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 시련의 극복과 체제의 정비
  • 2) 문종의 체제정비와 전성
  • (3) 법제와 경제유통

(3) 법제와 경제유통

문종대의 법제 정비는 즉위 원년(1047)에 착수되었다. 시중 崔冲이 그 해 6 월 왕명에 의하여 律官을 모아 律例를 자세히 교정·정리하고 書算業도 교정을 가하였으며 동 8월 사형 판결에는 三覆制를 실시하였다. 왕은 이런 사안의 결재 때에 거동을 삼가고 6년(1052)에는 죄인 심문에 법관 3명 이상의 합의를 거치도록 하는 등 매우 신중을 기하였다. 또 문종 10∼11년에는 撫問使를 보내어 각 지방관의 성적을 사정하고 按察使·監倉使나 事審主掌使를 시켜 사심관의 민폐 여부를 다스려 나갔다. 국초에 세력이 매우 컸던 사심관이 점차 통제를 받게 된 것은 그만큼 중앙집권의 내실이 갖추어진 것을 뜻한다.475)旗田巍, 앞의 책. 기인의 選上法이 충실히 시행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한편 풍속제도에도 손을 써서 민심의 돈후를 기하고 특히 養老에 힘쓰며 선왕의 능묘와 전대의 명현 사당의 수호에도 마음을 기울였다. 이런 가운데 문종대의 지방 안정책은 상당한 실적을 올렸고 지방관의 권농을 독려하여 재해대책을 세밀하게 세우고 조세 감면이나 飢民 구제도 힘쓰며 민간의 고리대 피해를 막는 子母停息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시책은 다 중세 농경국가가 취하는 기본 방책이기도 하지만≪高麗史≫食貨志 서두에 문종이 절검 간소를 힘써 창고의 미곡이 남아 돌고 자급자족의「富庶之治」를 이루었다고 쓰여 있는 것을 보더라도 당시의 산업 사정을 추측할 수 있다.476)≪高麗圖經≫권 16, 倉廩.

이러한 성과는 농업기술의 꾸준한 발전과 수리시설의 계속적인 수축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이다. 문종대의 구체적인 사례는 延安 臥龍池(남대지)의 중수 정도 밖에 안보이지만, 이 전후대까지 포함한다면 삼한 이래의 金堤 碧骨池를 비롯하여 尙州 恭檢池, 密陽 守山堤 등이 개수되어 농업 증산을 실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내 수공업으로 널리 명주·모시 등의 베 생산이 진전됨은 물론 각지의 所에서 금·은 동·철·소금·종이·자기 등이 생산되어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고 국제무역에도 기여하였다. 문종 32년(1078) 宋使 安燾가 모처럼 고려에 와서 선물 사태를 만나 배에 다 실어 갈 수 없을 정도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麗·宋 간의 무역 등 외교관계는 매우 친밀했음477)≪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32년 7월.이 확실하다. 이에 따라 국내 광업생산도 제법 활발했을 터이고 문종 때에 都鹽院의 관제가 정비된 것으로 보아 소금 전매제가 세워지고 어업도 ‘細民은 海品을 多食한다’고 할 만큼 고기잡이가 성했던 것이다.478)≪高麗圖經≫권 23, 雜俗.

또 도자기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청자 제작 기법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농공업의 발달과 더불어 큰 도시를 중심으로 국내상업이 일어나 노점상 같은 墟市가 날마다 열리는 성황까지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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