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 3) 서경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
  • (2) 서경천도 논의의 전개와 묘청의 난

(2) 서경천도 논의의 전개와 묘청의 난

묘청·백수한·정지상 등에 의한 서경천도 주장은「西京王氣說」에 의해 인종 6년 8월에 발의되었는데, 그 내용을 세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 보기로 한다.

① 서경으로 행차하였다. 승 묘청과 分司檢校少監 백수한이 스스로 陰陽의 술법을 안다 하고 허황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여러 사람을 현혹시켰다. 정지상은 서경 사람이라 그 말을 깊이 믿고 말하기를 ‘上京은 터의 힘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타서 남은 것이 없고, 서경에는 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임금이 옮겨 앉아 상경으로 삼아야 된다’ 하였다. 마침내 근신 김안과 모의하기를 ‘우리가 만약 왕을 모시고 서도로 옮겨 앉아 상경으로 삼는다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니, 다만 일신만이 부귀할 뿐 아니라 자손에게도 무궁한 복이 될 것이다’ 하였다.

② 드디어 말을 퍼뜨려 서로 칭찬하며 근신 홍이서·이중부 및 대신 문공인·임경청이 따라 호응하여 드디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묘청은 성인이요, 백수한도 그 다음이니 국가의 일을 모두 물은 다음에 행하고 그들이 건의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받아들인다면, 정치가 이루어지고 일이 잘되어 국가를 가히 보전할 것입니다’ 하고, 이에 차례로 서명을 청하니 평장사 김부식·참지정사 임원후·승선 이지저들만은 서명하지 않았다. 글월이 올라가니 왕이 비록 의심을 가졌으나 여러 사람이 강력하게 말하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③ 마침내 묘청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서경의 林原驛 지세를 관찰하니 이것이 곧 풍수들이 말하는 큰 꽃 모양의 터입니다. 만약 궁궐을 지어서 거처하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으며,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서른 여섯 나라가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 하므로 이번 행차가 있었다(이상≪高麗史節要≫권 9, 인종 6년 8월).

①의 내용에서 서경천도의 명분으로 기능하였던 것은 풍수지리 도참사상에 의거한「서경왕기설」임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 이자겸의 난을 지적하고 있음을, 그리고 인종과 서경세력의 연계에는 앞 절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인종의 측근이었던 김안이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내용 가운데 “우리들이 만약 왕을 모시고 서도로 옮겨 앉아 상경을 삼는다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니, 다만 일신만의 부귀 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 무궁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681)金潤坤,<高麗 貴族社會의 諸矛盾>(≪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7), 69쪽.를 통해서 그들 의식의 밑바탕에는 귀족정치에 대한 불만이 흐르고 있음과 천도운동을 통해서 국가를 維新하고 중흥공신이 되자는 것으로 개경에 전통적 생활기반을 가진 문벌귀족의 세력을 이 기회에 억눌러 버릴 의도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②의 내용에서는 서경천도와 관련하여 당시 정치 지배세력 내부에서 묘청 등의 주장에 동조하는 집단과 이에 반대하는 집단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서경천도 운동에 참여하였던 집단에 대하여 이자겸 등의 문벌귀족과 부단한 대립과 투쟁을 전개하여 온 세력을, 즉 지방의 토착세력을 배경으로 중앙에 진출한 신진관료군으로 파악하고 당시 신진관료군 중에는 “이 부패한 문벌귀족을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이에 가담 동조하였던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믿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682)金潤坤, 위의 글, 71쪽.라고 하여 신진관료군으로 그 성격을 규정한 견해도 있다. 그러나 서경천도 운동을 추진하였던 묘청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신진관료군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되는 문공인은 묘청을 성인으로, 그의 아우 문공유는 그를 妖人683)≪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1년 11월.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통해 볼 때 신진관료군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정치적 성향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런지는 의문이다.

③의 내용에서는 서경천도의 또 다른 명분 즉 서경의 임원역지가 大花勢(보통의 明堂보다 룰륭하고 뛰어난 大明堂·大吉地)684)李丙燾, 앞의 책, 201∼202쪽 참조.의 자리라고 하는 풍수지리 사상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에 궁궐을 지어 천도하면 금을 포함한 모든 나라가 고려의 신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인종 초년에 이자겸·척준경 등에 의해 채택되었던 기존의 외교정책 즉 금에 대한 사대정책의 파기를 선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종 6년 8월에 있었던 서경천도 주장은 위 ②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인종에 의해 수용되었다. 인종은 다음달 서경에 호종하여 온 재신과 추신에게 명하여 묘청·백수한 등과 함께 임원역 지역에 새 궁궐 지을 터를 보아 정하게 하였으며,685)≪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6년 9월 병오. 11월에는 임원역을 옮기고 신궁을 짓는데 내시낭중 김안으로 하여금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686)≪高麗史≫권 15, 世家 15, 인종 6년 11월 무신. 그리고 다음해 2월 서경에 새 궁궐이 이루어지자 인종은 서경에 행차하였다687)≪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7년 2월.는 과정을 통해서 “묘청의 새 궁궐을 짓자는 上言으로부터 약 6개월만의 일로서 그 속도가 상당히 빠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새 궁궐 창건이 국왕 뿐만 아니라 조정 신료들의 지지와 협조 아래 수행된 것임을 짐작케 하는 것”688)金南奎,<仁宗代의 西京遷都運動과 西京叛亂>(≪高麗兩界地方史硏究≫, 새문사, 1989), 86쪽.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종이 서경의 새 궁궐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이가 표를 올려 왕을 권하여 황제라 일컫고 원년의 칭호를 정하라 하고, 어떤 이는 표를 올려 劉齊와 동맹하여 금을 협공해서 멸하기를 청하여689)≪高麗史節要≫권 9, 인종 7년 2월.
고려의 대금관계에 대해서는 金潤坤, 앞의 글, 64∼65쪽.
朴賢緖,<北方民族과의 抗爭>(≪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290∼328쪽.
姜聲媛, 앞의 글, 187∼188쪽 등 참조.
「칭제건원론」과「금국정벌론」이 제기되었다. 인종은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금에 계속 사신을 파견하여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칭제건원론」과「금국 정벌론」은 인종 10년에 다시 거론되었는데 이는 다음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서경의 父老 檢校太師致仕 李濟挺 등 50인이 표를 올려 尊號와 연호를 새로 올릴 것을 청하니, 묘청과 정지상의 뜻을 따른 것이다. 정지상 등이 왕을 달래기를 ‘대동강에 서기가 있으니 이것은 神龍이 침을 토하는 것으로서 천 년에 한 번 만나기도 드문 것입니다. 청컨대 위로 하늘의 뜻에 응하고 아래로 백성의 희망을 좇아서 금을 누르도록 하소서’ 하였다. 왕이 이것을 李之氐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금은 강적이라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양부의 대신이 上都에 머물러 지키고 있으니 편벽되게 한 두 사람의 말만 듣고 大論을 결단할 수 없습니다’하니 왕이 ‘그렇다’고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0년 3월).

「칭제건원론」은 묘청·정지상 등의 서경 세력에 의해서만 주장된 것은 아니었다.「칭제건원론」의 대표적 주장자는 尹彦頤로 그의「칭제건원」과 관련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中軍(김부식)이 아뢴 바 ‘언이는 지상으로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할 무리관계를 맺게 되어 크고 작은 일을 실로 같이 상의하였습니다. 임자년 西幸 때에 있어 연호를 세우고 황제라 일컬을 것을 청하였으며 또 국학생을 충동하여 前件의 일을 아뢰었으니 대개 大金을 격노케 하여 일이 일어나면 그 사이를 타 마음대로 처치하고 외인과 朋黨이 되어 不軌를 꾀하고자 함이니 신하의 뜻이 아닙니다’라 한 것을 臣이 재삼 읽어 본 뒤에 마음이 편안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연호를 세우고자 청한 것은 임금을 높이려는 정성에 근본한 것입니다. 우리 본조에 있어서도 태조와 광종의 옛 일이 있으며 과거의 문헌을 상고하건대 비록 신라·발해도 建元을 하였으나 큰 나라에서는 일찍이 군사를 가하지 않았으며 작은 나라도 감히 그 실수인 것을 의논한 일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聖世에 와서 도리어 참람한 행위라고 합니까(≪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 附 彦頤).

그는 가까이는 고려의 태조와 광종의 예를 들고 멀리는 신라와 발해의 예를 들어 모두 연호를 세웠으나 그렇다고 하여 다른 강대한 나라가 군사를 들어 친 일이 없고 약소한 나라로서 이에 대하여 부당하다고 논한 일도 없는데 하필 聖世에 도리어 참람한 행위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이러한 윤언이의 주장은 ‘저 嬰退保守主義者요 고루하고 편협한 사대주의자 김부식 일파에게 頂門의 일침을 가한 것이다“690)金庠基, 앞의 책, 85쪽.라고 평가되기도 하였다.

「서경왕기설」과「대화세설」등에 근거하여 서경의 임원역지에 새 궁궐이 세워지고 이를 계기로 서경천도론이 제기되면서 당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정치 지배세력 내부의 대립을 가져 왔다. 인종 10년 8월에 任元敱(뒤에 元厚로 바꿈)가 “묘청·백수한 등이 그 간특한 꾀를 방자히 하여 괴상스럽고 허탄한 말로써 뭇사람들의 마음을 속이고 혹하게 하는데 한두 명의 대신과 근시들이 그들의 말을 깊이 믿어 위로 주상의 귀를 혹하게 하니, 신은 장차 불측한 환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묘청 등을 저자에 내다 목베어 화근을 근절하도록 하소서”라고 글을 올렸다.691)≪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0년 8월.
≪高麗史≫권 95, 列傳 8, 任懿 附 元厚.
이에 대하여 묘청 등은 “주상께서는 마땅히 대화궐에 오랫동안 거처하셔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근시를 보내어 예의를 갖추어 御座를 설치하고 御衣를 모셔 두고는 공경해 받들기를 주상께서 계신 것 같이 하면 복과 경사가 친히 계신 것과 다름없을 것이오니 이것을 일러 法事를 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이 때 중서시랑평장사 문공인과 내시 내부원외랑 이중부가 어의를 받들고 서경으로 가서 법사를 행하였음692)≪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0년 11월.을 통해 대립 양상을 알 수 있다.

임원애의 묘청 처벌의 상소에 이어서 이듬해 11월에 李仲과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과 백수한 같은 妖人의 斥遠을 요구하고,693)≪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1년 11월. 12년 5월에는 林完이 인종의 求言에 응하여 묘청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기694)≪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2년 5월.
≪高麗史≫권 98, 列傳 11, 林完.
에 이르렀다. 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묘청에 대해 이와 같이 기존 정치 지배세력의 공세가 가능하였던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요인에 의하였을 것695)南仁國, 앞의 글, 91쪽.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인종의 적극적인 지지세력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인종과의 연계를 계기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고 나아가서는 권력마저 장악하려던 서경 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기존의 정치 지배세력이 인식하게 되었음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비록 서경 세력과의 연계를 통하여 왕권의 강화와 확실한 지지세력의 확보에 주력하였던 인종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서경 세력의 정치적 목적이 드러난 이상 서경 세력이라는 지역적으로 제한된 세력보다는 이에 대응하는 기존의 정치 지배세력을 자신의 지지세력화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같은 해 9월에 묘청 등이 굳이 西巡을 청하여 역모를 이루고자 하였을 때, 왕은 양부에 이의 가부를 의논케 하였는데 김부식이 “올 여름에 벼락이 서경의 乾龍殿을 친 것이 길한 징조가 아니 온데 벼락친 그 곳으로 재앙을 피하여 간다는 것이 또한 어긋나지 않습니까. 더욱이 지금 추곡을 거두지 않았는데 행차를 출동하면 반드시 벼를 짓밟게 될 것이니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끼는 뜻이 아닙니다” 하고 아뢰어 간관과 함께 상소를 올려 그 불가함을 주장하자, “말한 바가 지당하니 짐이 감히 서행하지 못하겠다”라고 한696)≪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2년 9월. 인종의 대답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묘청과 정지상의 뜻에 따라 칭제하고 건원하자는 우정언 黃周瞻의 청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상 이자겸의 제거 후 정치공백기에 나타난 묘청과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경천도의 이론적 근거로서 풍수지리 도참사상에 근거한「서경왕기설」과「대화세설」을 제시하고, 대내적으로는「칭제건원론」을 대외적으로는「금국정벌론」을 주장하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국왕의 권위 신장과 관련되었던「칭제건원론」은 당시 정치 지배세력의 일부에서도 수용할 만큼 인종도 상당히 호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 주창된「칭제건원론」이나「금국정벌론」은 서경 천도를 전제로 하고 주장한 것인 만큼697)金庠基, 앞의 책, 86쪽. 기존의 정치 지배세력이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즉 기존의 정치 지배세력들이 이자겸의 난 이후 서경 세력에게 빼앗겼던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회복한 상황이 전개되자, 이에 반발하여 인종 13년(1135) 1월 묘청과 유감 등이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인물이 김부식이었다.

묘청의 난 발생과 그에 대한 대응은 다음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① 무신일에 묘청과 柳旵이 分司侍郎 趙匡 등과 더불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制書를 위조하여 留守와 員僚를 잡아 가두고, 또 僞承宣 金信을 보내어 서북면병마사 李仲 등과 여러 성의 군사·장교와 상경의 사람으로 서경에 있는 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또한 모두 구류하고, 군사를 파견하여 岊嶺을 단절하였으며, 또 사람을 보내 위협하여 여러 성의 군병을 징발하고 국호를 大爲, 기원 연호를 天開라 하였으며 정부의 부서를 정하고 그 군대를 天遣忠義라 이름하였다.

② 왕이 재추들을 불러 의논하고 평장사 김부식·참지정사 임원후·추밀원승선 金正純에게 명하여 병부에 앉아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토벌하려고 계획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김부식·임원후를 中軍師로, 김정순·鄭旌淑·盧令琚·林英·尹彦頤·李瑱·高唐愈·劉英을 그 佐로, 이부상서 金富儀를 左軍師로, 金端·李愈·李有開·尹彦旼을 그 佐로, 知御史臺事 李周衍을 右軍師로, 陳淑·梁祐忠·陳景甫·王洙를 그 佐로 삼았다(이상≪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3년 1월).

묘청과 조광 등에 의해 주도되었던 서경에서의 반란은 이들을 宣諭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內侍 柳景深·曹晋若·黃文裳 등에 대해 보여 주었던 예우적인 태도를 근거로 왕실에 대한 반역의 의지를 찾을 수 없다,698)瀨野馬熊,<高麗妙淸の亂に就いて>(≪瀨野馬熊遺稿≫, 1936), 30쪽. 또는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면서도 새 황제를 옹립하지 않았던 점과 인종에게 그들 자신의 거사 소식을 알렸다는 점 등699)李丙燾, 앞의 책, 231쪽.
金潤媛, 앞의 글, 77쪽.
姜聲緩, 앞의 글, 194쪽.
에 근거하여 정권 탈취는 의도하였을지언정 고려왕조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경에서의 반란은 기존 정치 지배세력의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로 되고 그들에 의해 제기되었던「칭제건원론」과「금국정벌론」이 그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마련된 하나의 주의주장에 불과하였음을 인정해 주게 되었다.700)南仁國, 앞의 글, 92∼93쪽.

서경에서의 반란에 대응하여 인종은 유교적 실천도덕의 실현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을701)金鎔坤,<高麗時期 儒敎官人層의 思想動向-文宗에서 忠肅王期를중심으로->(≪國史館論叢≫6, 1989), 82쪽 참조. 뿐만 아니라 기존의 정치 지배세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김부식을 중용하여 이의 진압책임자로 하였다. 김부식은 먼저 개경에 있었던 김안·정지상·백수한 등의 서경 세력을 제거하였다.702)≪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13년 1월 갑인. 서경에서의 연락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당하였던 이들의 존재를 통해, 천도를 주장하는 세력 중에서 서경에 거주하고 있었던 즉 서경재지파와 중앙관료로 진출했던 관료파와의 사이에 천도의 방법에 관해서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는 견해가 있다.703)金潤坤, 앞의 글, 78쪽. 한편 鄭求福,<金富軾>(≪韓國史市民講座≫9, 1991), 125쪽에 “우유부단한 인종이 출정 후에 어떤 사주를 받아 번복하는 조처를 내릴 것을 염려해 묘청의 배후 세력인 이들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나 이 당시 제기되었던「칭제건원론」과「금국정벌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묘청의 입장도 아니고 김부식의 입장도 아닌 제삼자적 입장에서 접근이 요청된다. 따라서 김부식 일파와 묘청 일파 모두는 분열된 귀족사회에서 그들 자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서, 하나는 고식적인 의타주의에 의한 현상의 유지를 원하였고, 하나는 저돌적인 배타주의에 의한 현상타파를 원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묘청과 김부식을 독립과 사대로 규정하고 이를 선과 악의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옳은 견해라고 할 수 없다”704)李基白,<三國史記論>(≪文學과 知性≫26, 1976) 참조.고 하는 접근방법이 타당성을 지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묘청의 난은 이듬해 2월에 진압되는 과정에서 전술·전략을 둘러싸고 정벌군 내부에 이견이 존재하였지만,705)≪高麗史≫권 98, 列傳 11, 金富軾 참조. 이를 조정하면서 진압에 성공하였다. 그 당시 천도를 통해 서경 세력을 다시금 새롭게 하려는 묘청 등의 재지적 성향의 세력과, 중앙정치계에서 서경천도의 원칙에는 동조했으나 난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정지상·백수한 등의 온건파, 그리고 그들을 제거할 때 김부식과 함께 출정하고 있는 김정순을 비롯한 보다 왕권 안정을 추구한 기존의 서경 세력권이라 할 수 있는 세 집단으로 분열하여 난이 평정되었다는 견해706)姜玉葉, 앞의 글, 89쪽.가 있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이자겸이 발호할 때에 丙午의 소란을 겪었으며, 임 금이 타는 수레는 파천하고 궁궐은 불에 타서 祖宗의 위임을 욕되게 하여, 매양 基業을 연장하고 넓힐 것을 걱정하던 차에 마침 음양학을 하는 사람이 서경으로부터 왔고 더욱이 좌우에서 추천을 더하여 큰 현인으로 대우하였다. 짐이 진실로 밝지 못하니 드디어 그 말에 현혹되어 대화의 새 궁궐을 창건하여 조상의 기업의 중흥을 꾀하였다”707)≪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3년 2월.라는 인종의 자기 변명이 포함된 조서가 반포되었다. 이후 유교적 실천도덕의 실현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경에서의 반란을 진압하여 인종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획득하였던 김부식에 의해 정계가 주도되면서, 서경 세력과 연계되었던 문공인·임경청 등과 연계되었을 것이라는 혐의를 받았던 인물, 예컨대 윤언이·한유충 등에 대한 정리작업이 행해졌다.

김부식이 주도하는 정치 상황 아래에서도 그에 의해 축출되었던 윤언이가 6년만에 김부식에 의해 제기되었던 정지상과의 연계를 부정하고, 칭제건원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중앙정계의 복귀를 갈망하는 謝恩文을 올리고, 김부식은 “혹 부귀에 연연하여 물러가지 않으면 낚시밥을 탐내다가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이니, 마땅히 늙은 모습을 수습하여 어진 이가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겠습니다”708)≪東文選≫권 42, 表箋, 乞致仕表.라는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는 등의 긴장관계가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서 서경반란을 진압하고 난 후 신지배층과 문벌귀족이 협력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709)Edward J. Shultz,<韓安仁派의 登場과 役割>(≪歷史學報≫99·100, 1983), 171쪽.南仁國, 앞의 글, 93∼94쪽.

인종 즉위 당시부터 정국을 이끌었던 지배세력이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의 합치에 의해 하나 하나의 세력으로 결속되어 그 대립과 갈등을 표출했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거치면서 기존 지배질서의 동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왕의 권위 또한 무시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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