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 4) 의종대의 정치혼란

4) 의종대의 정치혼란

의종은 인종 4년 이자겸의 난과 13년 묘청의 난을 거친 다음 유교적 실천 도덕의 실현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김부식에 의해 주도된 정치 상황을 계승하면서 인종 24년(1146) 2월 즉위하였다. 그가 계승할 당시의 왕권은 “고려 국초부터 역대 왕들이 서경 경영에 주력하여 서경 세력을 육성함으로써 개경 세력과 서로 대립 견제시켜 그 힘의 균형 위에 어느 정도 왕권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으나, 묘청의 난 진압에 따르는 서경 세력의 몰락으로 그러한 힘의 균형은 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개경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은 더욱 드세어지고, 반면에 왕권은 크게 위축된 상황이었다”710)河炫綱,<高麗 毅宗代의 性格>(≪東方學志≫26, 延世大 國學硏究院, 1981), 4쪽.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고려는 왕실의 권위 회복과 왕권의 안정이 절실한 과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왕실의 권위 회복과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어야 할 의종은 그의 즉위과정에서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한 차례의 갈등을 겪은 다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처음에 태후가 次子를 사랑하여 세워 태자를 삼고자 하였으므로 왕(의종)이 이를 원망하였다(≪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恭睿太后 任氏).

처음 의종이 元子가 되었을 때 襲明이 侍讀하였는데, 인종이 원자로서 책임을 능히 당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태후 역시 次子를 사랑하여 장차 세워 태자를 삼으려 하거늘 습명이 마음을 다하여 調護하였기 때문에 폐하지 않게 되었다(≪高麗史≫권 98, 列傳 11, 鄭襲明).

위의 내용으로 보면 의종은 위에서 언급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여야 할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반면에 그와 같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인물로는 차자 즉 大寧侯 暻이 적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인종과 恭睿太后 임씨의 태자 교체 의도는 훈요 10조 가운데 3조의 내용인 왕위 계승규정에 근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의종은 정습명의 調護에 힘입어 태자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었으며, 인종 24년 2월 정묘에 인종의 遺詔에 의하여 대관전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이후 의종은 당시 대간들의 ‘伏閤言事三日’이란 언론활동으로 정치 지배세력들의 집요한 정치공세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711)河炫綱, 위의 글, 4∼5쪽. 계속되는 모역 음모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즉 서경인 李淑·柳赫 등이 金의 祭奠使가 돌아갈 때 附書하여 “대국의 군사가 바로 서경에 이르면 청컨대 내응하겠다”712)≪高麗史≫권 17, 世家 17, 의종 1년 11월 병자.고 하였다. 당시 서경 잔존세력의 향배를 알려 주는 하나의 징표가 되기도 하고 인종대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왕실을 지지하는 세력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이 사건713)河炫綱, 앞의 글, 5쪽.과, 李深·智之用 등이 송나라 사람 張喆 등과 모의하고 송의 태사 秦檜에게 글을 통하기를 “만약 금을 치겠다는 명목으로 길을 고려에 빌리기만 하면, 우리가 내응할 터이니 그러면 고려도 가히 도모할 수 있다”714)≪高麗史節要≫권 17, 의종 2년 10월 정묘.고 한 사건의 발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당시 정치 지배세력들의 대간활동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집요한 정치적 공세가 있었고, 신변에 위협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여도 모두 조기에 수습될 정도로 당시의 정국은 인종대 공신인 김부식·임원후를 정점으로 한 권력구조가 유지되고 있었을715)黃秉晟,<高麗 毅宗代의 政治實態와 武人亂>(≪慶熙史學≫14, 1987), 234쪽. 뿐만 아니라 인종에 의해 ‘나라를 다스리는데 마땅히 말을 들어야 할 사람’으로 지칭된 정습명의 보필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종의 신임을 받고 그의 자문 역할을 하였던 정습명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의종의 행동을 규제하고, 이를 의종이 꺼리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그는 金存中·鄭諴에 의해 정계에서 축출되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상황이716)≪高麗史≫권 17, 世家 17, 의종 5년 3월 임진 및 권 98, 列傳 11, 鄭襲明.
≪高麗史節要≫권 11, 의종 5년 3월.
전개되고, 의종은 諫臣에게 “이제부터 매일 조회를 보고자 하니, 무릇 맞대고 간쟁하는 일을 그만 두도록 하라”717)≪高麗史≫권 17, 世家 17, 의종 5년 4월 임인.는 조치를 내리게 된 5년(1151) 4월 이후부터는 의종과 연계된 김존중·정함이 정국운영을 주도하게 되었다.

의종 5년 윤 4월 宦者 정함을 閤門祗候에 임용하고, 김존중·정함에 의해 대령후 경과 鄭敘에 대한 논죄가 시작되면서 정국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다음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① 정함을 權知閤門祗候로 삼으니 어사대에서 宦者로서 朝官에 참여한 사실은 옛 제도에 없는 일이라 하여 간하여도 듣지 않아 대관이 다시 나오지 않으니 대관을 불러 타이르기를 ‘이미 정함의 합문지후 임명을 도로 거두었다’ 하니 대관이 절하고 사례하였다.

② 이때 왕의 아우 대령후 경이 도량이 있어 인심을 얻었다. 정함이 대간을 모함하려 은밀히 散員 鄭壽開를 꾀어서 臺省과 李份 등이 왕을 원망해 경을 추대해서 왕을 삼으려 꾀한다고 무고하므로, 왕이 이에 현혹되어 諫臣을 제거하고자 하니 김존중이 간하여 말리고 유사로 하여금 심문할 것을 청하여 심문하니 과연 증거가 없었다. 수개는 얼굴에 刺字하여 흑산도로 귀양보내고, 빈은 雲梯縣으로 유배하였다.

③ 함이 죄를 면하려고 하여 또 참소하기를 ‘외척과 朝臣이 대령후의 집에 출입한다는 것이 진실로 거짓말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존중이 또한 태후 여동생의 남편 내시낭중 정서, 태후의 아우인 승선 任克正과 더불어 틈이 있었다. 서는 성질이 경박하고 재예가 있었으며, 대령후와 사귐을 맺고 서로 노닐었는데, 존중과 함 등이 유언비어를 꾸며서 아뢰니 왕 또한 의심하였다(이상≪高麗史節要≫권 11, 의종 5년 윤4월 및≪高麗史≫권 122, 列傳 35, 宦者, 鄭諴).

환관 정함의 합문지후 임용을 둘러싸고 전개된 의종과 대간의 갈등은 그의 고신에 대한 서경718)署經에 대해서는 金龍德,<高麗時代의 署經에 대하여>(≪李丙燾華甲紀念論叢≫,一潮閣, 1956) 및 朴龍雲,≪高麗時代 臺諫制度硏究≫, 一志社, 1980, 85∼90쪽) 참조. 여부를 둘러싸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정서와 대령후에 대한 탄핵은 5월 諫議 王軾과 起居注 李元膺 등의 상소를 시작으로719)≪高麗史節要≫권 11, 의종 5년 5월.
≪高麗史≫권 17, 世家 17, 의종 5년 5월 정미.
재상 崔惟淸·文公元·庾弼 등과 간관 崔子英·왕식 등의 논죄를 거쳐,720)≪高麗史節要≫권 11, 의종 5년 5월. 정서는 동래로 유배되고 대령후의 府는 파해지고, 정서의 매부였던 최유청과 李綽升이 외직으로 좌천되었으므로, 마침내 김존중과 정함의 정국 운영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때 정함과 김존중의 위상은 다음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정함의 권력 천단에 대한 반발로 낭장 崔淑淸이 정함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었고721)≪高麗史≫권 122, 列傳 35, 宦者, 鄭諴. 김존중은 정함과 더불어 결탁하고 크게 권력을 쓰면서 자기에게 붙는 자는 승진시키고 동조하지 않는 자는 배척하니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모두 그 집에 몰려가서 재산이 거만에 이르고, 그 형제들과 친척들이 권세를 믿고 교만 방자하였다722)≪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金存中.
≪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0년 3월.
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정함·김존중에 의해 야기된 대령후와 정서의 탄핵사건에 대한 해석에는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이 사건이 발생할 당시의 관계 요로 특히 대간직의 인적 구성을 보면 최유청·문공유·문공인과 같은 한안인파로 불리는 예종대 신진 측근세력들은 대간의 상위직에 있었다. 또 한 부류는 김존중·왕식·이원응들로서 이들은 당시 문벌귀족적 배경이 없는 대신 인종대 과거에 급제한 후 의종이 태자였을 때 春宮侍讀으로 가까이 지냈던 인연으로 의종의 즉위와 함께 그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아 성장했던 김존중을 대표로 하는 세력집단이 존재하였는데, 이들 사이에 발생한 대립으로 보는 것이다.723)Edward J. Shultz, 앞의 글, 175쪽.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바로 정서와 대령후의 역모사건으로 인한 비행 때문에 발생된 것이기 보다는 의종대 등장한 또 다른 신진의 측근세력, 즉 김존중 계열이 최유청을 원로로 하고 있던 구측근세력에 대해 도전한 것이며, 정서는 한갖 희생양에 지나지 않아 사실은 의종의 아우로서 도량으로 인심을 얻고 있던 대령후에 대한 왕의 열등의식을 이용한 측근 김존중 계열의 정국주도권 획득을 위한 계략이었던 것으로 정서와 대령후의 역모가 아니라 출신 성분이 다른 의종 측근들 사이의 권력투쟁으로써 이해하는 것이다.724)朴漢男,<崔惟淸의 生涯와 詩文分析>(≪國史館論叢≫24, 1991), 139·142쪽. 또 다른 하나는 외척세력의 증대를 막고 유력한 종친을 축출하여 강력한 통치기반을 구축하려는 의종의 의도와 직결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725)黃秉晟, 앞의 글, 239쪽.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의종으로 하여금 기존의 정치질서에 의존하기보다 의종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정치집단의 성격을 지닌 측근세력을 형성하게 하였고, 당시 정치 지배세력들이 그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가 이어져 마침내 6년 7월에는 내시 14인과 茶房 5인을 내쫓기에 이르렀다.726)≪高麗史≫권 17, 世家 17, 의종 6년 7월 을묘.
≪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1년 4월·7월.
그러나 다음달에 정함이 다시 소환되어 내시에 충당됨으로써,727)≪高麗史節要≫권 11, 의종 6년 8월. 의종에 의해 채택되었던 권력의 운용 방식에는 변화가 없었다.

위와 같은 운영 방식은 의종 5년 이후 정함과 함께 정국을 주도하였던 김 존중이 10년 3월 죽은 후에도 지속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의종은 점장이 내시 榮儀의 “대궐 동쪽에 새로 翼闕을 이룩하면, 가히 기업을 연장할 것입니다”라는 건의를 받아 들여 아우 翼陽侯의 집을 탈취하였을728)≪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1년 1월.뿐만 아니라 즉위 당시부터 의종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존재하였던 대령후 경을 천안부로 귀양을 보내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729)≪高麗史≫권 18, 世家 18, 의종 11년 2월 무신.
≪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1년 2월.
≪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大寧侯 暻.
이 때 정서와 혼인관계와 가족관계로 연결되었던 최유청·임극정·김이영·이작승 같은 인물들도 함께 중앙정계에서 축출되었는데,730)≪高麗史節要≫권 11, 인종 11년 2월. 이들은 의종 24년 무신란이 발생할 때까지 중앙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였다. 의종의 대령후에 대한 조치는 “왕이 본래 도참을 믿어 여러 형제와 우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731)≪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大寧侯 暻.라고 평가되는데, 왕실의 藩屛이 되는 왕제들에 대한 이러한 조치를 통해서 의종이 왕권 강화와 관련된 어떠한 조치들을 취하더라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의종 11년(1157) 5월 다시 정함을 權知閤門祗候로 삼았으며,732)≪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1년 5월. 정함의 고신에 대한 서경을 둘러싸고 당시의 정치 지배세력의 구성원과 대립하였다. 의종의 이와 같은 조치에 宰臣과 諫官이 그 불가함을 논쟁 고집하니, 의종은 “경들이 짐의 말을 듣지 않으니, 짐은 먹는 것이 달지 않고 잠자리가 편하지 않다”고 하면서 서경을 고집하였다. 이에 평장사 崔允儀·우간의 崔應淸과 좌승선 직문하성 李元膺·우승선 좌간의대부 李公升 등이 서명하여 정함은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정함은 권세와 은총이 날로 성한 바 되어 친척들이 많이 조정에 들어서고, 官奴 王光就·白子端을 천거하여 우익으로 삼아서 번갈아 참소하여 조신을 모멸하고 민간을 침해하니, 환관들이 국법을 어지럽게 함이 이 때보다 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733)≪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1년 11월.
≪高麗史≫권 122, 列傳 35, 宦者, 鄭諴.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어 참고된다. 즉 정함·백선연·왕광취 등이 의종대에 권력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의종의 총애와 비호의 결과였으며, 이들은 전적으로 국왕의 총애에 의지하면서 국왕의 이익을 대변하여 국왕의 권력을 대변하는 소수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을 寵臣으로, 이들에 의해 주도되는 정치운영의 방식을 寵臣制라 할 수 있다면, 이는 의종이 왕권 강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구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총신제의 시행은 이들에게 일정한 역할의 수행을 기대하는 한편, 귀족들이 정치를 주도해 가는 현실에서는 귀족들에 대한 하나의 도전을 의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고려사회의 위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734)洪承基,≪高麗 貴族社會와 奴婢≫(一潮閣, 1983), 175∼176쪽.

鄭諴의 고신에 대한 서경을 둘러 싸고 의종과 당시 정치 지배세력의 갈등 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그에 대한 의종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정함은 과인이 포대기에 싸여 있을 시절부터 정성껏 보호하여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에, 권지합문지후를 제수하여 그 공로를 갚으려 했더니, 이미 3년이 경과하였으되 경들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으니 이는 실로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다. 만약 서명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을 모두 죽여서 젓을 담글 것이다(≪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2년 6월).

이런 의종의 주장에 당시 정치 지배세력의 대응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정함의 선조는 聖祖께서 개국하실 때에 명을 거역하고 복종하지 않아 노예에 충당시키고 종류를 구별지어 조정의 반열에 서지 못하도록 하였사온데, 이제 현달한 직위에 임명하시어 태조의 공신의 후예로 하여금 도리어 명을 거역한 종류에게 하인의 부림을 받게 하시니, 이는 태조께서 법을 세워 후세에 전하신 뜻에 어긋나오니 한 당을 이룬 자도 또한 서인으로 계급을 낮추소서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2년 6월).

위와 같은 의종과 당시 인물들 간의 대립은 정함의 관직 삭제,735)≪高麗史節要≫권 11, 의종 2년 7월. 정함의 삭직을 청한 인물에 대한 좌천,736)≪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2년 8월. 그리고 다시 임명되는737)≪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2년 9월. 과정을 반복한 끝에 정함이 왕에게 盛饌을 올리고 옷을 바치자 권세가 환관에게 있다니 하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738)≪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3년 1월.
≪高麗史≫권 122, 列傳 35, 宦者, 鄭諴.
정함의 고신 서경을 둘러싸고 전개된 국왕과 당시 정치 지배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은 국왕이나 정치 지배세력 어느 쪽도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내용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의종은 음양 비축의 설을 지나치게 믿어 매양 행재소에서 승려와 도사 수백 명을 모아 놓고 항상 齋醮를 베푸니 허비되는 것이 한이 없어 내탕의 저축이 탕갈되었으며, 또 많은 개인 집을 빼앗아서 별궁으로 삼고 재물을 토색해 들였는데, 이를 이름하여 別貢이라 하고 환관으로 감독케 하니 이를 빙자하고 사리를 영위하였다”는 것이다.739)≪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6년 3월. 다른 하나는 “왕은 간관들이 崔光鈞의 고신에 서명하지 않는다 하여, 諫議 李知深·給事中 朴育和 등을 불러 서명하기를 독촉하니 낭관들이 두려워해서 ‘예 예’하고 물러났다. 이 때에 宮人 無比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광균이 그의 사위가 되어 그 인연으로 갑자기 式目錄事에 임명되니 사대부들이 이를 갈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간관을 조롱하기를 ‘말하지 말라는 것은 司諫이요 말없는 것은 正言이요 말더듬는 것이 諫議이다. 유유히 날을 보내고 무엇을 논했던고’ 하였다”는 것이다.740)≪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6년 6월. 이러한 상황 하에서 총애를 받던 궁녀가 媚道로서 닭을 그린 그림을 몰래 왕의 요 속에 넣었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741)≪高麗史節要≫권 18, 의종 16년 9월 신축.

왕의 잦은 행차로 호종한 朝官과 호위하는 군사들은 밥을 먹지도 못하고 길을 잃어 쓰러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정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환관 백선연과 궁인 무비의 추문을 논하고, 左常侍 崔褎偁 중요한 직위를 맡아 권세가 중외를 주름잡고 탐욕이 한없어 자기에게 붙좇지 않는 자는 반드시 중상하고 鉅萬의 재산을 모았다고 지적한 文克謙에게 오히려 좌천이란 인사 조치로 대응하였다.742)≪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7년 8월.
≪高麗史≫권 99, 列傳 12, 文克謙.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관리의 인사권 행사에 공정을 기할 수 없었으니, 환관과 결탁하여 관직에 임명된 이후 그들의 뜻을 받들기를 노복 같이 하는가 하면743)≪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7년 9월. 왕 측근의 내시들은 서로 다투어 진귀한 물품을 바치는 데 열중하는 현상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744)≪高麗史≫권 18, 世家 18, 의종 19년 4월 갑신

당시의 국정 운영이 파행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종은 국가의 운영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는 다음의 두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의종 21년(1167) 1월 奉恩寺에 갔다가 밤에 돌아와 觀風樓에 이르렀을 때, 좌승선 김돈중의 말이 본래 길이 잘 들지 않은 데다 징과 북소리에 더욱 놀라 한 기사의 화살통을 들이받아서 화살이 튀어나와 輦 옆에 떨어진 일이 있었을 때, 궁으로 돌아와 계엄을 펴고 府兵을 동원하여 불의의 일에 대비하면서 자신의 아우 대령후 경의 家童에게 그 혐의를 두고 그들을 참수하였다는 것이 그 한 사례이다.745)≪高麗史≫권 18, 世家 18, 의종 21년 1월 계축.
≪高麗史節要≫권 11, 의종 21년 1월.
그리고 22년 3월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왕의 아우 翼陽侯와 平凉侯가 자못 인심을 얻었기 때문에 왕이 변란이 있을까 의심하여 거처를 피하였다는 것이 또 다른 사례이다.746)≪高麗史≫권 18, 世家 18, 의종 22년 3일 정축.
≪高麗史節要≫권 11, 의종 22년 3월.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의종은 즉위 이후 계속적으로 자신의 아우들이 왕위에 도전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였던 것은 아닌가 한다.

의종은 같은 해 3월 서경에 행차하여, 장차 낡은 것은 고치고 새로운 것은 정하여 다시 王化를 부흥코자 하여 옛 성인이 경계한 유훈과 당시의 폐단을 구제할 사무를 채택하여 새로운 政令을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陰陽의 奉順·佛事의 崇重·沙門의 歸敬·三寶의 保護·仙風의 遵尙·民物의 救恤 등 6조로 구성되었다.747)≪高麗史≫권 18, 世家 18, 의종 22년 3월 무자.
≪高麗史節要≫권 11, 의종 22년 3월에는 “9조의 新令을 반포하였다”라 하여≪高麗史≫보다 3조가 더 있음을 보여 주지만 자세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6조의 내용은 상당히 관념적인 것으로 현실정치와 관련된 것은 찾을 수 없다. 이 6조의 내용에 대하여 “그 내용이 불교·음양설·선풍에 대한 것으로 정치에 대한 의종의 성격은 반유교적이었다. …그것은 당시 왕권을 제약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문신귀족 세력은 거의가 유교적 지식인이었다. 따라서 고려사회는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존 문신귀족 세력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의종은 그들의 정치활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던 유교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즉 문신귀족 세력에 대한 반감이 바로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한다”748)河炫綱, 앞의 글, 12∼13쪽.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정국주도권이 의종과 그의 측근세력에 있었음과 대표적 문신세력들은 정함의 고신 서경과 관련되거나, 정서·대령후의 사건에 연루되어 정계에서 축출되었음 등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해석이 타당할지는 의문이라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의종대 정국 혼란의 큰 요인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였던 의종과 정치권을 파행적으로 이끌어 간 의종 측근세력들의 전횡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당시 정치 지배세력들은 정상적인 정국 운영을 위해 노력하려는 자세를 보이기 보다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여 정국 불안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의종과 집권 귀족층은 유착관계가 아니라 대립·갈등관계에 있었던 것이며,749)河炫綱,<武臣政變은 왜 일어났는가>(≪韓國史市民講座≫8, 一潮閣, 1991), 12쪽. 당시 귀족세력들은 또 그들대로 이해관계에 따라서 서로 대립·갈등의 양상을 보이고 있으므로750)河炫綱, 위의 글, 14쪽. 무신에 의한 문신정권의 붕괴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南仁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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