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 1) 이자의의 난과 숙종의 즉위
  • (1) 이자의의 난과 그 사상

(1) 이자의의 난과 그 사상

13대 宣宗이 죽은 뒤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獻宗은 몸 또한 허약하여 母后인 思肅太后가 垂簾政治를 행하였다.495)≪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恩肅太后 李氏. 이것은 당시 왕의 존재가 유명무실함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 아래서 당시의 지배세력들은 동요하게 되었고, 마침내 헌종 1년(1095) 7월 경신일에 李資義의 난이 일어났다.496)≪高麗史≫권 10, 世家 10, 헌종 원년 7월 경신.

선종의 아들이자 헌종의 배다른 아우이며 자신의 생질이었던 漢山侯 昀을 왕위에 추대하려고 하였던 이자의의 난은≪高麗史≫의 기록대로만 이해할 수는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이자의의 난은 계림공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면서 정적을 제거코자 한, 왕위 찬탈에로의 거보를 내딛기 위한 정치적 조작극으로 보아야 한다497)秋萬鎬,<李資謙의 軍事基盤理解>上(≪史鄕≫2, 공주사대, 1985), 36쪽.는 기왕의 이해와 다른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자의의 난은≪高麗史≫의 관련 기록에 의해 세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먼저 다음의 내용을 통하여 이자의의 난의 발생 원인을 살펴보자.

자의는 재물을 탐하고 무뢰한 용사를 모아 騎射를 일삼으며 항상 말하기를 ‘主上이 병이 있음에 아침에 어떨지 저녁에 어떨지 모르고 外邸에서 엿보는 자가 있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 한산후를 받들어 임금의 자리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지 말게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義).

위의 내용은 헌종이 병이 있어 왕위를 지키기 어려운데 밖에서 왕위를 넘보는 자가 있으니 너희들은 힘을 다해 선종의 아들이며, 자신의 생질인 한산후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밖에서 넘보는 자’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高麗史≫기록에 의하면 선종의 아들로는 헌종과 한산후 형제가 있다. 그렇다면 ‘밖에서 넘보는 자’는 당시 생존해 있었던 선종의 아우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려시대 왕위계승 규정이라 할 수 있는「訓要十條」의 3조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적자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이 비록 일반적인 예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丹朱가 불초함에 堯가 舜애게 禪讓한 것은 참으로 공정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맏아들이 불초하거든 그 둘째에게 전하여 줄 것이며, 둘째도 불초하거든 형제 가운데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는 자에게 전하여 주어 대통을 계승하게 하라(≪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26년 4월).

≪高麗史≫권 88, 列傳에 의하면 문종은 현종의 딸 仁平王后, 李子淵의 세 딸 仁睿順德王后·仁敬賢妃·仁節賢妃, 侍中 金元冲의 딸 仁穆德妃 등과 혼인하였다. 이 가운데 인예순덕왕후와의 사이에 順宗·宣宗·鷄林公(肅宗)·大覺國師 煦·常安公 琇·普應僧統 規·金官侯 왜@·卞韓侯 愔·樂浪侯 忱·聰慧首座 璟을,498)≪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仁睿順德太后 李氏. 인경현비와의 사이에서 朝鮮公 燾·扶餘公 燧·辰韓公 愉를499)≪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仁敬賢妃 李氏. 낳았다. 인예순덕왕후의 소생 가운데 상안공은 헌종 1년 3월,500)≪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常安公 琇.
≪高麗史≫권 10, 世家 10, 헌종 1년 3월 신축.
금관후는 선종 9년 4월,501)≪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金官侯 @.
≪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9년 4월 병인.
변한후는 동왕 3년 9월,502)≪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卞韓侯 愔.
≪高麗史≫권 10, 世家 10, 선종 3년 9월 정묘.
낙랑후는 문종 37년 4월에503)≪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樂浪侯 忱.
≪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37년 4월 을축.
각각 죽었으므로 당시에 생존해 있었던 인물은 계림공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경현비의 소생은 이때 전부 생존해 있었다. 따라서 선종의 아우로서 유약한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위를 넘볼 수 있었던 인물은 계림공·조선공·부여공·진한공 등이며504)≪高麗史節要≫권 6, 헌종 1년 7월. 이제현의 찬에 “時人譏宣宗 有寵弟五人 而傳 位孺子 致此亂也”라 하여 상안공도 생존해 있는 듯 기록하였으나, 상안공은 이 당시에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寵弟는 5인이 아니고 4인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 제일 맏이였던 계림공이 가장 유력하였다.

이자의의 난의 발생 요인을 왕실과 인주 이씨와의 혼인관계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보자. 왜냐하면 헌종의 모후인 사숙태후와 사촌간이면서도 사숙태후의 수렴정치기간에 이자의는 자신의 생질이었던 한산후를 왕위에 추대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왕실과 인주 이씨와의 혼인관계를 처음 맺은 문종에서 선종까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문종:인평왕후 김씨(현종의 딸)

   인예순덕왕후 이씨(이자연의 딸)

   인경현비 이씨(이자연의 딸)

   인절현비 이씨(이자연의 딸)

   인목덕비 김씨(김원충의 딸)

순종:貞懿王后 왕씨(平壤公 基의 딸)

   宣禧王后 김씨(金良儉의 딸)

   長慶宮主 이씨(李顥의 딸)

선종:貞信賢妃 이씨(李預의 딸)

   思肅太后 이씨(李碩의 딸)

   元信宮主 이씨(李頲의 딸)

위에서 나타난 혼인관계를 분석해 보면 문종은 이자연의 세 딸을 맞아 들였을 뿐만 아니라 金殷傅의 외손녀인 현종의 딸 그리고 靖宗과도 혼인관계를 맺은 바 있는 문하시중 김원충의 딸과도 혼인하였다. 순종은 문종의 아우인 평양공 기의 딸과 경주인 김양검의 딸 및 이자연의 여섯째 아들인 이호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선종은 이자연의 셋째 아들인 이석의 딸과 이자연의 아우인 李子祥의 맏아들 이예의 딸을 왕이 되기 전 國原公이었을 때 맞아들였으며, 왕위에 오르고 난 다음 이자연의 맏아들 이정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상의 분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왕실이 인주 이씨와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지만, 종실 또는 인주 이씨 이외의 성씨와도 혼인관계를 맺고 있는 점으로 이는 평소 간과되어 온 것이다. 특히 선종은 인주 이씨라 하여도 문종이 이자연의 세 딸을 맞아들인 것과는 달리 인주 이씨 각 계열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러한 문종에서 선종까지의 혼인관계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추론도 가능할 듯하다.

왕실이 한 가문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왕권에 쉽게 접근하여 왕권의 약화를 가져 올 수 있는 외척세력에 대하여 지나친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를 억제하고, 나아가서는 왕을 중심으로 왕실의 외척이란 입장에서 서로 견제하도록 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개재되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505)南仁國,≪高麗 肅宗의 卽位過程과 王權强化≫(≪歷史敎育論集≫5, 경북대사대 역사교육과, 1983), 132∼133쪽. 따라서 선종은 인주 이씨의 각 계열과 혼인관계를 맺어 서로 견제하도록 하여 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으나, 헌종이 어린 나이로 더욱이 병약한 상황에서 즉위하여 모후에 의한 수렴정치가 행해진 당시로서는 명실상부한 왕권의 확립이 요청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아래 헌종을 기준으로 한산후가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한 이자의와 선종을 기준으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의 숙종이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을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숙종의 위와 같은 입장은 헌종을 고려 역대 왕의 대수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506)숙종 6년 2월 重光殿에서 서적을 열람하고 서적에 도장을 찍었는데, 그 印文에 3행 세로 쓰기로 “高麗國十四葉辛巳歲藏書 大宋建中靖國元年 大遼乾統二年”이라는 25자가 새겨져 있다(金庠基,≪高麗時代史≫, 東國文化社, 1961, 205∼206쪽). 여기에서 숙종이 15대가 아니라 14대로 기록되어 있음을 근거로 알 수 있다. 숙종이 헌종을 고려 역대 왕의 대수에 포함시키지 않았음은 蕂田亮策,<李子淵とその家系>下 (≪靑丘學叢≫15, 1933), 125∼126쪽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이자의가 난을 주도할 수 있었던 그의 세력기반에 대하여 알아보자. 앞서 인용한 내용 가운데 “자의는 재물을 탐하고 무뢰한 용사를 모아 기사로 일삼으며”라는 것을 통해 무뢰한 용사 즉 사병집단507)이들을 사병집단으로 파악하여도 무방할 듯하다. 왜냐하면 이보다 후대의 것이지만 무신집권기의 용사가 무신들의 사적 군사력의 기초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鄭杜熙,<高麗 武臣執權期의 武士集團>≪韓國學報≫8, 一志社, 1977, 83∼84쪽).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병집단의 소유에는 막대한 경제력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은 다음의 내용으로 그의 경제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적신 이자의 등이 사사로이 미곡을 비축하여 그 수가 鉅萬에 이르는데 이는 모두 백성을 괴롭혀 거두어들인 것이니 모두 관에 몰수하도록 하십시오(≪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義).

이자의의 세력기반은 사병집단만이 아니었다. 이는 난이 진압되는 과정을 전후하여 그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거나 유배되었던 인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인물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508)≪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李資義.

죽음을 당한 인물:李資義, 閤門祗候 張仲, 中樞院堂後官 崔忠白, 아들 綽, 興王寺大師 智炤, 將軍 崇烈·澤春, 中郎將 郭希, 別將 成甫·成國, 校尉 盧占, 隊正 裵信 등 17인.

유배되었던 인물:平章事 李子威, 少卿 金義英, 司天少監 黃忠現, 奉御 黃榮, 少監 徐晃, 侍御史 王台紹, 祗候 李資訓, 錄事 李景泌·崔淵, 將軍 李甫·吳昌, 郎將 仇賢·良玠, 別將 安鱗·珍奇, 散員 惟寵·崔幸·林自成·侯善·金錢·李玄孟·姜希白·鄭貞佐 등 50여 인.

위의 내용으로 보아 이자의의 세력은 자신의 가족과 당시 문반 구성원 가운데 극히 일부와 무반의 중·하위집단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자의의 한산후 추대에 직접 참여하였던 그의 가족으로는 아들인 작과 흥왕사 대사 지소 그리고 그와 사촌 간인 李資訓(資凉) 및 종숙 李預509)≪高麗史≫권 95, 列傳 8, 李子淵 附 預. 뿐이다. 이것을 인종 때 이자겸의 난에 가담하였던 친족 구성원과 비교하면 그의 부계 친족 내지 그와「兩側的 親屬關係」(父側과 母側 계보에 대칭적인 범위의 혈족들과 촌수로 나타낼 수 있는 친속관계를 갖는 친족조직)510)盧明鎬,<山陰帳籍을 통해 본 17世紀 村落의 血緣樣相>(≪韓國史論≫5, 서울大 國史學科, 1979).
―――,<高麗의 五服親과 親族關係 法制>(≪韓國史硏究≫31, 1981).
를 가진 어느 쪽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흥왕사 대사 지소가 화를 만난 데 근거하여 이자의의 난에 흥왕사의 승병이 사병적 성격으로 참여하였다고 이해되어 왔다.511)金潤坤,<李資謙의 勢力基盤에 대하여>(≪大丘史學≫10, 1976).
金光植,<高麗 肅宗代의 王權과 寺院勢力-鑄錢政策의 배경을 중심으로->(≪白山學報≫36, 1989), 116쪽.
그러나 이자의의 난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승병의 존재를 입증할 사료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흥왕사와 같은 큰절의 주지는 중·소사찰의 경우와는 달리 교종의 최고 승계인 僧統이 담당하였으므로 대사였던 지소는 승병을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지소가 살해당한 것은 승병을 동원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아들 작의 죽음이나 이자훈의 유배처럼 이자의의 숙청에 희생된 것으로 보는 견해512)秋萬鎬, 앞의 글, 34∼36쪽.도 있다. 이와 같은 상반된 견해로 인해 이자의의 난에 사원세력이 참여하였는지의 여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문종대를 전후하여 경원 이씨 세력과 연결된 法相宗과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던 華嚴宗이 사원세력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513)崔柄憲,<高麗中期 玄化寺의 創建과 法相宗의 隆盛>(≪韓㳓劤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이자겸의 난 때 그의 아들인 義莊이 玄化寺의 승려를 동원하여 반란에 가담하였음을 감안하면 이자의와 사원세력의 연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514)韓基汶,<高麗 中期 興王寺의 創建과 華嚴宗團>(≪鄕土文化≫5, 慶山鄕土文化硏究會, 1990), 13쪽.

한편 문반으로는 평장사 이자위·병부원외랑 金德忠515)≪高麗史≫권 10, 世家 10, 헌종 1년 9월 병신.·시어사 왕태소·녹사 이경필 등 당시 문반 전체 구성원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이자의에 동조하였다. 선종에서 헌종으로의 교체시기에 중앙정계의 요직에 있었던 인물 가운데에는 이자위만 “자의와 서로 사귀어 專權用事하였을”516)≪高麗史節要≫권 6, 헌종 1년 7월. 뿐 그 외의 인물은 보이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무반의 경우도 문반처럼 실질적으로 군사력을 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 즉 상장군과 대장군의 존재는 볼 수 없고 장군·낭장·별장·교위 등 무반의 중·하위집단만이 참여하였을 뿐이었다. 이자의 세력의 한 부분이었던 문반과 무반의 구성원 분석을 통해 이자의는 당시 정치적 지배세력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가의 공식적 물리적 강제력인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517)秋萬鎬, 앞의 글, 34∼37쪽에서 이자의 세력의 실체를 분석한 다음 헌종 원년 당시 양측의 세력균형은 성립되지 않았으며, 일방적이라 할 만큼 계림공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고 하여 이자의 세력의 미약함을 논증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이자의의 난은, 인주 이씨와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분석한 다음 왕위를 둘러싸고 경원 이씨 일문의 頲·碩·顗·顥 4대가 사이에 전개된 세력쟁탈전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518)蕂田亮策, 앞의 글, 117쪽.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을 듯하다. 즉 이자의의 난의 실체란 선종이 죽은 뒤 어린 나이의 병약한 헌종이 즉위하자 명실상부한 왕권의 확립은 고사하고 헌종의 모후인 사숙태후에 의한 수렴정치가 행해지는 당시 상황 하에서, 헌종을 기준으로 한산후가 왕위 계승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 이자의와 선종을 기준으로 왕위 계승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 숙종이 왕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이자의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사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자의의 난은 비록 자신이 소유하였던 사적 군사력과 일부의 가족과 문반, 그리고 무반의 중·하위집단을 기반으로 하였으나, 광범위한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국가의 공식적인 군사력을 운용하지 못하였던 한계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당시의 양측 세력의 불균형이라든가 당대 병권 장악의 우열 등을 고려할 때, 이자의 모반 운운은 숙종 측을 미화하는, 다시 말해서 숙종 측이 조작한 정적 대숙청의 명분이라는 견해는 이자의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해석이라 할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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