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 시련의 극복과 체제의 정비
  • 2) 문종의 체제정비와 전성
  • (6) 풍수지리 사상과 현실작용

(6) 풍수지리 사상과 현실작용

신라 말기이래 道詵의 풍수지리설은 일종의 인문지리 사상 내지 국토종합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주목되어 왔거니와 고려시대에는 국운의 성쇠를 좌우하는 圖讖思想으로서 현실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문종대 이후 문운 전성기에는 직접적인 京都·離宮 건설에 크게 작용하였다.

즉 문종대에 불력과 지덕에 의지하여 나라 이익을 증진해 보고자 하는 노력은 이미 서술한 흥왕사 창건과 더불어 吉地에 巡駐離宮을 마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성강변 객풍 廣德 땅에 長源亭을 짓는 것을 비롯하여 漢山 남쪽 한양땅에 남경을 시설하고 서경에는 좌우궁을 지어 西京畿를 설치함으로써 이른바 巡駐三京이 틀을 잡았던 것이다.489)李丙燾,≪高麗時代의 硏究≫(乙酉文化社, 1948;亞細亞文化社, 1980), 128∼138쪽.문종 때에만도 지덕이 왕성한 곳을 찾아 도읍을 삼거나 혹은 자주 순주하여 흥륭을 기하려는 延基思想의 전개상은 실례가 많다.

먼저 장원정의 경우, 전래(道詵) 비기에 ‘고려 태조의 반도 통일(936) 후 120년 되는 문종 10년(1056)에 개경의 西江 명당에 이궁을 건설하면 基業이 늘어난다’는 설에 의거, 이 정자를 지은 것이라 한다. 도참설을 믿고 이름도「長源」이라 명명한 문종은 여러 번 이곳에 순행하고 賀詩를 짓게 하였다.

또 10년이 지난 문종 21년(1067)에는 오늘의 서울 땅에 남경을 설치하게 된다. 이미 태조 초 평양에 서경이 건설되고 성종 때 경주에 동경이 두어진 바 있지만 문종 때 남경을 신설함으로써 지방행정상으로 개경을 빼고도 3경이 생겼다. 이리하여 도참사상의 측면에서는 동경을 제외하는 순주삼경제가 마련되게 되었다. 한편 남경(원 楊州) 땅은 선사 이래 백제·고구려의 首邑 내지 別都였거니와 문종의 남경 설치는 역시 도참비기의 ‘개국 후 160년(문종대)에 木覓壤(서울 남산)에 도읍한다’라는 참위설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숙종대에 남경을 순주 3경으로 재창건하자는 논의가 있는 것을 보면 문종의 순행은 오래 지속되었던 것 같지 않다.

이러한 사정은 서경의 좌우궁 건설에서도 비슷하였다. 원래 태조 때 서경이 두어지고 중기 인종 때까지 개경과 서경의 양경체제를 유지한 것은 너무나 두드러진 사실이거니와, 명칭상 한때 광종의 西都, 목종의 鎬京 등과 같이 개칭이 있었고 성종 때와 문종 때에는 원 이름대로 복구되기도 하였지만 한결같이 중시하는 전통은 계속되었다. 문종 16년(1062)에는 이에 더하여 서경기 4道를 두었으니 기술한 경기 확대와 대응시켜 태조 이래의 分司제도를 한층 강화한 것이라고 하겠다. 다만 서경 내지 서경기제도는 인종 때 妙淸 등의 난 이후 폐지되고 말지만, 문종 35년(1081)에는 서경 본궁(萬壽臺 長樂宮)을 수리할 뿐아니라 도참설에 따라 또 좌우 두 궁을 조영하였다. 이 두 궁은 본궁 좌우 10여 리 되는 곳에 龍宮·珠宮으로 복영된 것이라 하거니와490)李丙燾, 위의 책. 그 후 숙종 때의 남경 재건 등과 더불어 지리도참설의 현실작용이 매우 컸음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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