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1) 고려 초기의 정치제도
  • (2) 건국 초기 정치기구의 기능과 권력관계

(2) 건국 초기 정치기구의 기능과 권력관계

 건국 직후에 설치된 12개 정치기구 가운데 가장 중추적 기능을 가진 것은 광평성·내봉성·순군부·병부의 네 기구였다. 이것은 이 때의 인사발령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기구일 뿐 아니라 뒤의 사실이지만 景宗 즉위년 金傅誥書에 서명한 사람들도 바로 이들 네 관부의 장·차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네 개의 관부는 고려 초기의 宰府로 행세하였다고 보여진다.

 권력기구인 4부 가운데 광평성과 내봉성은 정치면을 관장하고 순군부와 병부는 군사면을 담당하여 그 기능이 분화되고 있었다. 그러면 정치적인 두 기관과 군사적인 두 기관은 각각 그 기능상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먼저 광평성과 내봉성의 관계부터 검토해 보려 한다.

 광평성은 그 서열이 가장 앞서고 또 수상에 해당하는 시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고 관부임을 알 수 있다. 광평성이 이미 태봉 때부터 최고 정무기관이었던 것은 913년 왕건이 태봉의 波診粲·兼侍中이 됨으로써 그 위계가 百燎의 으뜸이 되었다는 사실로 증명된다.0005)≪高麗史≫권 1, 世家 1. 고려의 광평성은 그 관부명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조정에서 널리 정치를 평의하는 정부기관이며, 시중의 존재로 보아 신라 執事省의 후신으로 뒤의 中書門下省으로 바뀐 최고 관부로 보여진다.≪高麗史≫백관지에서 광평성을 뒤의 상서성에 해당한다고 한데 반하여≪三國史記≫궁예관호에서는 광평성의 관원인 匡治奈, 徐事를 고려의 시중, 시랑이라 하여 중서 문하성의 전신으로 본 것은 타당하다고 하겠다.

 내봉성은 그 명칭으로 보아 국왕 측근에서 왕명을 받들어 시행하는 행정기구로 보여진다.≪三國史記≫궁예관호에서는 내봉성을 지금의 都省(尙書省)이라 한데 대하여≪高麗史≫백관지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광평성을 상서성에 비유하여 그 견해가 다르나 대체로 상서성의 기능과 보다 관련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고려 초기의 정치체제가 뒤의 3성의 그것과 전혀 이질적이었으므로 그들의 전후관계의 계보를 연결해 보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고려 초에 吏部에 해당하는 기구가 없었으므로 내봉성에서 관리의 인사를 관장하고 그 관원에 특별히 監·理決·評察을 설치하여 행정사무를 評理·監察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보면 내봉성을 상서도성에 비정한≪三國史記≫의 견해가 보다 현실에 가까웠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광평성은 정책결정의 최고 정무기관인데 대하여 내봉성은 행정 집행기관이었다. 그런데 광평성은 호족세력에 의한 정책결정 기관이고 내봉성은 왕권을 배경으로 정책을 시행하는 집행기관이라 하여 양자를 대립시켜 이해함으로써 호족연합정권설의 주장을 뒷받침한 견해가 있다.0006)李泰鎭,<高麗宰府의 成立>(≪歷史學報≫56, 1972).
李基白,<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그러나 광평성을 호족세력의 대변기관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며, 역시 광평성은 공식적인 정부기관으로 왕조측에 서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 이유는 첫째 광평성은 고려건국 후에 새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궁예 때부터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전제적인 궁예가 독립적인 호족세력의 발언권을 인정하였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광평성에 시중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시중은 정부의 수상으로 신라의 집사성 때부터 국왕측에 서 있던 관료였다. 이런 점에서 시중이 장관 이었던 광평성을 호족세력의 집중기관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셋째는 광평성과 내봉성의 관리 임명에 실제로 호족세력 출신의 開國功臣이 포함되지 않고 실무행정의 능력과 경험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였으며, 또한 두 관서의 관리가 서로 교차하여 전직되었다는 사실이다.0007)태조 원년에 崔凝이 廣評郞中으로 있다가 곧 內奉卿이 되었고, 다시 廣評侍郎으로 승진시키자 이를 사양한 사실은 이를 나타낸다(≪高麗史≫권 92, 列傳 5, 崔凝). 이것은 양자가 호족과 국왕 양편의 대립적 관계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넷째는≪高麗史≫백관지에 있는 西京留守官의 조직이다. 태조 때 서경의 관부는 중앙관제를 기본으로 구성되었는데 廊官은 시중·시랑·낭중 등이 있 어 광평성에 해당되며, 衙官은 具壇·卿 외에 監·粲·理決·評察이 설치되 어 내봉성에 비유된다. 한낱 지방관청인 서경 유수관에 광평성에 해당되는 장관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호족세력의 대변기관이라는 견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서경에 호족과 국왕세력의 대립관부가 병설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광평성은 호족세력, 내봉성은 국왕측의 대립적 기관이라는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고려 초기의 군사기능을 가졌던 순군부와 병부도 역시 권력기구였음은 그들이 서열 3·4위였으며 뒤에 金傅誥書에 서명한 재부였던 점으로 알 수 있다. 같은 군사기관이지만 순군부가 典兵하는 권한을 가진 병마권의 행사 기관인데 대하여 병부는 단순히 군사행정 기구의 역할만 담당하였을 따름이었다. 徇軍이란 명칭 자체가 군중에 宣令하는 병마통수권의 소유를 의미하며 병부보다 권력이 상위에 있었던 것이다.0008)≪高麗史節要≫1, 태조 원년 9월에 의하면 靑州人 玄律을 徇軍郎中으로 삼자 裵玄慶 등 개국공신들이 같은 청주인인 林春吉이 전에 徇軍吏로서 모반한 예를 들어 순군부가 병권을 장악하는 관부라는 까닭으로 이를 반대하자 왕은 玄律을 순군낭중 대신 병부낭중으로 개수한 것은 좋은 예이다. 이와 같이 순군부가 병마통수권을 장악한 강력기구인데 대하여 병부는 단순한 군사행정 기구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장평성을 호족세력의 대변기관, 내봉성을 국왕권 직속기관으로 병립시킨 견해를 이들 군사적인 두 기구에도 적용하여, 순군부를 호족세력의 군사적인 협의체로, 병부를 왕명에 예속되는 행정기구로 본 견해가 있다.0009)李泰鎭,<高麗宰府의 成立>(≪歷史學報≫56, 1972).
李基白,<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그러나 이 견해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첫째 순군부도 병부와 함께 궁예 때부터 있었던 관제이기 때문에 이를 호족군사력의 협의체라고 주장한 가설은 성립될 수 없으며, 실제로 병마권이란 군대를 동원 지휘하는 發兵權으로 국왕 고유의 권한이니만큼 독립적인 여러 호족세력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건국 직후 아직도 중앙이나 지방에 독자적인 사병을 소유한 호족세력이 존재하던 시기에는 국왕 직속의 병마통수권을 가진 순군부의 설치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중앙관제를 모방하여 제정한 西京官制에 병부만 있고 순군부가 설치되지 않은 것은 병마통수권이 국왕에만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위에서 우리는 정치적 기능을 가진 광평성과 내봉성, 군사적 기능을 가진 순군부와 병부가 고려 초기의 재부의 위치에 있었음을 해명하였다. 그러나 태조대 중기부터는 새로이 內議省이 설치되어 중요한 기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내의성은 국왕 측근의 고문기관으로 특히 국왕의 詔勅을 작성하여 유교적인 두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태조가 서거할 때 백관이 내의성문 밖에 列位하여 學士 金岳이 작성한 遺命을 재신 왕규가 宣示한 것이나, 뒤의 사실이지만 김부고서를 작성한 王融이 內議令·兼摠翰林이었던 것으로 보아 내의성이 국왕 측근의 문필기관으로서 그 권력이 대단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와 같이 文翰官이 임명된 내의성이 유교적인 草制機關으로 국왕 측근에서 정책적인 고문의 역할을 담당한 것은 태조가 유교정치의 실현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라 여겨진다.

 위의 광평성·내봉성·순군부·병력, 그리고 내의성의 5개 관부는 고려 초 기의 재부로서 국가정치의 중추적 지위에 있었다. 그 중에서 광평성·내봉성 내의성의 3성이 정치면을 담당한 중요 역할을 가졌으나 또한 순군부·병부 도 단순히 군사면의 기능을 넘어 국정에 참여한 재부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었다. 이들 재부 외에도 초기에는 창부·의형대 등 많은 관서가 설치되어 각각 자체의 기능을 실천하였는데, 이것은 후대의 3성·6부·7시 등 당제를 본딴 정치체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태조 건국 후 3성·6부가 성립된 성종 초까지는 고려의 독자적인 정치체제가 운영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건국 초기에는 개국공신 계열이나 王妃族 등 호족 출신의 중신들이 이들 공식적인 관부 밖에서 관계만 지닌 채 실권을 장악하였다는 사실이다. 건국 직후에 임명된 광평성 시중 金行濤나 내봉성령 黔剛, 순군부령 林明弼, 병부령 林曦 등 정부고관을 보면 건국공신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건국 당시에 정부공직에는 행정적 능력을 가진 실무자들이 임명되고 실질적인 권력을 소유한 혁명 주체세력들은 관계만 지닌 채 정부 밖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건국 직후에는 중요한 정부기구라 하여 권력을 독점한 것이 아니라 건국공신들이 정부 밖에 따로 존재하여 실권을 행사하는 이원적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적 권력구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일원화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즉 국가정부의 실질적 기능을 가진 정부기구가 대두하면서 개국공신 등 호족과 왕비족들의 중신들이 점차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중앙정계에서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었던 호족세력이 점차 재신으로 轉身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특히 태조 19년 후삼국 통일 후에 촉진되었으며, 이러한 추세는 태조 이후에도 그대로 진행되어 정부기구의 권력은 시간이 갈수록 보다 실질화되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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