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 시련의 극복과 체제의 정비
  • 1) 목종·현종대의 시련과 정비

1) 목종·현종대의 시련과 정비

고려 穆宗·顯宗代는 귀족사회 체제가 발전되어 가던 시기였다. 成宗代에 성립·정비된 내외관제와 통치체제가 이 무렵 자리를 잡아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권과 지배귀족이 원만한 협조를 이루게 됨에 따라 국가를 다스려 나가는 귀족사회 체제는 文宗朝에 들어서면서 난숙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귀족사회가 발전해 나가는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시련과 극복의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목종·현종대에 있었던 시련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 것이며 이러한 시련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그 시련과 위기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는 前期의 통치체제가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진통과 시련의 실체를 이해하는 것이 됨은 물론, 나아가 귀족사회의 발전과정을 파악하는 첩경이 되기도 할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목종대에는 金致陽 난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정치사태와 이에 따른 정국의 변동이 있었다.444)李泰鎭,<金致陽亂의 性格-高麗初 西京勢力의 政治的 推移와 관련하여->(≪韓國史硏究≫17, 1977). 따라서 김치양 난을 중심으로 목종대의 정치세력의 추이를 살펴보는 일은 그 선행과제가 될 것이며 목종대의 정치적 시련과 현종의 즉위과정, 그리고 이어진 거란족의 침입과 격퇴를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종대 정치는 西京勢力이 담당하여 정계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었다. 목종 원년(998) 7월에 서경을 鎬京으로 개칭하여 서경의 우위를 나타내려 한 것도위의 정계 판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이와 같은 西京優遇 정책은 서경이 원 도읍지임을 표방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서경정책은 국왕 스스로에 의해서라기 보다 모후인 景宗妃 獻哀王后의 영향에 따른 것이었다. 이 모후의 출신이 서경 세력의 중심인 黃州皇甫氏란 사실이 그러한 가능성을 높여 주는 것이다. 헌애왕후는 목종 즉위 후 태후의 지위를 확보하면서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나갔다. 洞州 곧 瑞興 출신으로 태후의 외척인 김치양을 등용한 것은 그 출발이었다고 믿어진다.445)김치양은 성종대에 승려로서 태후의 거처인 千秋宮을 출입하다가 “자못 추잡한 소문이 있어” 먼 지방에 杖配되어 있었다. 그런데 목종 즉위 후 곧 불러 들여져 閤門通事舍人의 벼슬을 받았고, 몇 년 되지 않는 사이에 벼슬이 뛰어 올라 右僕射 兼 三司事에 이르렀다. 김치양 계열의 진출이 대단히 두드러진 것은 ‘백관의 벼슬이 오르고 못 오르고가 모두 그 손에서 나오고 親黨을 布列하였다”(≪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金致陽)는 기록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목종대는 황주 황보씨계의 千秋太后를 중심으로 한 서경 세력이 우세를 유지하면서 定宗代 이래 추구된 같은 척족인 忠州劉氏 및 貞州柳氏 계열과의 유대도 작용하였다. 이 점은 목종대 宰臣이던 徐熙·韓彦恭·韋壽餘·劉瑨·康兆·崔沆·蔡忠順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목종은 왕권 행사에 일정한 제약을 받는 가운데서 왕권 신장을 위한 노력을 버리지 않았다. 목종 6년(1003)에 과거제 정비 및 강화를 촉구하는 교서446)≪高麗史≫권 3, 世家 3, 목종 6년 정월.를 내린 것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慶州系 유신 崔彦撝의 손자인 최항이나 近畿地方 호족계 출신으로 보이는 채충순447)내력이 잘 알려지지 않은 채충순은 蔡靖의 본관이 陰城임을 감안하여 그가 음성인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李泰鎭, 앞의 글). 등과 같이 목종대는 서경 세력이 중심이 된 왕후족 계열의 세력과, 성종대 이래의 유교적 관인형으로 양성된 부류가 양 세력으로 병존체제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경 세력이 주도하게 된 목종대 이래의 관인 출신들은 이질적인 존재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기도 하였다 여기에 목종대 정치적 시련의 단초가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목종대는 정치세력상의 변동은 있었지만, 중앙관제 자체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로이 진출한 왕후족 계열의 대표적 인물도 기성의 관직체계를 통해 현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 변화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목종 8년(1005)에 있었던「外官汰去」의 조처가 그것이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성종 14년(995)의 지방조직은 왕 2년(983)에 이루어진 5도호부·12목의 체제에 都團練使·團練使·刺使·防禦使의 州를 보태서 이 룬 형태였다.448)李基白,<高麗地方制度의 整備와 州縣軍의 成立>(≪趙明基華甲記念 佛敎史學論叢≫, 1965;≪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191∼194쪽). 이들 중 목종 때 태거의 대상이 된 것은 도단련사·단련사·자사의 주로서, 성종 14년에 증설된 것 중에는 방어사의 주 한 경우만 남았을 뿐이었다.449)≪高麗史節要≫권 2, 목종 8년 3월. 그런데 남게 된 19개의 防禦鎭使 주의 소재를 살펴보면, 朔方道의 3개 주(高州-고성, 湧州-덕원, 文州-문천)를 제외하고는 모두 關內道·浿西道 소속으로 이 시기의 정치적 주도세력인 서경족의 본거지로 나타나고 있다.450)李基白, 앞의 책, 193쪽. 군사적 측면에서 태거의 조처는 서경 세력 자체의 어떤 이점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보인다.451)李泰鎭, 앞의 글.

목종 8년 외관태거의 조처가 단행될 무렵 김치양은 천추태후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그 2년 전부터 일을 꾸미고 있었다. 태조의 자손으로 유일하게 남은 大良院君은 이 때문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대량원군이 삼각산 神穴寺에 유폐된 것은 이에 연유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치양은 목종 12년(1009) 정월에 이르러 더 적극적인 정국 변환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태후의 거처인 천추궁에 불을 내도록 하였다.452)≪高麗史節要≫권 2, 목종 12년 정월 임신. 김치양은 이 사건을 예상되는 반대 세력의 축출 내지는 약화의 한 계기로 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453)李泰鎭, 앞의 글.

그러나 김치양 측의 적극적인 공세가 펼쳐지기 전에 국왕이 아파 누움을 칭탁하여 청정을 일체 폐한 가운데 嬖臣 劉忠正의 밀고로 그의 의도가 알려짐으로써,454)≪高麗史≫권 93, 列傳 6, 蔡忠順. 국왕 측의 대책이 앞서게 된다. 이 때 국왕에게서 入衛의 명을 받은 이는 康兆였다. 그는 당시 정국의 형세를 이용하여 왕 폐립의 단행까지 결심하고 대량원군을 맞아 들여 옹립하기 위해 一隊를 따로 삼각산으로 보내는 한편,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바로 개경으로 들어와 김치양 일당을 제거하였다. 이어 대량원군의 즉위가 확실하게 된 다음 목종을 폐위하여 태후와 함께 충주로 내치고 뒤이어 사람을 보내어 죽이게 하였다.455)≪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康兆. 이렇듯 강조와 그 일파에 의해 목종이 살해됨으로써 정치적 시련은 일단락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뜻대로 대량원군이 곧 顯宗으로 즉위하게 되고 정치의 주도권은 강조가 장악하였다.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강조는 中臺使로서 近職을 장악한데다 參知政事로서 재신의 열에 들었으며 吏部尙書까지 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현종 2년(1011) 정월 왕의 파천 중에 강조가 피납되니 이로 말미암아 서경 세력은 위축되었다.456)卓思政·朴昇·崔昌·魏從政·康隱 등은「康兆之黨」으로 논핵되어 해도에 유배되었다(≪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2년 8월 병진). 강조의 피납사건은 상대적으로 많은 非西京勢力이 중요 관직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같은 사정은 강조가 제거된 뒤 같은 왕 3년 2월에 있었던 인사발령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위수여-문하시중, 유 진-문하시랑, 최사위-내사시랑평장사, 최 항- 이부상서 참지정사, 박충숙-상서좌복야, 채충순-예부상서 등이 그것인데 여기서 현종의 추종세력이 모두 재신급 인사에 등용되고 있음이 주목된다.457)李泰鎭은 “위수여·유진은 서경 세력이기는 하나 주류가 아닌 제휴세력 계열이며, 또 이때는 이미 연로한 축이어서 그 직위 자체가 예우적인 느낌을 준다”고 하였다(앞의 글, 108∼109쪽). 따라서 현종 3년부터의 정치체제는 왕정이 일차적으로 앞세워진 것이 특징인데, 이는 목종대 이래의 서경 세력 중심체제가 외척관계나 군권을 배경으로 했던 것과는 대조가 된다. 그리고 때맞추어 제도적 정비가 단행된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즉 현종 3년(1012) 정월에 5都護·75道安撫使의 制458)「75」道安撫使는「7州」安撫使의 착오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邊太燮,≪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119쪽 및 河炫綱,≪高麗地方制度의 硏究≫, 韓國硏究院, 1977, 8∼9쪽).가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목종 8년(1005)에 태거된 성종 14년의 지방조직과 맥이 닿는다는 점에서 현종대의 정치가 성종대의 체제로의 복귀를 추구하면서 나름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이처럼 현종대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성종대 것을 추구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현종대가 왕권 확립을 목적으로 하는 유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현종대에도 커다란 시련이 계속 닥쳐왔다. 거란의 여러 차례에 걸친 침입이 바로 그것이다. 현종 원년(1010) 遼는 당시 강조의 정변을 구실삼아 그 죄를 묻는다는 이유로 고려를 침입했던 것이다.459)金庠基,<단구와의 항쟁>(≪국사상의 제문제≫2, 국사편찬위원회, 1959), 34·138쪽. 한편 池內宏은<契丹成宗の高麗征伐>(≪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7, 1920;
≪滿鮮史硏究≫中世篇 2, 吉川弘文館, 1937, 227쪽)에서 그 목적이 고려왕의 입조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물론 高麗와 宋의 통교를 막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지만,460)≪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2년 8월에 보이는 소위 問罪書에도 침략의 본 뜻이 나타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요의 제2차 침입은 특히 크나큰 시련을 안겨 주었다. 즉, 요군은 興化鎭에서 순검사 楊規의 강력한 저항을 받자 通州로 진격하였다. 그리고는 고려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던 강조를 붙잡아 살해한 후 개경까지 함락시켰던 것이다. 이로 인해 현종은 羅州로 피난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한편 요군은 흥화진·귀주·통주·서경 등을 함락하지 못한 채 개경으로 곧장 진격한 까닭에 병참선이 차단되어 전군이 위험에 빠질 우려도 많았다. 이에 요군은 고려 측의 정전 제의를 받아 들여 현종이 親朝한다는 조건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현종의 친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강동 6주의 반환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요는 또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현종 6년(1015)정월부터 요의 대군이 행동을 개시하여 같은 왕 9년(1018) 12월 蕭排押(소손녕의 형)의 10만 군이 쳐들어옴으로써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이 때 고려는 姜邯贊(상원수)·姜民瞻(부원수)이 거느리는 20만 군으로 대항하였고 같은 왕 10년(1091) 2월에 거둔 龜州大捷은 그 통쾌한 끝맺음이 되었던 것이다.461)귀주대첩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요로 하여금 1차 80만, 2차 40만 군의 대침입이었던 것을 3차 10만 군으로 줄이게 하고, 서경유수 강감찬 지휘하에 10년간 20만 군을 양성·대비한 고려의 전략전술이 돋보인다.

이 무렵 對內 정치적 중요 사실을 보면 우선 주목되는 것은 요의 제2차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까지 내려 간 것을 전후해서 佛力의 가호를 빌고자 대장경 조판을 시작한 일이다. 이 방대한 사업은 몇 대를 거쳐 문종 때 완성되지만 그 대부분은 현종대에 조판되었던 것이다. 이는 현종이 특히 죽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玄化寺를 크게 짓고 宋代에 새로 조판한 金字大藏經 6천 권을 들여다가 경판을 많이 새긴 데서 짐작된다.462)이 분야 연구에 근자 朴相國 등이 노력하고 있지만(<海印寺 大藏經板에 대한 再考察-그 名稱과 板刻 內容을 中心으로->≪韓國學報≫33, 1983, 참고), 일반적으로는 池內宏 등 일인 학자의 성과가 아직도 이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경판들(初雕大藏經)은 대구 符仁寺에 소장되었다가 고종 19년(1232)경 몽고 침략으로 불타 버렸지만, 그 사이에 義天의 속장경이 보태져서 현존하는 再雕大藏經을 조판하는 바탕이 되었다. 한편 현종은 유교진흥에도 관심을 보여 薛聰과 崔致遠을 각각 弘儒侯·文昌侯로 봉하고 처음으로 문묘에 종사하니 동방 유현을 배향하는 시초가 되었다.463)≪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13년 정월·11년 8월. 최근 金鎔坤은<高麗 顯宗 代의 文廟從祀에 대하여 -崔致遠의 경우를 中心으로->(≪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528∼544쪽)에서 최치원 從祀의 정치적 요인을 해명하였다.

또 戰後 복구사업으로 이러한 교화적 시책과 더불어 개경의 羅城을 축조한 것이 두드러진다. 국초 이래 개경 궁성은 내성만 있고 외성이 없었다. 이는 외관도 그렇지만 거란 침입 때 방위상 허점이 크게 문제되었다. 이에 강감찬의 건의로 현종 초년에 나성을 쌓게 되었다. 王(李)可道의 감독으로 30만 인부가 동원되어 현종 20년(1029) 8월에 완성되니 5년 전에 성립된 5部 35坊 344里의 5部坊里制와 함께 고려 수도건설의 일단이 완성되고 중앙집권의 큰 진전을 보인 것이다.

현종대에는 또 국력회복을 위한 경제시책이 마련되었다. 무엇보다 농사를 권장하여 농민으로 하여금 농업에만 힘쓰도록 노력동원을 줄였다. 누에치기 외에 말기르기에도 법을 정해 마정의 충실을 기하였다. 과세 감면과 물가 조절에도 나섰으며 특히 義倉收斂法을 실시하여 역대의 구민책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시책으로 중앙관제와 더불어 지방제도의 更正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고려 전시대를 걸쳐 보더라도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먼저 중앙관제를 보면 현종 13년(1022)에 太子師·保와 관속을 두었는데 이는 태자교육제도의 시초를 이룬 것이며, 이 무렵 太卜監을 司天臺로 개칭하여 천문·역서 등을 관장하였는데 이로써 관제의 내실과 진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보다 앞서 현종 3년(1012) 東京留守를 혁파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왕 9년(1018)에는 4도호8목의 지방제도를 정하였다. 즉 安南(全州)·安西(海州)·安北(安州)·安東(慶州)에 도호부를 두고 廣州를 비롯한 忠州·淸州·晋州·尙 州·全州·羅州·黃州 등 오늘날까지도 각기 고장의 중심이 되는 8곳에 목 사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종래의 10도제는 형식적으로도 점차 사라지게 되고 뒤에 소위「五道兩界制」가 성립되는464)河炫綱, 앞의 책, 40쪽.
朴龍雲,≪高麗時代史 上≫(一志社, 1985), 123∼130쪽.
한편으로 앞의 4도호와 양계(서북쪽 경계의 西界와 동북쪽의 東界) 및 8목체제가 오래 계속되었던 것이다. 다만 안동도호부는 현종 21년(1030) 경주가 동경으로 다시 승격됨에 따라 지금의 안동으로 옮겨지고 안남도호부는 현종 13년(1022) 폐지되면서 오늘날 안변의 安邊都護府가 대신 올라섰다.

또 戶長·事審官制를 選擧任命制로 하여 정돈하고 현종 15년(1024) 鄕貢 규정을 세워 지방 貢生 차출의 원활을 기하였으며 따로 문무관의 단련을 법제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현종 2년(1011)에 都兵馬錄事가 임명되고 이어 6년(1015) 都兵馬使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도병마사제가 대체적인 조직을 이룬 듯하거니와 자세한 관제는 문종 때 가서 제정되기에 이른다.465)旗田巍,≪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法政大學出版局, 1972). 현종 9년(1018)에는 또 향리직의 정원도 조정되고 기능이 분화하였으며 향리의 공복규정도 마련되었다.

현종대를 계기로 전개된 고려 중기의 체제정비 사업은 德宗·靖宗代에로 이어졌다. 우선 국방시설상으로는 압록강구에서 永興에 이르는 천리장성이 쌓여진 일이다. 이미 전대 이래 발론된 것이지만 덕종 2년(1033) 柳韶가 맡은 후 12년 걸려서 정종 10년(1044)에 공사를 마쳤다. 대내적으로는 덕종 3년(1034) 黃周亮의 주관 아래 전대의 역사 편찬이 완성되었다. 일찍이 태조에 관한 실록은 많이 정리되어 있었던 듯한데 제2차 거란 침입 때 대궐이 불타 다른 문적들과 함께 모두 소실되었으므로 현종 4년(1031) 최항 등의 참여 하에 태조∼목종 사이의 七代事蹟(實錄)을 꾸미기 시작하여 이 때 36권으로 완성하게 된 것이다. 이후 실록 편수사업은 정례화된 듯 정종대에 들어 崔冲이 修國史의 소임을 맡아 전대의 실록을 편찬하고 있다. 그리고 정종 8년(l042)과 11년(l045)에는 史書와 禮書가 간인되기도 하며 國子監試 등 과거제의 내실이 뒤따랐다.466)과거의 監試制 등 진전은 학자간에 이설이 있다(朴龍雲, 앞의 책, 147∼148쪽 주 참조). 또 전후하여 隨母法·賑恤制를 비롯한 사회경제 정책도 강구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