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1. 중앙의 통치기구
  • 2) 중서문하성
  • (4) 중서문하성의 기능

(4) 중서문하성의 기능

 중서문하성의 기능에 대하여는≪高麗史≫백관지에 “門下府(중서문하성)는 百揆·庶務를 관장하고 그 낭사는 諫諍·封駁을 관장한다”고 하였다.0049)≪高麗史≫권 76, 志 30, 百官 1, 門下府. 중서 문하성은 곧 2품 이상의 재부를, 낭사란 3품 이하의 낭사를 가리킨다. 이것은 중서문하성이 재부와 낭사로 구분되고 그 직능도 달랐음을 뜻한다.

 재부의 기능을 백규 서무를 관장하였다고 표현한 것은 좀 추상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부가 재상들이 모여 국가의 증요사를 회의 결정하였다는 의미로 보아 좋을 것이다. 원래 재상이란 論道經邦, 국가의 중요 軍國事를 의론하는 대신이었으므로 재부도 고려의 최고 정무기관이라 할 수 있다.

 재부는 최고 정무기관으로 국내외의 중요사를 의론 결정하였다. 여기에는 국방문제 등 군국대사도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제도적으로도 재부는 중추원과 함께 都兵馬使 및 式目都監의 회의원으로 국방문제와 법제문제 등을 합좌 회의하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재신은 대신으로 국가 중대사의 결정권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재추 양부가 넓은 의미의 재상이 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재신은 眞宰라 하여 그 지위가 보다 높았다.

 이와 같이 재신은 중요한 국정 일반을 관장하였으며, 또한 구체적으로 특정 국무를 한가지씩 나누어 관장케 하였으니 그것은 尙書 6部의 判事 겸직이다. 고려시대에는 재신의 班次에 따라 각각 6부의 판사를 겸하는 제도가 있었다. 재신의 반차란 제1위가 冢宰 또는 首相으로 문하시중이 보통 이에 해당되었다. 제2위는 2宰 또는 亞相이라 하였으며, 다음에 3宰·4宰·5宰 등으로 불렀다. 이들이 경하는 6부도 그 순차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고려의 6부는 吏部·兵部·戶部·刑部·禮部·工部의 순이었으므로, 수상은 이부의 판사를 겸하고 아상은 병부, 3재는 호부 등을 자동적으로 겸대케 하였다.0050)문하시중이 수상으로 判吏部事를 겸한 것은 당연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았던 사례도 있었다. 睿宗 5년 12월에 문하시중·판이부사였던 尹瓘이 여진정벌 패전의 죄로 아상 崔弘嗣에게 이부를 넘겨 주고 병부를 맡게 된 것은 그 예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상시의 이례에 불과하며 원칙적으로는 문하시중인 수상이 판이부사를 겸하게 되어 있었다. 재신의 6부 판사 겸대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실무에 관여하였다. 관리의 인사를 결정할 때 이부·병부판사가 각각 이부·병부에 앉아 그들 관원과 함께 전주를 의론 결정하였다는 사실은 이를 보여준다.0051)≪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이러한 재신의 6부판사제는 상서성의 권한을 중서문하성에 흡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위와 같은 재신의 기능에 대하여 3품 이하의 관원인 낭사의 직능은 전혀 다르다. 백관지에는 낭사의 임무를 간쟁·봉박이라 표현하였다. 국왕의 잘못에 대한 간언과 부당한 결정사항에 대한 반박을 직능으로 하였다는 뜻이다. 낭사를 간관이라고도 표현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이들은 국왕 뿐 아니라 상관인 재상의 잘못에 대하여도 言官의 직사를 하였다.

 이와 같이 낭사는 언사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부수된 사항이라 할 수 있는 署經의 권한도 가졌다. 고려시대에는 관직을 제수할 때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御史臺의 臺官에게 그 관리의 告身을 심사 동의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이 서경이다. 아무리 국왕의 명이라 하더라도 대간의 서경이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그 관직은 제수되지 못하였다. 이 밖에 어떤 법을 세울 때도 대간의 서경이 반드시 필요하였으므로0052)≪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4월 기사에 前朝(고려)는 하나의 法을 세우거나 하나의 관직을 설정할 때 반드시 대간의 합의가 필요하였다고 하였다. 낭사의 권한이 지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언사와 서경의 권한이 간관 뿐 아니라 사관·판관직 등 6품 이상의 모든 성랑에 해당되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이들 낭사와 더불어 재신도 언사와 서경을 함께 한 사실이 보인다. 가령 인종 18년에는 재신이 성랑과 함께 時弊를 상서한 바 있으며,0053)≪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8년 윤 6월. 의종 11년에는 환관인 鄭諴의 고신에 재신과 간관의 서경이 요구되었던 사실도 있었다.0054)≪高麗史節要≫권 11, 의종 11년 11월. 그러나 이 때의 재신의 언사나 서경은 국사를 관장한 재상으로서의 권한으로 행한 것으로 법제적인 것은 역시 낭사의 기능에 속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언사와 서경을 대간이 함께 행하였는데, 어사대는 재신과 다른 성랑과 같은 지위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재신과 낭사는 같은 중서문하성의 관원이면서도 전혀 그 기능이 달랐다. 그렇다고 양자가 완전히 유리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高麗史≫에는 「재신·낭사」 또는 「재상·간관」·「성재·성랑」의 표현이 자 주 보이고, 실제 앞의 예와 같이 재신이 낭사와 함께 언사와 서경을 한 사실이 있다. 따라서 낭사로 볼 때는 재신과 함께 「재신·낭사」로 共議할 때도 있고 또한 어사대와 함께 「臺諫」으로 공동 활동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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