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3. 고려 귀족사회의 성립
  • 3) 정치적 지배세력의 상황과 성격

3) 정치적 지배세력의 상황과 성격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성종대에는 유교정치 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 정책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관료들도 대체로 신라 출신의 儒臣들이나 과거 급제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것은 이 시기의 관료들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다. 분석의 대상은 성종의 배향공신·지공거·내사문하성과 어사도성·중추원의 고관들, 그리고 대간직에 있었던 자들로 한정시키고자 한다. 우선 배향공신에 봉해졌던 인물로는 崔承老·崔亮·李知白·徐熙·李夢游 등 5명이었다. 이 중 최승로·최량은 穆宗 1년(998)에 배향되었고 나머지 3명은 顯宗 18년(1027)에 추가로 배향된 인물들이었다.317)≪高麗史≫권 3, 世家 3, 목종 원년 4월 및 권 5, 世家 5, 현종 18년 4월. 지공거를 지낸 자들로는 王融·최승로·이몽유·劉彦儒·盧奕·白思柔·崔暹·柳邦憲 등이 있었다. 내사문하성에서 활동하던 인물로는 崔知夢·최승로·朴良柔·서희를 들 수 있고 어사도성(후의 상서성)의 관리들로는 최승로·최량·이지백·서희·유언유·鄭謙儒·박양유 그리고 薛神祐와 李謙宜 등이 있었다. 중추원의 관리로는 韓彦恭·趙之遴 등을 들 수 있다. 또 내사문하성의 省郎으로는 최량·이지백·이양·김심언 등이 있었고 어사대의 관리로는 鄭又玄과 李周憲을 들 수 있다. 이상 당시 핵심적인 지배세력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총 22명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중복되는 자는 제외하였다.

먼저 이들 중에는 경주 출신의 신라계 유신들이 있었다. 최승로는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온 이래로 줄곧 궁중에서 관직생활을 하였다. 성종 원년(982)에 行選官御事로서 유명한 시무 28조를 올렸으며 그 결과 성종 2년에는 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다. 그 후 성종 7년(988)에는 門下守侍中에 임명되었으며 淸河侯라는 작위와 함께 식읍 7백호에 봉해졌다.318)≪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및 권 3, 世家 3, 성종 7년. 이러한 그의 관력으로 미루어 볼 때 성종이 그를 얼마나 신임했는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의 내용이 성종의 개혁정치에 거의 반영되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성종 8년 최승로가 죽자 성종은 교서를 내려 그 의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太師직을 추증하였으며 賻儀로 布 1천 필, 밀가 루 3백 석, 쌀 5백 석, 乳香 1백 냥 등을 주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가 신라의 6두품 출신으로써 고려 조정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일단의 사회발전이며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최량도 경주인이었으니 최승로와 같이 6두품 출신이 아니었나 한다. 최승로와 일족으로도 생각되며 그의 정치적 성향 또한 최승로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미 광종대에 과거에 급제한 후 攻文博士를 지내기 도 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의 스승이 된 인연으로 성종 즉위 직후부터 관직에 등용되기 시작하여 左散騎常侍·參知政事·兼司衛卿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질병으로 해임되자 성종은 “최량은 내가 潛邸에 있을 때부터 충성을 남김없이 바치어 나의 우매한 것을 열어 주었으니 그 공로를 생각하면 잊지 못하겠다”하고는 다시 그를 복직시켰다.319)≪高麗史≫권 93, 列傳 6, 崔亮. 이것으로 보아도 성종의 최량에 대한 배려가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문하시랑에 임명되었다. 성종 12년 거란이 침입하자 서희·박양유 등과 같이 北界에 주둔하면서 적을 방어하기도 하였다.320)≪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 그 후 곧 바로 內史侍郎·兼民官御事·同門下平章事·監修國史로 승진되었다. 성종 14년에 그가 죽자 성종은 太子太師를 추증하고 쌀 3백 석, 보리 2백 석, 腦原茶 1천 角을 주었다. 이와 같은 성종의 후의는 최승로에 버금가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량과 최승로는 나란히 목종 원년에 성종의 廟廷에 배향되었다.

성종 12년과 15년에 지공거를 지낸 바 있는321)≪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選場. 崔暹도 경주 출신의 6두품 계열로 추측된다. 그는 일찍이 광종 9년의 첫 과거 시험에 급제한 인물이었다.322)≪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9년 5월 및 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選場. 그는 常侍로서 김심언을 가르쳤으며 김심언을 자신의 사위로 삼기도 하였다.323)≪高麗史≫권 93, 列傳 6, 金審言. 상시는 내사문하성의 좌·우산기상시(정3품)를 말하는 것으로 그가 간관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과거를 관장할 때의 관직은 詞命을 制撰하는 임무를 맡은 翰林學士였으니324)≪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藝文館. 그의 학문적 위치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刑官御事를 지낸 설신우도 신라의 6두품 출신이 아닌가 한다. 그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지만 당시의 薛氏는 신라 6두품 계열의 설씨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신라시대 활약한 바 있는 薛聰의 후예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렇듯 성종대에는 배향공신이었던 최승로와 최량을 비롯하여 최섬·설신우 등 신라 출신의 유신들이 성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 합격한 유학자들도 정계에 많이 등용되어 있었다. 우선 성종의 배향공신 중 하나였던 서희를 들 수 있다. 그는 광종 11년 쌍기의 주관 하에 시행된 과거에 합격한 자로325)≪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選場. 광종대에 활약한 바 있는 徐弼의 아들이었다. 그는 다 아는 바와 같이 호족들과 공신세력을 억압하고 숙청했던 광종의 개혁정치에 비판적이었던 인물이다. 아마도 그의 그러한 행동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徐穆의326)≪新增東國輿地勝覽≫권 8, 利川都護府. 후예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서희는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한 후 廣評員外郎을 거쳐 內議侍郎으로서 광종 23년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다. 이때는 10여 년간이나 사신 내왕이 없었으나 그의 예의 범절이 뛰어났으므로 송 태조가 檢校兵部尙書를 제수했다고 한다. 성종 2년에는 兵官御事가 되었는데 성종이 서경에 갔다가 永明寺에 놀러 가려는 것을 간하여 중지한 일도 있었다. 또 성종 12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서경 이북의 땅을 적에게 넘겨 주자는 의견이 있어 성종도 이 의견에 따르고자 하였으나 서희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서희는 “저들의 병력이 성대한 것만을 보고 갑자기 서경 이북을 떼어 준다면 그것은 올바른 계책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三角山 이북은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고 해서 다 주겠습니까. 하물며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하면서 반대했던 것이다. 대신 그 자신이 강화의 사절로 가서 蕭遜寧과 담판하여 江東 6주를 더 획득했음은 유명한 일이다. 그가 성종과 더불어 海州에 갔을 때는 성종이 서희의 幕으로 들어와 술을 가져 오라고 하자 이를 완곡히 거절한 일도 있었다.327)≪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서희는 최승로와는 달리 성종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 인물이었던 것 같다. 즉 신라 출신의 유학자들이 추진했던 유교 이념에 입각한 漢化 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최승로 계열과 약간의 대립이나 갈등이 있었다고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백사유를 들 수 있다. 그는 광종 24년에 시행된 과거에 합격한 인물이었다.328)≪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選場. 그 후 성종 10년(991)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大藏經과 御製를 준 데 대한 사례를 한 바 있다.329)≪高麗史≫권 3, 世家 3, 成宗 10년. 또한 성종 10년과 14년의 과거를 주관한 지공거로서 그의 관직은 한림학사였다. 이로 미루어 그는 전문적인 학자였으며 그러기에 현실 정치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禮部侍郎으로서 성종 16년의 과거를 관장했던 유방헌도 과거 급제자였다. 그는 광종 23년의 과거에서 鄕貢進士로 급제하였던 것이다.330)≪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選場. 그는 全州 承化 縣人으로 祖는 후백제의 우장군이었으나 父는 문장을 잘 써서 고려에서 檢務, 租藏을 거쳐 大監이라는 관직을 지낸 바 있었다.331)<柳邦憲墓誌>(≪朝鮮金石總覽≫, 朝鮮總督府, 1919). 그는 광종 때 공문박사가 되었으며 성종 때 예부시랑을 거쳐 목종대에는 한림학사·우간의대부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성격이 어질고 너그러워 아무리 급박한 때라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산업을 경영하지도 않았으며 간관으로 있을 때에도 남의 허물을 함부로 들추어 말하지 않았다 한다.332)≪高麗史≫권 93, 列傳 6, 柳邦憲. 그러나<柳邦憲墓誌>에는 목종이 사냥을 좋아 하자 이를 두 번이나 간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유방헌이 직책을 충실히 수행했음을 선전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墓誌는 보통 그 사람의 장점만을 기술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실제 그러했는지는 모르지만 대체로≪高麗史≫의 기록이 정확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성격으로 볼 때 그는 성종의 정치를 비판하는 쪽에 가담하지는 않은 것 같다.

右補闕·兼起居注를 지낸 바 있는 김심언도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한 자였다. 그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성종에게 6정 6사와≪漢書≫의 자사 6조 등 봉사 2조를 성종에게 올린 인물이다. 물론 성종은 이 건의를 흔쾌히 받아 들여 시행하였다.333)≪高麗史≫권 93, 列傳 6, 金審言. 이런 측면에서 보아 김심언은 유교정책을 시행하던 성종의 정치에 매우 협조적이었으며 이를 뒷받침해 준 인물이라 하겠다. 즉 최승로와 정치적 노선을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다.

監察御史였던 정우현도 성종 6년 3월에 시행된 과거에 합격한 인물이었다. 그는 供賓令으로서 성종에게 봉사를 올려 時政 7事를 논하였는데 그것이 성 종의 비위를 거슬렸다. 그러자 성종이 죄줄 것을 백관들에게 물었더니 다 옳 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희가 이를 반대하고 오히려 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그에 따라 정우현은 감찰어사에 등용되기도 한 적이 있었다.334)≪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가 성종의 비위를 건드린 것은 봉사의 내용이 최승로나 이양·김심언 등이 올린 봉사와는 상당히 달랐던 것 같다. 그것은 또 정치적인 입장에서도 최승로 계열과는 견해를 달리 했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된다.

그밖에도 과거출신자는 아니지만 유학자임이 분명한 자들도 여럿 있었다. 우선 지공거를 지낸 자들은 다 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王融이었다. 그는 광종 17년부터 과거를 관장하기 시작하여 성종 13년까지 11번이나 지공거를 역임한 인물이다.335)≪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選場. 그런데 그가 광종대의 혼란기와 경종대의 반동정치를 겪으면서도 희생되지 않고 살아 남은 것을 보면 그는 현실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유학자로서 학문에만 몰두한 인물이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성향도 중도에 가까웠다고 생각된다.

성종 2년·5년·6년의 세 차례에 걸쳐 지공거를 지냈고 후에 배향공신에 책봉된 이몽유도 유학자였다. 그것은 성종이 그로 하여금 중앙 및 지방 관청 에서 주달하는 글과 통첩, 공문의 양식을 정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336)≪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6년 8월. 이러한 업무는 학식이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병관어사로서 성종 2년의 과거를 관장하였던 劉彦儒는 그 출신이나 관력을 잘 알 수 없다.337)아마도 忠州 출신의 劉氏가 아닌가 한다. 정종이나 광종의 외가가 충주였으며 태조 때에 侍中을 지낸 劉權說, 광종의 배향공신이었던 劉新城, 광종 말년 內承旨로 관직을 시작한 劉瑨 등도 모두 충주 유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로나 이몽유와 같이 과거를 관장했다는 점이나 지공거의 성격상 유학자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또 같은 해에 지공거를 지낸 노혁도 유학자였을 것이다.

성종 즉위시 內史令이 되었던 최지몽이나 中樞院使를 지낸 한언공도 유학자들이었다. 최지몽은 전라도 靈岩출신으로 이미 태조 때부터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경전과 사서에 밝았을 뿐 아니라 天文·卜筮에도 능통하였다. 그리하여 태조의 꿈을 잘 해몽하여 知夢이란 이름을 하사받기도 했었다. 혜종대에는 왕규의 음모를 미리 알고 왕을 피신시키기도 하였으며 광종대에는 11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종 5년 소환되어 다시 관직생활을 하였다. 성종 원년에는 左執政·守內史令·上柱國이 되었고 弘文崇化致理功臣號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성종 6년 그가 병으로 눕자 성종 자신이 직접 가서 문병을 하였으며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말 두 필을 歸法寺·海安寺에 희사하고 승려 3천 명에게 음식을 주는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338)≪高麗史≫권 92, 列傳 5, 崔知夢. 이것으로 보아 성종의 신임이 대단하였으며 굳이 정치적인 성격을 살펴 본다면 최승로 계열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

한언공은 湍州(長湍)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광종 초 15세의 나이로 光文院의 書生이 되어 공부하였다. 그 후 진사 시험에 응시하여 떨어지기는 했으나 관직생활은 계속하여 內議承旨舍人이 되었다.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형부시랑·병부시랑에 보임되었다. 성종 9년(990)에는 송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듬해 2천 5백 권에 달하는 대장경을 가지고 돌아 오기도 했다. 귀국하자 성종은 그를 御史·禮官侍郎·判禮賓省事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그는 송나라의 추밀원을 본떠 중추원을 설립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중추원이 설치되고 그는 중추원 부사가 되었다가 곧이어 中樞院使·殿中監·知禮官事에 보임되었다. 그 후 참지정사(종2품)까지 승진한 그는 목종대에 많은 활약을 하여 목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던 인물이다.339)≪高麗史≫권 93, 列傳 6, 韓彦恭. 그가 비록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광문원의 학생으로 공부한 점에서나 禮官을 역임한 것은 그가 유교 경전에도 밝았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성향으로 볼 때 최승로 계열에 속하는 인물이 아닌가 한다.340)그가 과거에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문하시중까지 이른 것은 학자적 관료이기보다는 행정적인 능력을 발취하였기 때문이라 하여 그를 서희, 이지백과 같은 계열의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基白, 앞의 글, 1981, 166쪽). 그러나 과거에 떨어졌다 하여 유학적 소양이 부족한 인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가 서희 등과 의견을 같이 했다는 근거도 없다. 오히려 그가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유학적 소양을 가지고 최승로 등과 더불어 성종을 잘 보필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않나 한다. 그것은 그가 성종에 의해 중용된 것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左補闕·兼知起居注였던 이양도 유학자였다. 그는 성종 7년(988) 월령에 입각한 행사의 실시나 금령의 준수, 그리고 籍田禮·獻種禮의 실시 등을 건의한 인물로 유명하다.341)≪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7년 2월. 이와 같은 사항은 유학을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다룰 수 없는 문제다. 따라서 그가 과거에 합격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유학자임에 틀림없다. 또 그의 봉사 내용은 앞서 보았듯이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것이므로 최승로 계열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유학자였는지 여부를 잘 알 수 없는 인물들도 있다. 그러한 인물로 이지백을 들 수 있다. 그는 성종 2년 간의대부를 지낸 바 있으며342)≪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2년 9월. 성종 12년에 前民官御事로 나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민관어사를 지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거란이 침입하자 항복하거나 서경 이북을 떼어 주자는 의견에 반대한 서희의 편에 선 바 있다. 그는 경솔하게 국토를 떼어 주자는 의견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던 것이다.

금·은·보화를 蕭遜寧에게 주고 그의 속마음을 타진해 보십시오. 또한 국토를 경솔히 적국에 할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선대로부터 전해 오던 燃燈·八關·仙郎 등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타국의 색다른 풍습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

그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성종이 중국 풍습을 즐겨 모방하려 하여 백성들이 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최승로가 연등회·팔관회의 폐단을 지적하자 성종 6년(987)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를 폐지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성종을 위시하여 최승로 등의 유교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는 세력이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거두가 서희이고 이지백도 그의 동조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박양유를 들 수 있다. 그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출신이나 활동 상황을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성종 9년 왕의 조카인 誦을 開寧君으로 책봉할 때 知都省事로 나오고 있으며 성종 12년(993) 거란이 침입했을 때는 시중으로서 上軍使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343)≪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9년 12월·12년 10월. 이 때 서희는 中軍使, 최량이 下軍使였던 점으로 보아 이들보다도 상위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큰 활동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성종의 유교정책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대체로 서희 계열과 입장을 같이 한다고할 수 있다. 그는 경종의 배향공신이었으나344)≪高麗史≫권 60, 志 14, 禮 2, 吉禮 太廟 禘祫功臣配享於廷. 경종대의 업적이나 활동 상황도 잘 알 수가 없다. 혹 그는 평산 박씨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345)李樹健,<高麗前期 支配勢力과 土姓>(≪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159쪽. 만약 그렇다면 광종대에 호족세력을 숙청할 때 承位·承景·承禮 등 세 아들이 투옥되자 화병으로 죽은 삼한공신 朴守卿과는 달리 이 때에 살아 남았다가 경종대의 반동정책 속에서 큰 활약을 했던 인물이 아닌가 한다.

이겸의는 청주인으로 성종 3년에 主農卿이라는 관직에 있다가 형관어사로 승진한 인물이다. 그 해에 성종은 이겸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압 록강가에 성을 쌓도록 하였는데 여진의 침입으로 포로가 되었다.346)≪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3년. 그런데 다른 기록에 의하면 그는 태조를 도와 그의 아버지인 希能과 함께 삼한공신 이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347)≪高麗史≫권 99, 列傳 12, 李公升. 그러나 그의 생몰 연대를 볼 때 태조공신이 될 수는 없다. 아마도 이희능의 사적을 기술하면서 부자가 함께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348)李樹健, 앞의 책, 182쪽. 어쨌든 그가 삼한공신의 후예라는 점에서는 서희나 박양유와 계열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으나 속단할 수는 없다.

監察司憲이었던 이주헌과 左承宣 조지린은 각각 洞州(瑞興) 土山縣과 白州 (白川) 銀川縣 출신으로 모두 吏職으로 출세한 인물이었다.349)≪高麗史≫권 94, 列傳 7, 李周憲 및 趙之遴.
李基白, 앞의 글(1981), 163·166쪽.
조지린은 성종 14년 請婚 사절로서 거란에 가기도 하였다.350)≪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4년. 정겸유에 대해서는 성종 2년에 공관어사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351)≪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2년 5월. 따라서 이들이 어떠한 행동 을 보였으며 어떠한 정치적 성격을 보였는지 추단하기 어렵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성종의 배향공신을 비롯하여 내사문하성이나 어사도성, 중추원, 대간, 그리고 지공거를 지낸 인물 22명을 분석해 보면 신라의 6두품 계열이 4명, 과거 합격자가 5명, 그 밖의 유학자가 7명이었다. 이외에 삼한공신의 후예가 2명, 吏職으로 출세한 자가 2명, 그 출신을 알 수 없는 자가 2명이었다. 따라서 성종대의 지배세력은 신라의 6두품 계열과 유신 계열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체제정비를 꾀했던 성종의 의도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유학자라 하더라도 성종의 지나친 유교정책과 중화정책을 비판하는 세력도 있었으니 서희·이지백·정우현 등이 그들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정계는 성종의 유교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최승로·최량·최섬·이양·김심언 계열과 서희·정우현·이지백 계열이 약간의 대립과 갈등을 보이고 있었다고도 하겠다.352)李基白, 앞의 글(1981), 169∼170쪽.

그러면 당시 지배세력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고려 초에는 지방의 호족 출신이나 武功功臣들이 핵심적인 지배세력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려왕조가 계속적인 전쟁과 지방 호족들의 힘에 의하여 개창되고 후삼국 통일을 달성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정기에 접어든 고려는 중앙집권적 유교정치를 필요로 하였으므로 전문적인 유신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방에 별 지지 기반이 없는 유신들은 물론이고 호족 출신의 관료들도 중앙에 정착하면서 그들의 기반을 닦아 나아가게 되었다. 즉 지방과의 연고관계를 끊는다 하여도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해 나아갈 수 있는 세력과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중앙귀족적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353)물론 이들을 중앙귀족이라 하고 고려사회를 귀족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적당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용어는 당대의 용어를 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高麗史≫의 기록에는 貴族이란 용어가 많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에는 眞骨, 조선시대에는 兩班이란 용어가 당대에 실제 있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이들 지배세력을 貴族이라 한 예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필자로서는 이 용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잠정적으로라도 기존의 것을 그대로 따르고자 한다.

이들은 중앙에서 관직의 세습을 꾀하여 하나의 문벌 가문을 이룩하였다. 몇 예를 통하여 살펴 보자. 성종대 시무 28조를 올렸던 최승로 가문은 그 후에도 유명한 관리들을 배출하였다. 그의 아들은 崔肅인데 어느 관직까지 올랐는지 모르지만 최숙의 아들 崔齊顔은 현종·덕종·정종·문종 4대를 섬겨 관직이 문하시중(종1품)에까지 올랐다.354)≪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최량의 아들인 崔元信도 과거에 합격하여 호부시랑(정4품)을 역임하였다.355)≪高麗史≫권 93, 列傳 6, 崔亮.

長湍 韓氏인 한언공의 가문도 번성하였다. 성종 때 중추원사를 지낸 그는 목종대에 가서는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며 목종을 보필한 공로로 그의 관향인 장단현이 湍州로 승격되기도 하였다.356)≪高麗史≫권 93, 列傳 6, 韓彦恭 및 권 56, 志 1, 地理 1, 長湍縣. 그의 아들 韓祚는 두 딸을 정종에게 바쳐 왕실의 외척으로 세력을 떨치기도 하였다.357)≪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靖宗 容信王后 韓氏 및 容懿王后 韓氏. 한조의 관직은 贈門下侍中으로 나오고 있지만 살아 있을 때에도 높은 관직에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358)혹 靖宗 2년 侍御史에 책봉된 韓延祚가 韓祚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高麗史≫권 6, 世家 6, 정종 2년 2월 경오). 왜냐하면 인종대의 李公壽가 李壽라고도 불리웠으며 崔竩를 살해한 金俊도 원래 이름은 金仁俊이었기 때문이다.

청주 이씨인 이겸의의 가문도 인종대에 급제하여 활약한 李公升 때에 와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는 인종·의종·명종·신종·희종 5대를 섬겼으며 관직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정2품)까지 올랐다.359)≪高麗史≫권 99, 列傳 12, 李公升. 그의 직계는 아니지만 같은 청주 이씨로서 현종조에 활동한 李可道도 있다. 그는 현종 5년 일어난 上將軍 金訓·崔質 등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중용된 인물이다. 그리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기도 하였으며360)≪高麗史≫권 94, 列傳 7, 王可道. 현종·덕종에게 각각 한 딸을 바치기도 하였다.361)≪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현종 元質貴妃 王氏 및 덕종 敬穆賢妃 王氏. 그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의 관직까지 올랐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는 利川 徐氏인 서희의 가문이었다. 그의 가문은 이미 광종조에 활약한 서필에서부터 현달하였지만 서희에 의해 더욱 빛을 발휘하였다. 그의 아들인 徐訥도 성종 15년의 과거에 합격하여 주로 현종대에 많은 활동 을 하였다. 그리하여 현종의 妃父가 되었으며 관직은 문하시중까지 올랐다.362)≪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 附 徐訥.
≪高麗史≫권 88, 后妃 1, 현종 元穆王后 徐氏.
이들 3대가 연속하여 최고 관직에 올랐으며 모두 배향공신에 책봉되었던 것 이다. 한편 서희의 玄孫인 徐恭도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蔭叙로 景靈 殿判官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명종 초년에 죽었는데 최고 관직은 평장사이었다.363)≪高麗史≫권 94, 列傳 7, 徐熙 附 徐恭. 이처럼 서희 가문은 과거나 음서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중앙에서의 특권과 지위를 세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종대의 지배세력은 중앙에서의 관직생활을 바탕으로 권력과 정치적 지위를 축적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관직의 세습을 가능케 한 고려시대의 음서도 대략 성종조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음서에 대한 실제적인 사료는 목종 즉위년(997)에 처음 보이지만364)“(성종 16, 목종 즉위년) 十二月 御威鳳樓 頒赦…文武官加一級 五品以上者 授蔭職”(≪高麗史節要≫권 2). “穆宗卽位敎 文武五品以上者 授蔭職”(≪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凡蔭叙). 이미 성종대부터 실시된 것 같다. 5품 이상의 관료들을 그 이하와는 달리 특별 대우를 하고 있는 기사가 여럿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종 원년에 京官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각각 봉사를 올려 시정의 득실을 논하도록 하였으며365)≪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원년 6월. 8년 2월에는 5품 이상의 문관과 4품 이상의 무관으로서 질병이 있는 자에게 의사를 보내 치료케 하라는 교서를 내린 바 있다.366)≪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8년 2월. 또 같은 해 4월에는 京官 6품 이하는 四考加資케 하면서도 5품 이상은 반드시 王旨를 받아 처리케 하였고367)≪高麗史節要≫권 2, 성종 8년 4월. 목종 11년(1008) 5월에는 5품 이상관으로 하여금 각기 1명씩을 천거토록 하기도 했던 것이다.36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薦擧之制. 따라서 성종조에 음서제의 실시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369)李基白, 앞의 글(1981), 193쪽. 좀더 좁혀 생각해 본다면 중앙과 지방의 관제 정비와 문·무산계의 정비가 이루어진 성종 14년 무렵에 음서제도가 마련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370)朴龍雲,<高麗時代 蔭叙制의 實際와 그 機能>上(≪韓國史硏究≫36, 1982;≪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의 硏究≫, 一志社, 1990, 5∼7쪽). 그렇다면 성종대의 지배세력들이 서서히 귀족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는 하나의 단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이들은 관직생활의 대가로 전시과라는 토지를 받음으로써 경제적인 토대도 구축해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종 12년(1021)에 보이는 功蔭田의 존재도37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功蔭田柴. 이미 성종대 무렵에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예컨대 성종 원년(982) 최지몽을 홍문숭화치리공신에 봉하고 성종 7년 최승로를 淸河侯에 봉할 때 공음전 같은 토지를 준 것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점차 경제적 부도 세습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중앙관료로 서서히 귀족화하기 시작함으로써 지방에 남아 있던 그들의 친족과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즉 在地勢力과 在京勢力으로 분리되었던 것이다. 일단 과거나 음서 등을 통하여 중앙관료가 된 이들은 여러 가지 특권 때문에 본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범죄를 범한 자들을 고향으로 강제 퇴거시키는「歸鄕」이 형벌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감찰하는 관리가 금품을 훔치거나 감찰할 때에 재물을 받고 법을 어긴 자 및 관청의 물건을 팔고 산 자에게는 귀향죄가 적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372)≪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이 귀향죄가 언제 성립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종 7년에, 감독에 임한 관리가 스스로 도둑질하였을 때에는 贓物의 다소를 막론하고 모두 本貫으로 유배토록 한 조치가 있는 점으로373)≪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현종 7년 5월. 미루어 성종대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있었지 않나 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성종대의 지배세력은 신라의 6두품 계열이나 과거 합격자를 비롯한 유신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추구한 당시의 상황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약간의 대립과 갈등은 있었다. 이른바 최승로 계열과 서희 계열이 그것이었다. 전자는 적극적으로 성종의 유교정책과 중화정책을 지지하였고 후자는 이러한 성종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전통을 중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중앙관료로서 관직에 따른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토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지위를 세습시키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음서제나 공음전제도, 그리고 귀향죄 등의 제도가 탄생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제 지방과의 연계관계를 끊고도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갔다. 즉 중앙 귀족적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金甲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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