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 2) 귀족사회 내의 갈등과 이자겸의 난
  • (1) 예종대 정국의 추이

(1) 예종대 정국의 추이

숙종의 왕권강화 정책의 결과 안정된 왕권을 계승하였던 예종도 전대에 못지 않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는 즉위년(1105) 10월 士庶와 내관 사이의 교통과 청탁행위를 금지시켜583)≪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즉위년 10월 경인. 인사행정의 공정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같은 해 12월 그는 교서를 내려 중앙의 문벌귀족과 연계된 지방관리들의 謀利害民을 제거하고 이들을 왕권의 규제 아래 둠으로써 지방행정의 일원적 관료화를 시도하였다.584)申千湜,<高麗 中期 敎育理念과 國子監 運營>(≪高麗敎育制度史硏究≫, 螢雪出版社, 1983), 53쪽.

지금 각도 주군의 司牧으로서 청렴하여 백성을 걱정하고 돌보아 주는 자가 열에 한 둘도 없고, 잇속을 좇고 공명을 낚기만 하여 대체를 해치며, 뇌물을 좋아하고 사리를 꾀하여 생민을 괴롭히므로 백성이 흩어지고 도망하는 자가 서로 이어 10호에 9호가 비게 되니 짐은 매우 이를 슬퍼하노라. 이는 실로 고을 수령의 인사고과가 제대로 행하여지지 아니하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권선징악이 없기 때문이니 마땅히 명신을 보내어 군현을 순시하고 수령들의 성적을 매겨 알리도록 하라(≪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즉위년 12월 갑신).

아울러 예종은 서해도의 儒州·安岳·長淵 등 여러 현에서 주민들이 유망하자 監務官을 파견하여 그들을 안무케 하였더니 드디어 유민이 돌아와 산업이 날로 성하게 되었던 예에 따라, 牛峯·坡平·安州·靑松 등 백성의 유망이 심하였던 군현지역에 감무관을 파견하여585)≪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1년 4월 경인·3년 7월 신유. 예종 때 파견된 감무관에 대해서는 元昌愛,<高麗 中·後期 監務增置와 地方制度의 變遷>(≪淸溪史學≫1, 1984). 羅恪淳,<高麗時代의 監務에 대한 硏究>(≪閔丙河停年紀念史學論叢≫1988). 金東洙,<高麗 中·後期의 監務派遣>(≪全南史學≫, 1989). 李仁宰,<高麗中後期 地方制 改革과 監務>(≪外大史學≫3, 1990) 등 참조. 貢賦를 장악하고 권농과 유민 평안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속현의 영현화 작업을 행하였다.586)李仁宰, 앞의 글, 132∼133쪽. 한편 채웅석은 이 때의 감무관 파견이 “실제로는 속현 지역이 피폐되고 그에 따라 유망 등의 형태로 저항이 광범위하게 일어나자, 그 현상들을 공권력으로 억제하고 안정적인 수취의 확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12·13세기 향촌사회의 변동과 ‘민’의 대응>≪역사와 현실≫3, 1990, 66쪽). 인사행정상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지방행정의 일원적 관료화의 시도 및 백성의 생활안정과 관련된 조치들을 취한 다음, 예종은 보다 바람직한 국가경영을 위하여 양부의 近臣 및 대성의 諫官, 諸司의 知制誥 등으로 하여금 국정운영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개진토록 하였다.587)≪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1년 6월 병술. 따라서 그들이 제기하였던 당시의 문제점을≪高麗史≫와≪高麗史節要≫의 기록에 근거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588)≪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1년 7월 신축 및≪高麗史節要≫권 7, 예종 1년 7월.≪高麗史節要≫의 내용이≪高麗史≫의 기록보다 더 상세하다.

① 논한 바를 몸소 행하고 스스로 반성하며 조상의 유훈을 받들어 계승하도록 할 것.

② 사철의 기후에 맞추고 하늘에 따르는 월령을 행할 것.

③ 종묘와 사직단을 수리하고 이에 따른 그릇과 의복을 갖출 것.

④ 天壽寺의 역사를 중지할 것.

⑤ 화폐의 사용을 금지할 것.

⑥ 복식제도의 문란함을 바로잡을 것.

⑦ 문무관료의 진퇴 즉 인사행정상의 공정을 기할 것.

⑧ 을해년 악역을 저질러 유배된 자에 대한 사면조치를 취할 것.

⑨ 간음을 범한 승도로 향호에 충당된 자에 대한 대책을 세울 것.

⑩ 중외의 법사에서 문죄하는 세 번의 고문을 가려 할 것.

이상 제기된 열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예종의 대응은 긍정적으로 받아 들인 것과 받아 들이지 않은 것으로 대별된다. 먼저 긍정적으로 대응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589)≪高麗史節要≫권 7, 예종 1년 7월. ①에 대해서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잊지 않고 거의 실행하였다” 하였으며, ②와 ③에 대해서는 “有司로 하여금 상세히 알려서 시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⑥에 대해서는 “그 복식제도에서 상하가 뒤섞였다는 것은 선대부터 아직 정해진 법이 없었고, 임금과 신하가 백성에게 솔선하여 검소를 행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므로 임금과 신하가 절검을 몸소 행하여 백성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뭇 백성이 보고 느껴 존비의 구별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신하들의 검소한 생활을 요구하였다.

⑦에 대해서는 “문무관료가 공도 없이 녹봉만을 탐내고 직책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가뭄과 蝗蟲 재해가 자주 이르니, 대거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물러가게 하는 것이 정치하는 요체이다. 그러나 온갖 관직이 지극히 번잡하여 짐이 다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만약 어질고 착한 이가 아랫자리에 있으면 재상이 이를 천거하고 간사하고 탐한 자가 관직에 있으면서 직책을 다하지 않거든 대간에서 이를 내쫓아라” 하여 인사문제에 있어서 재상과 대간의 역할이 중요함을 지적하였다.590)申千湜, 앞의 책, 51쪽에서는 “문벌로서 관직을 제수받은 자들의 안일한 근무자세에 대한 규제이며, 동시에 이들의 근면과 태만을 대간으로 하여금 규찰하게 함으로써 왕권적 차원에서 관료체제의 모순을 지향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⑧에 대해서는 “을해년에 惡逆을 범하여 유배된 자는 마땅히 각각 감형하고 서용할 것이며, 연좌되어 재산을 몰수하고 노예로 삼은 자는 이를 면제하고 노예에 속하지 않은 자도 아울러 돌보아 주라” 하였는데, 특히 이들에 대한 서용 조치는 숙종 5년 개경으로 돌아 왔던 인물들에 대한 혜택으로 이자의의 난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였던 자들에게 사면과 서용 기회를 제공해 줌으로써 정치지배세력 내부에 존재하였을 갈등을 해소코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591)南仁國,<高麗 睿宗代 支配勢力의 構成과 動向>(≪歷史敎育論集≫13·14, 1990), 405쪽. 洪承基는 이 조치의 대상이 된 공노비가 당대에 정치권력의 심층과 연결되어 있었던 당당한 귀족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귀족들에 대한 국왕의 관용을 보인 것으로 해석하고, 이것은 최소한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국왕의 양보, 국왕에 대한 귀족세력의 우위를 과제로 해서 이루어진 양자 사이의 타협 내지 조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高麗前期의 奴婢政策>,≪高麗 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170쪽).

그리고 ⑨에 대해서는 “승도로서 간음을 범하면 길이 향호에 충당하여 사면을 거쳐도 용서되지 않음은 가혹한 것이니, 마땅히 유사에게 시켜 조사하고 살펴서 군역에 충당케 하라” 하였다. 그리고 ⑩에 대해서는 ‘법사는 짐의 형벌을 조심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알아서, 이미 죄상을 자백한 자는 죄의 輕重을 논할 것 없이 반드시 고문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한편 수용하지 않았던 ④와 ⑤에 대한 대응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④에 대해서≪高麗史節要≫에는 “先考께서 세우기 시작한 것인데, 얼마되지 않아 승하하자 중론이 벌떼같이 일어나 다투어 간하여 말리니, 짐도 그 불가함을 알면서도 다만 선고의 뜻을 따르려고 아직 감히 罷去하지 못하였으나, 이는 짐의 허물이다”라고 하여 천수사의 역을 파하기로, 즉 그들의 견해를 받아 들이는 자세를 취한 듯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高麗史≫에는 “천수사의 역사는 짐 또한 가부를 아는 바이나 聖考께서 짓기 시작하였을 때를 당하여서는 한 사람도 감히 말하는 이가 없더니 승하하신 이후에 중론이 벌떼같이 일어나 다투어 간하여 말리려 하니, 짐이 의리로써 생각하여 보건대 지세의 길흉이란 이것이 꺼림의 적은 일인 것이니 어찌 선인의 뜻을 따르는 것만 같으리요, 오직 금년 봄의 역사는 짐의 과실이니 마땅히 사면령에 의거하여 삼년 후에 이를 행할 것이다” 하여 숙종의 眞殿寺院이었던592)許興植, 앞의 책, 70∼71쪽. 천수사의 역사는 일시 중단할 뿐이라 하였지만, 9월 숙종의 왕권강화 정책의 시행에 적극 참여하였던 윤관으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하여593)≪高麗史節要≫권 7, 예종 1년 9월. 이의 지속적인 추진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여기서 숙종대 정책시행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⑤에 대해서는 “화폐를 사용하는 법은 곧 오랜 옛날 제왕이 나라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요, 나의 선고께서 재화를 모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大遼가 근년에 또 용전을 시작한다 함을 들음에 있어서랴. 무릇 한 가지 법을 만들면 많은 비방이 일어나는 까닭에 옛 글에 백성과는 시작할 때 의논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는데, 뜻밖에 여러 신하는 태조의 유훈에 당과 거란의 풍속의 사용을 금하였다는 것을 구실로 하여 화폐사용을 배척하나, 그 금하는 바는 대개 풍속과 사치를 말한 것 뿐이니 문물·법도 같은 것이야 중국 것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선조의 유훈이 금하는 바는 화폐의 사용을 말함이 아님이 분명하다. 지금 마땅히 그만두어야 할 것은 오직 관문과 나루의 商稅 뿐이다”라고 하여 숙종의 주전정책은 재화의 증식을 목적으로 하였던 것이 아니라「富國便民」을 위한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일축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예종은 양부와 대간, 제사의 지제고 등의 건의 내용 가운데 당시 상황에서 시정되어야 할 것이나 준수되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그들에게도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이나 개선되어야 할 것 및 담당하여야 할 역할 등을 강조하였다. 반면에 숙종대에 행해진 정책에 대해서는 비록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당분간 그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비판받는 부분에 대해서는 점진적으로 개선하려 하였다.

위와 같은 예종의 대응책은 숙종에 의해 추진되었다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결과 별무반이란 별도 부대의 창설로 이어졌던 여진정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즉 즉위년 12월에 宰樞와 더불어 이에 대해 논의하였으며,594)≪高麗史節要≫권 7, 예종 즉위년 12월. 이듬해에는 도병마사에서 군령과 군기의 확립 및 군사전력의 정예화에 관련된 대책을 제시하자 이를 적극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였다.595)≪高麗史節要≫권 7, 예종 1년 7월. 그러나 예종은 즉위 이후 중앙정국 운영의 주도적 위치를 점하지 못하였다. 그것을 분명히 알려 주는 사료는 없지만 예종 즉위년 11월 문하시중이었던 魏繼廷이 “또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어 침묵으로 일관하여 건의한 바 없었다”596)≪高麗史≫권 95, 列傳 8, 魏繼廷.라고 하고 있음에서 당시 정치지배세력 내부에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음과 예종이 제시하였던 교육정책이 어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였음597)≪高麗史節要≫권 7, 예종 2년 1월.
≪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科目 2, 學校, 예종 2년.
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치상황 하에서 예종의 혼인이 1년 6월에 28세의 나이로 선종의 딸 延和宮主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의 혼인대상이 종실녀였음은 왕위 계승권자의 혼인에는 적합한 것이었지만,598)鄭容淑,<“高麗史” ‘后妃傳’의 檢討>(≪高麗王室族內婚硏究≫, 새문사, 1988), 43∼45쪽 참조. 역대 왕들의 혼인이 15세에서 20세 사이에 이루어졌음599)鄭容淑, 위의 책, 100∼101쪽의 주 40 참조.과, 현존하는 고려시대 戶口單子의 분석을 통해서 당시인들의 혼인 연령이 20세 이하였음 및 혼인 연령의 파악이 가능한 금석문 자료를 통해서 나타나는 혼인 연령이 16세에서 25세 사이였다는 연구성과600)許興植,<高麗時代의 家族構造>(≪高麗社會史硏究≫, 亞細亞文化社, 1981), 309쪽.를 감안한다면 그의 혼인은 상당히 늦은 것이었다.

왜 예종의 혼인이 이렇게 늦어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601)南仁國, 앞의 글, 407쪽. 즉 숙종은 비록 헌종의 선양에 의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하지만 실상은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고, 즉위 이후에는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숙종은 새로운 외척집단이 앞선 시기의 상환처럼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키려는 것을 우려하였거나, 보다 강력한 왕권의 확립에 조력할 수 있는 집단의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이 문제를 둘러싸고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이 첨예화되어 혼인대상의 선정에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예종의 경우 그는 왕위 계승권자의 지위를 태자로 책봉되는 순간부터 차지하였으나, 당시 宗室女 거의 대부분이 인주 이씨의 소생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예종은 선종의 딸 연화궁주와의 혼인에 이어 3년 1월에는 이자겸의 딸과 혼인하였다. 예종의 이 혼인은 상당히 주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자겸의 인주 이씨계열은 숙종 재위기간에 이자의의 난과 숙종의 반인주이씨 정책으로 중앙정계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의 이 혼인에 대한 기존연구에서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자겸의 장인이자 숙종대에 시중을 역임하였던 최사추나 숙종의 처남이며 자신과 동서였던 柳仁著의 인품과 지위가 크게 작용하였을 것,602)朴性鳳,<高麗 仁宗期의 兩亂과 貴族社會의 推移>, (邊太變 編≪高麗史의 諸間題≫, 三英社, 1986), 162쪽.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이자의와 종형제 사이인 이자겸의 딸과 바로 숙종의 아들인 예종 사이에 혼인관계가 맺어지게 된 것은 왕실과 인주 이씨의 강력한 유대가 없이는 왕권의 존립이 위태로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것,603)金潤坤,<高麗 貴族社會의 諸矛盾>(≪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7), 42∼43쪽. 예종이 어리고 그가 경원 이씨의 모든 요구에 대항할 힘이 없어 이루어진 것,604)Edward J. Shultz,<韓安仁派의 登場과 役割>(≪歷史學報≫99·100, 1983), 149쪽. 이 혼인에는 숙종대의 왕권강화 정책에 적극 참여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성장시켜 온 집단을, 숙종대 정계에서 배제되었던 집단에 대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을 견제하고 나아가 자신이 정국 주도의 중심적 위치에 서고자 한 예종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605)南仁國, 앞의 글, 408쪽. 등이다. 혼인에 대한 해석이 어떠하든, 이를 계기로 이자겸의 중앙정계에 있어서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었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한편 예종은 선대에 추진되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여진정벌을 2년(1107) 12월 논의를 거쳐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壬寅日에 여진을 치려 하여 順天館의 남문에 거둥하여 열병하고…왕이 듣고 重光殿 佛龕에 간직하여 두었던 숙종의 誓疏를 꺼내어 양부 대신에게 보이니, 대신들이 받들어 읽고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聖考의 遺旨가 깊고 간절함이 이와같은데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글을 올려 선왕의 뜻을 이어 적을 치기를 청하였다. 왕은 망설이며 결정을 짓지 못하고 崔洪嗣에게 명하여 太廟에서 점치게 하였더니, 坎의 旣濟卦를 얻었으므로 드디어 출병하기로 정하였다(≪高麗史節要≫권 7, 예종 2년 10월 및≪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

이어서 예종은 윤관을 元師로 吳延寵을 副元帥로 임명하여 여진정벌을 단행하였고 그 결과 9성을 개척하였다.606)≪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2년 12월 병신·3년 2월 무신·3월 경진. 여진정벌에 공을 세웠던 윤관은 3년 4월 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 知軍國重事에 임명되어 관리의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하는 최고의 실력자로 등장하였다.607)≪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3년 4월 임오. 그러나 9성의 개척과 더불어 이를 유지하는 문제와 여진과의 빈번한 충돌 그리고 여진의 지속적인 환부 요구에 의한 9성의 처리문제 및 윤관에로의 지나친 권력의 집중현상은 당시의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었고, 여기에 9성 개척 이후에도 계속된 여진과의 전투에서 윤관·오연총이 패전함에 따라 4년 6월 최홍사·金景庸·任懿 등에 의해 시작된「敗軍之罪」에 대한 책임 추궁이608)≪高麗史節要≫권 7, 예종 4년 6월. 또 하나의 쟁점으로 대두하였다.

이러한「敗軍之罪」의 추궁과 아울러 9성 환부 논의가 시작되었으며,609)≪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4년 6월 병신. 9성의 환부에 대한 처리는 다음달 재추와 대성·제사의 지제고·侍臣·都兵馬判官 이상 문무관리가 회의하여 환부를 결정한 다음610)≪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4년 7월 을사. 이를 여진에게 통보함으로써 종결되었다. 그러나 당시 양부·대간들의 윤관과 오연총의「패군지죄」에 대한 처벌 요구는 계속 유예시켜 오다가, 9성 개척의 공으로 윤관과 오연총에게 부여하였던 功臣號만을 박탈하는 것으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다.611)≪高麗史節要≫권 7, 예종 5년 12월.「패군지죄」의 논의 과정은 南仁國, 앞의 글, 411∼413쪽 참조.

한편 예종은 4년 7월 교육제도를 개편하여 새로운 인재의 발굴과 양성에 진력하였다. 중앙에서는 국학에 七齋를 설치하고 文의 六齋 즉 麗澤(周易)·待聘(尙書)·經德(毛詩)·求仁(周禮)·服膺(禮記)·養正(春秋) 등에는 대학생 崔敏庸 등 70명을 시취해서 각 재에 분거케 하고 武의 講藝齋에는 韓自純 등 8명을 뽑아 교육받게 하였다. 이와 아울러 국학에 양현고를 두어 경제적 지원을 하였으며 학사의 신축과 학관의 보장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3京 8牧에 通判 이상 및 지주사·현령으로서 문과 출신자에게 학사의 管勾를 겸직케 하는 등 교육제도의 개편을 단행하였을612)≪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이와 관련해서는 申千湜의 앞의 책과 金鎔坤,<高麗時期 儒敎官人層의 思想動向-文宗에서 忠肅王期를 중심으로->(≪國史館論叢≫6, 1989), 78∼79쪽 참조. 뿐만 아니라 과거의 응시자격과 관련된 관료선발 체계를 확립하였다.613)≪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예종 5년 9월. 이에 대한 해석에는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許興植은 “①製述·明經의 國子監試에 새로 합격한 자는 국자감에 3년간 소속시킨다. ②入仕한 자는 300일이 지나야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다. ③西京은 留守官이 진사를 選上한다. ④鄕貢은 東·南京과 8牧 3都護 등 界首官이 前의 격식대로 선발하여 보낸다”로(≪高麗 科學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28쪽), 申千湜은 “①은 국자감 재생들의 제술 명경업에 대한 응시요건, ②는 문음 혹은 기타의 방법으로 官路에 진출한 자들의 응시요건 ③은 서경 재생들의 응시요건, ④는 향공 즉 지방의 향교에서 수업한 자들의 응시요건”으로(앞의 책, 56쪽), 朴龍雲은 “㉮제술·명경·諸業에의 新擧者는 국자감에 3년간 소속하면서 仕滿三百日 해야 각 業의 監試에 赴擧하는 것을 許하고 ㉯서경인즉은 유수관이 選上하며, ㉰향공인즉은 東·南京·八牧·三都護 등 계수관이 前式에 의거하여 試選해 申省토록 하였다”(≪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硏究≫, 一志社, 1990, 184쪽)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교육제도의 개편과 과거응시자격의 제도화의 결과 문벌 자제와 일반 자제들의 차등이 불식되고, 실력에 의한 새로운 인재 발굴이 제도화됨으로써 전통적 문벌귀족을 견제할 수 있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614)申千湜, 앞의 책, 56∼61쪽.

이러한 상황 하에서 예종 1년에는 수용하지 않았던 천수사의 공역에 대 하여 6년 11월 유사의 요청과 7년 2월 간관의 상소를 수용하는615)≪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6년 11월 경신·7년 2월 경술. 유연한 자 세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예종은 왕 측근 인물의 전횡을 제어하는616)≪高麗史≫권 13, 世家 13, 예종 8년 2월. 한 편 10년 2월에는 당시 일곱 살에 지나지 않았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고 동 궁관의 관원을 정예화하여 왕위계승권자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과거에도 적극 간여하였다. 10년 5월의 과거에서는 합격자의 대책이 이전 사람의 것을 답습하였다는 낙제자의 소청을 받아 들여 覆試케 하였으며,617)≪高麗史≫권 14, 世家 14, 예종 10년 5월 정해·권 73, 志 27, 選擧 1, 選場 예종 10년 5월. 복시에 관해서는 柳浩錫,<高麗時代의 覆試>(≪全北史學≫8, 1984) 참조. 11년 4월에는 禮部試 합격자 이외의 인물에게도 복시에 응시케 하여 급제자를 선발하는618)≪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選場 예종 11년 4월. 등이 그 예이며, 예종의 이러한 과거에의 간여는 당시 왕권이 거의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619)許興植, 앞의 책, 36쪽. 그리고 11년의 관제 개편시에는 淸讌·寶文閣을 설치하여 그 당시 文名이 뛰어난 자들을 소속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經筵620)고려시대의 경연에 대해서는 權延雄의<高麗時代의 經筵>(≪慶北史學≫6, 1982)이 있다. 활동에 참가케 하여 그들의 정치적 활동을 지원하여 줌으로써,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켜 갔다.

이상에서 예종대 정국의 추이를 정리해 보았다. 당시 정국의 전개과정에서 정치 지배세력 내부의 갈등은 윤관과 오연총의 9성 개척과 이로 인한 세력의 결집, 그리고 이들에 대한「패군지죄」추궁과 관련하여 파악할 수 있다. 즉 여진정벌의 추진으로 이의 주체적 수행집단인 윤관의 세력결집이 있었고621)鄭修芽,<尹瓘勢力의 形成-尹瓘의 女眞征伐과 관련된 몇 가지 問題의 檢討를 중심으로->(≪震檀學報≫66, 1988) 참조. 여진정벌 이후 확보된 9성의 환부를 둘러싸고 의견 충돌이 있었으나, 윤관·오연총의「패군지죄」 추궁과 맞물려 윤관세력의 해체를 가져 왔다.622)鄭修芽, 위의 글과 南仁國, 앞의 글 참조. 윤관세력의 해체는 당시 정치 지배세력 내부에 어떠한 인물에게 권력의 집중 현상이 초래되었을 경우 이를 묵과하지 않았던 대응세력의 존재를 알려 주며, 그들 또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예종의 왕권강화 정책의 시행과 더불어 이를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이 대두하였으며, 이들과 기존 세력과의 갈등 역시 있었을 것이나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채 예종대를 마감하였다.623)朴性鳳, 앞의 글, 162쪽에서는 “어느 한편에게 권력이 치우치지 않은 가운데 왕권이 안정되고 외척귀족과 관료귀족 간에 어느 정도 세력균형이 잡혀진 시기였다”고 하였다. 그와 같은 갈등이 현실적으로 표출된 것은 인종 즉위년에 있었던 이자겸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韓安仁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 사이의 대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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