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 3) 서경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
  • (1) 이자겸의 난 이후 정국의 추이

(1) 이자겸의 난 이후 정국의 추이

이자겸이 축출된 이후 인종은 이자겸의 두 딸을 폐하고, 任元厚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하였으며,654)≪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4년 6월 을묘. 추밀원부사 金富軾 등을 송에 보내어655)≪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4년 9월 을축. 송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대외정책의 변화를 가져 왔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인종은 임원후와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학문적 소양을 기반으로 진출하였던 유신들로 하여금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는데,656)朴性凰,<高麗 仁宗期의 兩亂과 貴族社會의 推移>(≪高麗史의 諸問題≫, 1986) 166쪽. 그것은 인종의 즉위 이래 행하여진 바 없었던 경연이 다시 재개되었음을657)≪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5년 3월 계축·갑인·을묘.
權延雄,<高麗時代의 經筵>(≪慶北史學≫5, 1985) 참조.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자겸의 제거 이후 인종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질서는 즉각 수립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자겸과 정치적 목적을 같이 하였으나 난에 대한 책임 소재를 둘러싼 갈등으로 친인종 세력화하여 이자겸과 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였던 척준경과 그의 지지세력이 존재하였으며, 동왕 4년 2월 이자겸을 제거하려다가 유배되었던 김찬이 정계에 복귀하고658)≪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4년 10월 임자.
≪高麗史節要≫권 9, 인종 4년 10월.
인종의 즉위와 관련하여 한안인과 함께 화를 당하였던 문공인·문공유·최유청·한유충 등이 소환되어 복귀하였을659)≪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5년 4월 을유. 뿐만 아니라, 이들의 정계 축출에 적극 개입하였다가 이자겸에 의해 유배되었던 최홍재조차 소환되는660)≪高麗史節要≫권 9, 인종 6년 6월. 등,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인물들이 당시 정치 지배세력을 형성하였기 때문이었다.661)朴性鳳, 앞의 글, 167쪽.
南仁國,<高麗 仁宗代 政治支配勢力의 成分과 動向>(≪歷史敎育論集≫15, 1990), 88쪽 등 참조.
그러한 상황은 이자겸과 정치적 행동을 같이 하였던 인물들조차 완전히 정계에서 축출되지 않고 건재하였으며,662)≪高麗史≫권 98, 列傳 11, 高兆基. 아니면 척춘경처럼 정치적 입장의 전환을 계기로 자신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었던 인물의 존재663)重興宅 (이자겸의 私第)의 執事였던 金義元·崔滋盛과 처음에는 이자겸 지지세력의 일원이었다가 친인종화하였던 金珦 등을 들 수 있다. 등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척준경은 인종 4년 6월 문하시중에 임용되어 전권을행사하였고, 그의 발호를 못마땅히 여긴 인종의 입장을 이해하였던 좌정언 鄭知常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탄핵을 받아 巖墮島로 유배되었다.664)≪高麗史節要≫권 9, 인종 5년 3월.
≪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5년 3월 을묘.
즉 “병오년 봄 2월에 준경이 최식 등과 더불어 대궐을 침범할 적에 주상께서 神鳳門의 문루에 나오셔서 군사에게 효유하는 뜻을 말하니 모두 갑옷을 벗고 환성을 올려 만세를 부르는데, 다만 준경이 조서를 받들지 아니하고 군사를 위협하여 앞으로 날아오는 화살이 주상의 수레 위로 지나가기까지 하였으며 또 군사를 이끌고 액문으로 돌입하여 궁궐을 불태웠으며 이튿날 남궁으로 옮겨 앉으시자 측근에 있던 사람을 모두 죽였으니 옛날부터 난신 중에 이와 같은 자는 적었습니다. 5월의 사건(이자겸의 체포를 의미)은 일시의 공로요 2월의 사건은 만세의 죄인이오니 폐하께서 비록 차마 못하시는 마음이 있으셔도 어찌 일시의 공으로 만세의 죄를 덮겠습니까”라는 상소가 그것이다. 이 때 척준경의 지지세력이었던 최식·李侯進 등도 함께 유배되었다.

척준경과 그 지지세력의 정계 축출은 위와 같은 정치상황 하에서 인종이 이자겸에 의해 화를 당하였던 김찬(安으로 개명)을 통하여 정지상·妙淸·白壽翰 등의 서경 세력과 연계되어서665)≪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妙淸. 姜玉葉,<高麗中期 西京勢力의 政治的 性向>(≪白山學報≫36, 1989), 87쪽에서는 인종이 서경세력과 연계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닌 왕권 지지성향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가능하였던 것이다. 비록 척준경의 제거가 정지상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당시 정치 지배세력의 대부분이 가담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자겸에로의 권력집중이 가져 온 결과를 직접 체험하였던 그들로서는 어느 개인의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 독점을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666)南仁國, 앞의 글, 88∼89쪽 참조.

척준경의 제거 이후 인종은 서경에서 “작년 2월 亂臣賊子들이 틈을 타서 일어나 음모가 발각됐으므로 짐은 부득이 다 법으로 다스렸다. 이로부터 잘못을 반성하고 몸을 책하니 덕에 부끄럼이 많다. 이제 日官의 논의로 西都에 행차하여 지난날 허물을 깊이 반성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르침이 있기를 바라므로 중외에 포고한다”는「惟新之敎」15개 조667)≪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5년 3월 무오에는 10개 조만 수록되어 있으며≪高麗史節要≫권 9, 인종 5년 3월에는 15개 조 전체가 수록되어 있다 이 15개조에 대한 분석은 姜聲媛,<妙淸의 再檢討>(≪國史館論叢≫13, 1990), 190∼191쪽 참조.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① 方澤에서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어 四郊의 기운을 맞을 것.

② 사신을 지방에 보내어 자사·현령의 잘잘못을 조사하여 그를 포상하거나 좌 천하게 할 것.

③ 수레나 복장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도록 힘쓸 것.

④ 쓸데없는 관원과 급하지 않은 사무를 제거할 것.

⑤ 농사일을 힘쓰게 하여 백성의 식량을 풍족하게 할 것.

⑥ 侍從官이 모두 한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고, 천거된 사람이 올바른 인물이 아니면 그를 벌할 것.

⑦ 국고의 식량 저축에 힘써서 백성을 구제할 일에 대비할 것.

⑧ 백성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것에 제도를 세워 일정한 조세와 공물 이외는 함부로 걷지 못하게 할 것.

⑨ 군사를 보살피어 일정한 시기에 훈련을 실시하는 것 이외에는 복무하지 않도록 할 것.

⑩ 백성을 보살피어 지방에 정착하여 살게 하며 도망하여 흩어지지 않도록 할 것.

⑪ 濟危鋪와 大悲院에는 저축을 풍족히 하여 질병에 걸린 자를 구제할 것,

⑫ 국고의 묵은 식량을 억지로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서 무리하게 그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며, 또 묵고 썩은 곡식을 백성에게 찧으라고 강요하지 말 것.

⑬ 선비를 선발하는데 詩·賦·論을 쓰게 할 것.

⑭ 모든 고을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확충할 것.

⑮ 산림이나 못에서 생산되는 이득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며 침해하지 말 것.

인종의 이와 관련된 배경 설명과 15개 조의「유신지교」를 “왕권의 회복이나 정치 기강의 확립과 함께 기층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민생 구휼정책을 주로 시행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668)朴性鳳, 앞의 글, 175쪽.으로 이해하면서 이는 “고려사회에 노정된 정치·사회적 문제를 깊이 통찰한 끝에 국정 전반에 걸쳐 일대 정치 쇄신을 이루고자 천명한 국가적 의지의 표현이었다”669)朴性鳳, 위의 글, 173쪽.거나 또는 “서경에서의 이런 조치는 당시 국운의 융창, 基業 연장의 의도에서 서경에 巡駐할 때는 구폐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령으로 재출발함으로써 기업을 새롭게 하고 인심을 쇄신시킨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670)金庠基,<妙淸의 遷都運動과 稱帝建元論에 대하여>(≪東方史論叢≫, 서울大出版部, 1974), 75∼76쪽. 등으로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실제에 있어서는 그것이 얼마만큼의 실천의 효과를 짝하였는지 알 수 없는 일종의 형식적 고전적 虛禮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671)李丙燾,<仁宗朝의 妙淸의 西京遷都運動과 그 叛亂>(≪高麗時代의 硏究≫, 1980), 198쪽.라는 부정적인 평가와 아울러 “그 내용이 두 차례의 정치적 격변을 거친 이후에도 관리의 기강 확립과 백성의 생활안정 및 풍속의 교정 등에 관한 것이어서 앞으로의 정국운영과 관련된 내용은 찾을 수 없다”하여 이로써 인종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672)南仁國, 앞의 글, 89쪽.도 있다.

인종의 서경 세력과의 연계는 기존 정치 지배세력 내부에 동요를 가져 와 인종의 새로운 구상을 적극 지지하는 문공인·林景淸·洪彝敍 등의 집단과 이에 반대하는 임원후·김부식·문공유 등의 집단으로 분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종의 입장에서는 당시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달성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반대 집단에 대하여 강력한 응징을 하기보다는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서경 세력과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내정개혁을 통해 그들을 지지세력화 하는데 노력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종이 이러한 대응책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종의 새로운 구상에 반대하는 집단에는 새로이 외척이 된 임원후,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추구하다가 화를 당하기도 하였던 문공유 및 당시 정국을 주도하였던 유신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김부식 등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673)위와 같음.

따라서 인종 10년(1132) 8월 서경 세력의 핵심이었던 묘청에 대한 기존의 정치 지배세력의 공세가 있기 전까지의 정치상황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자겸의 제거 이후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의 존재와 그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서경 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확실한 지지세력의 확보에 주력하였던 인종과, 자신들의 기득권의 지속적인 유지와 관련된 인종의 내정개혁674)朴性鳳, 앞의 글, 172∼179쪽 참조.에는 적극 참여하면서도 인종의 서경 세력과의 긴밀한 밀착에는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기존의 정치 지배세력과의 세력균형이 유지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이러한 이해는 이 시기에 경연이 활성화되고 대간들의 언론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자겸 등이 탈취하였던 土田과 臧獲을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675)≪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5년 10월 정묘. 나아가서는 척준경의 처자에게 직전을 환급하고 이자겸의 아들들인 李之美 형제들에게 편리한 대로 한 곳에 모여 살도록 허락하는676)≪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7년 3월 경인. 등 당시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지녔던 인물들이 혼재해 있는 상황에서 그들 내부에 잔존하였을 갈등을 해소시키려는 대책이 마련되고 있음 등에 기인한다.677)南仁國, 앞의 글, 89∼90쪽 참조.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인종은 정치기강의 확립을 통한 臣者의 도리와 君命의 회복 등 왕권의 신장에 주력할 수 있었다.678)朴性鳳, 앞의 글, 174쪽 참조. 이것은 인종이 승선 鄭沆에게 宋의≪忠義集≫을 강독하게 한 것,679)≪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7년 8월 무신. 백관으로 하여금 태조의≪誡百寮書≫를 초록하여 그 자손에게 훈계하도록 한 것680)≪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9년 5월 병오. 등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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