조 三韓功臣과 世家의 자손들에 대한 관직 제수를 건의
20조 불교에 대한 酷信을 버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유교사상에 입각할 것을 건의
21조 번잡한 제사를 감하고 공손하고 자기를 반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군왕의 유교적 몸가짐을 강조
22조 良賤之法의 확립을 통한 엄격한 사회신분제도의 유지를 주장

<표 1>최승로의 時務 28條 중 22조의 내용

<표 1>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최승로는 각 방면에 걸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위의 22개 조항을 내용 별로 묶어 보면 몇 개의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우선 유교적 정치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2·4·6·8·10·16·18·20조). 그는 2조에서 功德齋를 위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일이 광종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를 폐지하기를 건의하고 있다. 특히 이 때에는 왕이 친히 茶를 갈고 보리를 친히 찧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복을 바라는 것은 모순된 일이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왕이 거리에서 간장과 된장을 나누어주는 행위도 그만 둘 것을 4조에서 건의하고 있다. 佛寶의 錢穀도 승려들이 백성들에게 이식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폐단을 낳고 있다(6조). 그러므로 승려에 대한 지나친 환대도 다 소용없는 일이다. 즉 광종이 善會란 승려를 환대하였으나 결국은 거리에서 죽는 화를 당하였으니 이런 자가 어찌 남에게 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8조). 당시 승려들이 객관과 역사에서 자면서 대접이 시원찮다 하여 관원과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태까지 있으며(10조), 佛宇의 남설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이 큼을 지적하기도 하였다(16조). 또 불경을 필사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것은 다만 오래도록 전하게 하면 그만이지 반드시 금·은과 같은 진귀한 것을 쓸 필요는 없다고 강조하였다. 신라도 말년에 금·은으로 불상을 조성하여 사치가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불상을 훔치려는 도적이 성행하고 결국은 멸망의 길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18조). 또 백성들이 공덕을 닦는 것이야 자신의 재물과 힘을 쓰는 것이지만 군왕의 공덕재에 드는 비용은 다 백성들의 재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금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20조).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점은 최승로가 비판한 것은 불교의 폐단에 대한 것이지 불교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상을 조성하고 寫經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치스런 물건을 쓰고 있는 것을 비판하였다(18조). 불교를 신앙하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국고의 재물을 지나치게 낭비함으로써 백성들의 생활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20조). 그는 “불교를 믿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근본(修身之本)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理國之源)”이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불교보다도 유교사상에 입각해야 하지만 몸과 마음을 닦는 데는 불교가 필요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불교, 도교, 그리고 토속적인 행사도 지양하고 굳이 시행한다면 유교 에 따를 것을 건의하고 있다. 13조에 보면 연등회·팔관회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으니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그리고 각종 偶人을 만드는데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들며 한 번 쓴 다음에는 바로 파괴해 버리니 이를 금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나라에서 종묘와 사직에 대한 제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山川과 星宿에 대한 제사는 매우 번잡스럽게 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21조). 여기서 산천에 대한 제사는 전통적인 토속신앙이요 성수에 대한 제사는 도교의 醮祭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을 번잡스럽다고 하는 것은 그 제사의 비용이 모두 백성들의 고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꼭 필요한 제사는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月令에 따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즉 겨울·여름의 講會와 先王·先后의 忌日에 재를 올리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라 폐지할 수 없는 것이지만 기타 그만 둘 수 있는 것은 줄이기를 바라며 만약 줄일 수 없으면 월령에 따라야 할 것임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불필요한 불교·도교 및 토속적인 행사는 반대하면서도 유교에 따른 행사인 종묘·사직에 대한 제사와 월령에 따른 시행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그는 정치형태면에서 지방 분권주의보다도 중앙집권적인 정치형태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7조와 17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7조에서 최승로는 각 지방에 수령을 파견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이미 태조대에 외관을 두려 하였으나 미처 겨를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향호들이 공무라 칭하고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으니 비록 모든 곳에 일시에 파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10여 주·현을 합하여 한 명의 외관을 파견하라고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라 하였다. 즉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는 법은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각 지방에 수령을 파견하여 백성들의 이해를 살피게 하는 것”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17조에서는 주·군·현과 停·驛·津의 토호들이 함부로 큰 주택을 짓고 있으니 제도에 초과되는 집들은 철거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지방 호족세력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왕이 모든 권력을 갖고 전제정치를 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3조에 보면 왕실 시위군의 수를 감소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태조시대에는 다만 궁성을 숙위하는 일 뿐이어서 시위군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광종대에 와서 그 수가 급격히 증가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경종대에 이르러 시위군의 수가 약간 감소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많다고 하면서 이의 감축을 건의하였다. 또 15조에서는 궁중에 복무하는 內屬奴婢와 內廐馬의 수를 줄일 것도 건의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궁중의 비용 절감과 군량의 확보를 들고 있으나 그 내면에는 국왕 권력의 지나친 비대화를 우려한 측면도 있었지 않았나 한다.

한편으로 최승로는 국왕이 중앙관료들을 예우해 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의 14조는 이같은 사상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周易≫에 이르기를 ‘성인은 인심을 감동시키므로 천하가 평화롭게 된다’라고 하였으며≪論語≫에 이르기를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듯이 보이면서도 나라를 잘 다스린 자는 舜이다. 그는 대체 어찌 한 것인가. 자기 몸을 공손히 하여 왕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聖人이 하늘과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그가 純一한 덕이 있고 사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신하를 禮로써 대우한다면 누가 자기의 성심과 정력을 다 바치어 조정에 나아가서는 좋은 계책을 진언하고 집에 가서는 국정을 보좌할 것을 생각치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임금은 예로써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매일을 하루같이 근신하시며 스스로 교만하지 마시고 아랫 사람을 대할 때에는 공손함을 생각하고 혹시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그 경중을 모두 법에 의하여 논죄케 하소서. 이렇게 하시면 태평한 위업을 가히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군주는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신하를 예로 써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조에서는 삼한공신과 世家의 자손들에게 관직을 줄 것을 청하고 있다. 삼한공신의 자손들이 賤隷들 속에 섞여 있어 불만이 팽배하고 있으며 광종 때에 죽임을 당했거나 쫓겨난 세가들의 자손을 다시 우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앙귀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를 운영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가 생각하고 있던 이상적인 국가형태는 유교정치 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302)李基白,<新羅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儒敎的 政治理念>(≪大東文化硏究≫6·7, 1970;≪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240∼241쪽.

그런가 하면 그는 사회적으로 엄격한 신분 질서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9조·17조·22조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신라 때에는 公卿·百官·庶人들의 의복과 신발·버선 등이 각각 品色이 있어 존비와 귀천을 구별하였는데 태조 이래로 이러한 제도가 무너지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벼슬이 높아도 집이 가난하면 公襴을 입지 못하고 관직이 없어도 집이 부유하면 綾羅錦繡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하여 백관들에게 공란을 입게 하고 평민들은 무늬있는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9조). 17조에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가옥제도를 정하여 이를 준수케 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22조이다. 그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태조가 창업한 초기에 여러 신하들 중 본래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자를 제외하고는 본래 없는 자들이 혹은 종군하다가 포로를 잡아 노비로 삼기도 하였고 혹은 재물로써 노비를 사기도 하였습니다. 태조는 일찍이 포로를 석방하여 양민으로 만들려고 하였는데 공신들은 뜻이 동요될까 우려하여 편의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60년 후에 이르기까지 공소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노비를 심사하여 그 시비를 분간케 하였습니다. 이에 공신들은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으면서도 간하는 자도 없었고 大穆王后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천한 노예들이 뜻을 얻어 존귀한 사람을 능욕하고 다투어 허위 사실을 날조하여 본 주인을 모함한 자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광종은 스스로 화근을 만들어 놓고 그 폐해를 근절하지도 못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 심히 많은 사람들을 부당하게 죽이어 덕을 잃은 바가 컸습니다. 옛날에 侯景이 梁나라의 臺城을 포위하니 近臣이었던 朱异의 종이 성을 넘어 후경에게 투항하였습니다. 후경은 그 종에게 儀同의 지위를 주었더니 그 종이 말을 타고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성 아래에 가서 소리치기를 ‘주이는 관직생활 50년 만에 겨우 中領軍 벼슬을 얻었는데 나는 처음 侯王을 섬기어 벌써 의동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성안의 僮奴들이 다투어 후경에게 투항하여 드디어 대성이 함락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옛일을 생각하시고 미천한 자가 윗사람을 능욕하지 못하도록 하시고 노비와 상전과의 관계에서 중도를 잡아 처리하십시오(≪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승로는 광종대의 奴婢按檢法을 비판하면서 엄격한 신분 질서의 유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신분 질서가 혼란해지면 국가체제도 무너질 것이라는 점을 후경의 故事를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최승로는 고려왕조의 건국으로 새로이 형성된 지배계층의 권익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구분을 엄격히 하려 하였던 것이다.303)河炫綱, 앞의 책, 168쪽.

그는 또 제도나 풍습 등은 반드시 중국의 것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하고 있다. 禮樂·詩書의 교훈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중국을 본받아 고쳐야 할 것이나 기타 車馬·衣服 등의 제도는 본국의 풍속에 따르게 하여 사치와 검박을 적절히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11조). 그가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무조건 중국을 따르는 慕華主義者가 아니었으며 나름대로의 자주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최승로는 중국에 보내는 사신의 횟수와 인원수를 줄이자고 건의하였다. 태조 때에는 몇 해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어 예방할 뿐이었는데 지금은 공식사절 뿐 아니라 무역사절도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우리를 천하게 여기는 한 요인이 될 수도 있으며 왕래하다 죽는 자도 많으니 무역에 관한 사절은 줄일 것을 말하고 있다(5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중국을 무조건 사대하는 것이 아닌 우리 민족과 국가에 대한 自肯心이 들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최승로는 국방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지 47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편안하지 못한 것은 서북쪽에 있는 미개종족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馬歇灘이나 압록강 중 좋은 곳을 택하여 경계로 삼으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역의 토착인들 중에서 말 달리고 활 쏠 줄 아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경비케 하면 京軍의 고생을 덜 수 있고 군량미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1조). 이러한 그의 견해는 옳았던 것으로 이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하다가 성종 12년(993) 거란의 침입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최승로의 封事 내용의 핵심은 되풀이하는 이야기지만 유교정치 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를 이룩하자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불교의 폐단을 집중적으로 비판하였으며 유교적인 덕치와 엄격한 신분 질서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교를 인정하였으며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 사대가 아니고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으나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우선 그의 가문과 출생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에 대해서는≪三國遺事≫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304)≪三國遺事≫권 3, 塔像 三所觀音 衆生寺.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최승로의 아버지 는 崔殷諴이었다. 그는 늦도록 아들이 없다가 衆生寺에 가서 기도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최승로였다. 최승로가 태어난 지 석달이 채 못되어 견훤이 경주를 습격하니 성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그러자 최은함은 아들을 안고 중생사의 觀音像 獅子座 밑에 감추어 두고 왔다. 반 달이 지나 적병이 물러가서 근심스럽게 돌아 와 보니 살결이 고와지고 젖냄새가 입에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이에 최승로를 안고 돌아 와 기르니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다가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자 그를 따라 와서 고려의 大姓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그 이름도≪高麗史≫와는 한자표기가 약간 다르다.≪高麗史≫의 崔殷含이 여기서는 崔殷諴으로, 崔承老는 崔丞魯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佛力의 힘에 의하여 태어났고 견훤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부처님의 보호에 의해 살았다는 것은 그와 불교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는 불교신앙을 지닌 가문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불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유학을 공부하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불교 자체를 배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고려에 오게 된 최승로는 나이 12세에 태조와 대면하게 되었 다. 태조가 그를 불러≪論語≫를 읽게 하고는 가상히 여겨 그를 元鳳省 학생에 예속시키고 鞍馬와 例食 20石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최승로에게 文柄을 맡겼다고 기록되어 있다.305)≪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그러나 그가 12세 때부터 문장에 관한 일을 도맡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 원봉성 학생으로서의 수련을 마친 후 문장을 맡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는 태조 때부터 궁중생활을 하였고 광종대에도 소극적이나마 개혁정치에 참여했던 것 같다.306)李基白,<高麗 貴族社會의 形成>(≪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81), 157쪽. 그 러나 최승로는 광종의 개혁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後生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견해도 있다(金哲埈,<崔承老의 時務二十八條에 대하여>(≪越明基華甲紀念 佛敎史學論叢≫, 1965;≪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384쪽). 그것은 왕의 총애를 받고 聖恩에 감사하는 마음을 읊은 시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307)崔滋,<上謝宣獎入唐文字 兼頒內庫酒果詩>(≪補閑集≫). 그러나 최승로가 광종대의 정치를 극심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을 들어 이 시가 성종대에 쓰여진 것은 아닐까 하는 설도 제시되어 있다(河炫綱, 앞의 책, 147쪽). 앞서 본 바와 같이 그가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五朝의 政績評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그의 관력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국에 유학하여 공부하지 않고 국내에서만 공부한 순수 국내파였다. 그래서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 온 지식인들과는 입장이 달랐다고 여겨진다. 그가 쌍기를 비롯한 중국계 귀화인들을 극심하게 비판하고 있다든지 우리 고유의 의복과 제도를 존중하고 있는 것도 그의 이러한 입장 때문이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308)河炫綱, 위의 책, 143∼145쪽.

또한 그는 6두품 출신이었다. 그는 慶州 崔氏로 李·鄭·孫·裵·薛氏 등과 더불어 6두품 가문의 성씨였던 것이다 신라의 6두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眞骨과는 차별 대우를 받는 계층이었다. 그들은 위계 면에서 제6관등인 阿飡까지, 그리고 관직 면에서는 각 관부의 차관급까지만 오를 수 있었으므로309)李基白,<新羅六頭品硏究>(≪省谷論叢≫2, 1971;≪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37∼38쪽. 많은 불만을 가진 계층이었다. 그 때문에 최은함·최승로 부자가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와서 왕건을 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6두품은 귀족 계열에 드는 지배계층이었다. 일반 농민이나 천민들과는 이해를 같이 할 수 없었다. 최승로가 엄격한 신분 질서의 확립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시무 28조 중 지금은 전하지 않는 나머지 6조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도 궁금하다. 이에 대해서는 (1)고려가 북진정책을 추진했던 만큼 對北方·對宋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2)중앙관제와 관련된 내용이 있었을 것이며 (3)교육문제에도 언급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4)유교적인 昭穆제도와 (5)고려 초기에 파란의 원인이 되었던 외척세력 관계나 妃嬪문제, 그리고 (6)常平倉이나 토지제도·조세제도 등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310)金哲埈, 앞의 글, 381∼382쪽.

이러한 유교적 정치이념은 최승로 뿐 아니라 이양이나 김심언의 봉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이양은 성종 7년(988) 봉사를 올려 세 가지 일을 건의하고 있다. 첫째는 月令에 따라 입춘 전에 土牛를 내어 농사철의 늦고 이름을 알리자는 것이요, 둘째는 周禮에 의거하여 왕후가 왕에게 곡식 종자를 바치는 의식(獻種儀)을 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월령에 의하여 정월 중순 이후에는 제사에 쓰기 위하여 암컷을 잡지 말며 벌목을 금지하고 새끼 짐승과 알 가진 새를 잡지 말고 많은 사람을 동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311)≪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7년 2월.

이와 같은 유교행사와 월령에 따른 禁令은 당시 유교사상이나 음양오행설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한편 특징적인 것은 유교적인 군왕은 전제권력을 행사하거나 사치·방종해서는 안되고 신하들을 잘 대우해 주고 백성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최승로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봉사의 내용 중에도 “현명한 군왕은 하늘의 도를 받들어 백성들에게 농사 짓는 때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거나 “성인은 아래로 지리를 살피고 위로는 천문을 보아 때의 변화에 통달하고 군왕은 어진 정치를 행하고 은혜를 펴서 만물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군왕은 하늘과 만물의 이치에 따라야 하는 자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 이치를 알고 있는 유학적 지식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12)李基白, 앞의 글(1981), 208쪽.

김심언의 봉사는 성종 9년(990)에 행해졌다. 그 내용은 2조목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첫째는 6正 6邪와 刺史 6條에 따른 중앙 관리와 지방관의 복무태도를 확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서경에 司憲 1인을 두어 관리들의 비위를 감찰하자는 것이었다.313)≪高麗史≫권 93, 列傳 6, 金審言. 먼저 6정이란 聖臣·良臣·忠臣·智臣·貞臣·直臣 등의 올바른 일을 하는 신하를 말하고, 6사란 具臣·諛臣·姦臣·讒臣·賊臣·亡國之臣 등 그릇된 일을 하는 신하를 말하는 것이었다. 흥망의 기미를 명확히 알고 화란을 사전에 예방케 하는 자가 성신이요, 임금에게 예의로써 권장하고 훌륭한 계책으로 인도하여 악행을 시정시키는 자는 양신이고, 어진 자를 추천하고 옛날의 사적을 자주 칭찬하여 임금의 의지를 격려하는 자는 충신이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를 잘 살펴 미연에 방지하거나 구출하고 화를 복으로 전환케 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근심을 없게 해 주는 자는 지신이고, 국법을 준수하고 祿과 賞을 사양하며 먹고 마시기를 검약하는 자가 정신이다. 마지막으로 국정이 혼란할 때에 기탄없이 임금의 과실을 말하는 자가 곧 직신으로 이들이 곧 6정이었다.

그런가 하면 벼슬자리에 편안히 앉아 녹만 탐내고 공무에 힘쓰지 않는 자를 구신이라 하고, 임금이 하는 말은 모두 옳다 하면서 비위만 맞추는 자는 유신이며, 속마음과 행동이 달라 착한 사람을 질투하고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여 상벌이 부당하게 되고 명령이 실행되지 못하게 하는 자는 간신이다. 지혜나 언변은 있으나 골육의 친척을 이간시키고 밖으로는 조정에 혼란을 가져 오게 하는 자는 참신이며, 권력을 독차지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하며 임금의 명령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자는 적신이다. 임금에게 아첨과 간사로써 불의에 빠지게 함으로써 임금의 죄악이 국내에 유포되고 인접국에까지 전파되게 하는 자를 망국지신이라 하는데 이들을 6사라 하는 것이다.

≪漢書≫에 나오는 자사 6조는 (1)백성들의 질병·고통과 失職의 유무를 살필 것 (2)長吏 이상 수령의 정사를 살필 것 (3)도적과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 및 크게 奸猾한 자를 살필 것 (4)토지에 대한 범죄나 네 계절의 금령을 어기는 자를 살필 것 (5)백성들 중에 효행·공경·청렴·결백으로 행동이 모범이 되고 재주가 뛰어난 자가 있는가를 살필 것 (6)향리들이 錢穀의 출납을 장부에 기록하지 않거나 고의로 흐트러뜨린 것이 없는지를 살필 것 등이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김심언은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들이 복무해야 할 자세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는 개경과 서경은 물론이고 6관(이·호·예·병·형·공)과 12道 주·현의 관청 벽에 그 내용을 써 붙일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군왕의 통치 자세보다 신하들의 복무 태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정치가 신하들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일면 최승로의 생각과 상통하는 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의 상황이 어느 정도 왕권이 안정되어 있었던 데에 기인하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서경에 사헌 1명을 두어 分司의 관리들을 감찰하자는 두 번째 조항도 관리들의 복무 자세를 올바로 하자는 데 그 목표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성종은 이렇게 제시된 정치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시행하였다. 앞장에서 보았듯이 중앙관제의 정비나 12목의 설치, 유교적 의례의 제정 등이 바로 이들의 건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성종 자신도 때때로 교서를 반포하여 자신의 뜻과 의지를 표명하였다. 성종 2년 12목을 설치할 때에 그는 舜임금이 실시했던 제도를 본받아 이를 시행하게 되었다는 취지의 교서를 반포하였다.

나의 몸은 깊은 궁중에 있으나 나의 마음은 널리 백성들에게 가 있다. 내가 침식을 제 때에 하지 못하면서 정사에 힘을 기울이며 언제나 신하들의 좋은 의견을 듣고자 한다. 높아도 낮게 들으며 멀어도 가깝게 보아 착한 인재에 의거하려 한다. 이에 지방 수령들의 공로에 의거하여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맞도록 하려 한다(≪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2년 2월).

따라서 12목의 설치가 최승로라는 신하의 의견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양이나 김심언의 건의도 즉시 시행했음은 물론이다.

성종 5년에는 “지방관들은 재판 사무를 지체하지 말고 창고에는 곡식이 충만하게 하며 곤궁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며 부역과 조세는 가볍게 하고 처사는 공평히 하라”고 하고 있다.314)≪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5년 9월. 특히 그는 많은 인재의 양성과 선발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성종 6년 8월에 鄭又玄에게 급제를 주고 내린 교서에는 “경박한 풍속을 개변시켜 사람마다 예의를 알게 하고 학교에는 학생들의 수가 늘어나고 농민들 속에서도 글 읽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다.315)≪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6년 8월. 또 성종 11년(992)에도 “임금이 천하를 교화하는 데는 학교가 제일 급선무다. 堯舜의 유풍을 계승하고 周公과 孔子의 도를 닦으며 국가의 헌장·제도를 설정하고 군신 상하의 의례를 분간하여야 하는 바 현명한 선비가 아니면 어찌 이러한 규범들을 창안할 수 있겠는가”316)≪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1년 12월.라는 교서를 내렸다. 이처럼 성종도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을 위해 지방관들을 파견하고 많은 인재를 양성·선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성종이 즉위하면서 유교적 정치이념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것은우선 최승로의 봉사에서 알 수 있다. 그는 5조정적평을 통하여 군주는 넓은 포용력을 가지고 신하들을 잘 예우해야 한다는 군주상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시무 28조에서는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정치이념으로써는 유교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와 함께 지방관을 파견하여 호족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중앙집권책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전제권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하들의 보좌와 역할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그의 주장은 중앙집권적 귀족 정치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는데 신라의 6두품 출신으로서는 당연한 주장이었다. 불교 자체는 인정하였다든가 엄격한 신분 질서의 확립을 주장한 점, 그리고 고려의 독자성을 강조한 점도 그의 출신이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양이나 김심언의 봉사도 최승로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였다. 이양은 유교적 의례나 월령에 따른 금령을 잘 지키자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군왕의 자세였으며 유교적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것이었다. 김심언의 6정 6사와 자사 6조, 그리고 서경사헌의 설치 주장도 정치가 군왕 개인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관리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라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성종도 이러한 신하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좋은 인재를 양성하고 선발하기 위하여 여러 번의 교서를 반포하기도 했다. 결국 성종대에는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이라는 유교정치 이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시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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